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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ipziger Buchmesse > LBM 2017 전시도서 > 초정선생유고(草亭先生遺稿)[박수현]

 
초정선생유고(草亭先生遺稿)[박수현]
상품명 : 초정선생유고(草亭先生遺稿)[박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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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정집(草亭集)[박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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家文을 찾아서 : 밀양박씨편①
『≪韓琴新譜≫와 마포 水明亭 이야기』관련문헌


▣原本 書誌

-도서명 : 草亭先生遺稿
-表題 : 草亭遺稿
-권두제 : 草亭先生遺稿
-편저자 : 草亭 朴守玄(1605~1674) 著
-판사항 : 筆寫本
-발행사항 : 未詳
-형태사항 : 不分卷 5冊, 10행 20字

*본 의궤는 수명정 3대 승계자 草亭(초정) 朴守玄(박수현)[1605~1674] 관련 기록문헌이다.

*별도의 필사본 ≪草亭集≫(1책)이 전한다. 내용은 ≪초정선생유고≫(5책)의 첫 책에 해당한다.
 

▣저자 소개

-姓名 : 朴守玄(박수현)
-字 : 太玄
-號 : 草亭
-本貫 : 密陽
-生沒年 : 宣祖 38(1605) 04月 12日 ~ 顯宗 15(1674) 3月 18日
-曾祖 : 朴栗[사헌부장령], 祖 朴彛叙[이조참판], 父 朴𥶇[병조참판]
-庚子增廣試 복시 장원(1660)
-官止 成均館 司藝 贈 禮曹參判 弘文館提學
-小北 八文章의 한 분. 설봉 강백년, 죽당 신유, 남곡 임한백 등과 깊은 친분 유지


▣小北 八文章
姓名  生沒      本貫 
沈广+齊(심 제)  宣祖 30(1597) ~ 未詳  子美  沙川  豊山人 
姜柏年(강백년)  宣祖 36(1603) ~ 肅宗 7(1681)  叔久  雪峯  晉州人 
朴守玄(박수현)  宣祖 38(1605) ~ 顯宗15(1674)  太玄  草亭  密陽人 
任翰伯(임한백)  宣祖 38(1605) ~ 顯宗 5(1664)  景翼  南谷  豊川人 
鄭昌胄(정창주)  宣祖 39(1606) ~ 未詳  士興  晩洲  草溪人 
李休徵(이휴징)  宣祖 40(1607) ~ 肅宗 3(1677)  善世    廣州人 
  (남  선)  光海君 1(1609)~孝宗 7(1656)  伯圖  滄溟  宜寧人 
  濡(신  유)  光海君 2(1610)~ 顯宗 6(1665)  君澤  竹堂  高靈人

▣영인본 견본


<비단표지>

▲마포 수명정(水明亭)의 3대 승계자 박수현(朴守玄)의 문집

▣초정선생유고(草亭先生遺稿) 해제(解題)

1. 서언(緖言)

초정(草亭) 박수현(朴守玄: 1605~1674)의 자(字)는 태현(太玄)이며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시(詩)와 문장(文章)에 능하였던 그는 소암(疎菴) 임숙영(任叔英: 1576~1623)의 문하에서 수학(受學)하였고, 조선(朝鮮) 중기(中期)에 소북파(小北派) 팔문장(八文章) 의 한 사람으로 불리었다. 그는 40여 년간의 벼슬살이 하는 동안 주로 그의 향제(鄕第)인 양주(楊洲) 회천(檜泉)을 중심으로 창작활동을 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그의 유고(遺稿)에 수록된 8백30여 수(首)의 시(詩)와 60여 편(篇)의 문(文)이 불분권(不分卷) 5책의 형태로 문집(文集)의 형식만을 갖춘 채 필사(筆寫)되어 그의 후손에 의해 전해오고 있다. 이 유고를《번역 초정선생유고》의 대본으로 삼았다.
이 유고(遺稿)는 한 면(面)에 10행 20자의 정갈한 글씨로 수록되어 있으며, 언제 누구의 손에 의하여 필사(筆寫)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또한 필사된 서체(書體)가 일정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초정의 사후에 몇몇 사람의 손에 의하여 정리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제 초정의 유일한 문집인 이 유고가 다시 그의 후손들의 노력에 의하여 번역됨으로써 문집 속에 담겨져 있는 초정의 학문세계를 다소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유고에는 당시에 교류하였던 사람들과의 관계가 뚜렷할 뿐만 아니라 그가 벼슬하였던 시기에 창작하였거나 그의 심경을 여과 없이 읊은 작품들이 저작의 순서대로 수록되어 있어서 이《번역 초정선생유고》가 갖는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또한 초정(草亭)이 병자호란(丙子胡亂) 이후의 침체된 나라의 분위기와 관련하여 산중(山中)의 제왕인 호랑이를 의인화(擬人化)한 산군전(山君傳) 과 같은 작품을 남긴 것은, 당시 조선 가전체문학의 최고봉으로 꼽히던 동명(東溟) 정두경(鄭斗卿)과 최효건(崔孝騫)의 뒤를 이었다는 점에서 그의 색목(色目)이나 사승(師承)간의 영향이 지대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는 곧 초정이 당시 시대상을 고려하여 성리학적 세계관에서 벗어나 좀더 현실적인 측면에서 글쓰기를 하였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의 시(詩)작품 대부분이 벼슬살이하거나 신변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들에 대한 감회를 사실적이면서도 진솔하게 표현하고 있는 데에서 그러한 정황을 감지할 수 있다 하겠다.
물론, 문장가(文章家)의 한 사람답게 글 전반에 흐르는 분위기는 평이한 문장보다는 세련되고 난해한 문장을 주로 구사하는 경향이 있어, 초정(草亭)의 문장(文章)만이 갖는 특징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그럼에도 그동안 학계에 본격적으로 소개되지 않고 있었던 것은 그의 문장력이나 내용 때문이 아니라 그의 문집이 필사본의 형태로 가문(家門)에 소장된 채로 전해졌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그리고 초정의 묘갈명에“공은 힘써 학문과 문장을 했지만 다 펴지 못하였다.”라고 서술되어 있고, 또“그가 나라를 위하여 몸바친 공신(功臣)의 자손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높은 벼슬을 탐하지 않은 것은 현종 5년(1664)에 평안도사(平安都事)로 있을 때 암행어사의 구무(構誣)로 인하여 오랫동안 산직(散職)에 머물렀던 일을 그 원인으로 말하는 사람이 없지 않으나 그보다는 벼슬살이에 대한 허망함과 고상하고 개결(介潔)한 그의 품성(品性)에서 그 이유를 찾아야 옳을 것이다.”라고 기술하고 있어 주목해 보고자 한다. 이제 그의 가계를 먼저 살펴보기로 한다.


2. 생애(生涯)와 가계(家系)

초정(草亭)은 선조38년(1605) 4월 10일에 태어났으며, 고려 중대광 대제학 밀성군(密城君) 대양(大陽)의 9세손이다. 그의 조부(祖父) 비천공(泌川公)은 이조참판 박이서(朴彛叙)이고 부(父) 대호공(大瓠公)은 병조참판 박로(朴𥶇)이다. 그는 대호공의 일곱 아들 중 셋째로 형제들 중에는 유일하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청현(淸顯)의 벼슬을 역임하였다.
20세 때인 인조2년(1624)에 아우 수고(守古)와 함께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한 이후 인조15년(1637)에 처음 벼슬에 나아가 사직서 참봉(社稷署參奉)을 시작으로 광흥창 봉사(廣興倉奉事)와 상의원 직장(尙衣院直長)을 거쳐 호조 좌랑(戶曹佐郞)에 올랐다. 벼슬을 시작한지 10년 뒤인 효종1년(1650)에는 영평현령(永平縣令)에 특승(特昇)되어 2년의 임기를 두 번이나 거듭하여 마치고 4년 만에 돌아오자, 고을 백성들이 유애비(遺愛碑)를 세워 그를 기린 바 있다.
또한 현종1년(1660)에 형조좌랑(刑曹佐郞)으로 있으면서 그해 겨울에 실시한 증광문과(增廣文科)에서 56세의 나이로 병과(丙科)에 급제하였으며, 이서우(李瑞雨), 유하익(兪夏益), 조위봉(趙威鳳)과 같은 남인계(南人系) 선비들을 비롯하여 정화제(鄭華齊)와 같은 소북파(小北派)의 쟁쟁한 인사들이 그와 동방(同榜)이었다. 문과에 급제한 이후에는 예조 정랑(禮曹正郞)과 평안도사(平安都事)를 역임하였고 현종12년(1671)에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를 끝으로 더 이상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갑인년(1674, 현종15) 3월 14일에 향년 70세로 졸하니, 예조참판(禮曹參判) 홍문관제학(弘文館提學)을 추증(追增)받았으며, 묘(墓)는 선영(先塋) 외국(外局)의 자좌(子坐)인데 표석(表石)이 있고, 부인 정부인(貞夫人) 의령남씨(宜寧南氏)는 참지(參知) 증 이조판서(贈吏曹判書)두첨(斗瞻)의 딸로 만력(萬曆) 정미년(1607, 선조40) 11월 18일에 출생하고 을축년(1685, 숙종11) 정월 10일에 졸하니, 향년이 79세로 초정의 묘에 부좌(祔左)하였다.
이상은 초정의 가문에 전하는 묘갈명(墓碣銘)과 밀양박씨족보(密陽朴氏族譜)에서 요약한 내용이다. 이 내용과 관련하여 다시 가계도(家系圖)와 연보(年譜)의 형식을 취하여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家系圖


◎年譜
西紀(간지) 王曆 年齡 官職 記事 
1605(을사) 宣祖38년 1 誕生 
1624(갑자)  仁祖 2년  20 司馬試 합격 
1637(정축)  仁祖15년  33 出仕 
      廣興倉奉事 
      尙衣院直講 
      典牲署主簿 
      戶曹佐郞 
1650(경인)  孝宗 1년  46 永平縣令 
1660(경자)  顯宗 1년  56 刑曹佐郞 
      增廣會試文科壯元 
      禮曹正郞 
      春秋館 記注官 
1664(갑진)  顯宗 5년  60 平安都事 
1671(신해)  顯宗12년  67 成均館 司藝 
1674(갑인)  顯宗15년  70 別世

3. 구성(構成)과 내용(內容)

《초정선생유고(草亭先生遺稿)》는 원래 권(卷) 표시가 되어 있지 않은채 5책(冊)으로만 엮어져 있으며, 서문(序文)이나 발문(跋文)과 같은 객관적인 자료가 부기(附記)되에 있지 않고 그야말로 순전히 문집(文集)의 원문만 나열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또한 문집 형태를 갖추기는 하였으나 절구(絶句)와 율시(律詩) 안에도 5언(五言)과 7언(七言)으로 구분되어 있을 뿐, 만시(輓詩)와 같은 작품들을 따로 분류하지 않고 저작한 시기에 따라 필사(筆寫)되어 있다. 또한 중간에는 편차가 다소 혼동되는 부분도 있다. 이로 볼 때 이 유고(遺稿)는 출간하기 전 단계의 필사본으로 추정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 유고를 대본으로 하여 번역한 이《번역 초정선생유고》에서는 이를 보완하여 책수(冊數)에 따라 분권(分卷)을 함으로써 다소 혼동을 줄이고자 하였다. 이 책의 구성을 표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 초정선생유고 구성표
불분권  구성 내용 
1冊     五言古詩  18題 18首 
五言排律  17題 17首 
五言絶句  19題 21首 
五言律詩  296題 299首 
2冊  七言古詩  46題 46首 
七言排律  7題 7首 
七言絶句  70題 119首 
3冊  七言律詩  254題 309首 
4冊      14篇 
  1篇 
  2篇 
  15篇 
5冊    上疏  2篇 
祭文  16篇 
哀辭  1篇 
  1篇 
  1篇 
  1篇 
致語  1篇 
箋文  5篇 
擬制 2篇 
詔書  1篇 
  2篇 
  2篇 
  2篇 
  1篇 
  1篇 
擬奏  1篇 

초정의 묘갈(墓碣)에는 또“어려서부터 중망(重望)을 업고 마침내 세로(世路)에 나갔으나 배척당한 바 있어 끝내 펼쳐보지 못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초정의 관직생활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색목(色目)의 영향 또한 적지 않았던 것으로 파악된다. 그의 유고에서 이러한 분위기를 감지할 수가 있으며《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서도 그러한 정황이 확인되기도 한다.
초정의 시작품이 지극히 일상적이거나 주변이야기들이 많은 것도 이와 깊은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데, 가족이나 친구들의 만사(輓辭)에서도 그러한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특히 그의 시작품에는 세상을 향한 자조적(自嘲的)이고 회한적(悔恨的)인 내용의 작품들이 적지 않다.

그의 작품 일부를 살펴보기로 한다.

아래 예문은 고시체(古詩體)로 지은 19운(韻) 38구(句)의“음주의 노래[飮酒謌]”의 일부이다.
……………
마냥 취하고 싶은데 깨어 있는 날이 많고  耽酣覺日多
세상을 등한히 여기길 뜬 구름 같이 보네  等世浮雲輕
……………
흠뻑 취한 나 과연 무엇을 위함이던가  酩酊我爲誰
술 좋아한다는 그 이름을 갖고자 해서라네  竊取飮者名

그의 시(詩)작품에 술과 관련한 언급들이 적지 않은데 과연 이러한 작품에서 묘사한 것처럼 마냥 취해서 나날을 보내고 싶어하는 그의 심정은 어디에 원인이 있는 것이며, 그가 이 세상을 떠가는 구름처럼 여기는 허무함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그리고 그가 술을 마셔서 도연명이나 완적과 같은 술의 고수로 이름을 갖고자 하는 의도는 무엇인가? 이는 아마도 현실 상황에 대한 괴리감에서 오는 회한적 요인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다음에서 살펴볼“늙어서 편히 쉴 것을 생각하다[老思休居]”라는 제목의 오언절구(五言絶句)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겠다.


이 세상이 편안타면 얼마나 좋을까 
大塊佚何幸
늘그막엔 가난 그 역시도 병이로세  衰年貧亦病
오직 생각하는 것은 자유론 삶 속에서  惟思但偃仰
편안한 노년을 보내고 싶을 뿐이로다  休居以終境


위의 작품 정도는 나이가 들면 누구나 통상적으로 읊을 수 있는 내용이다. 단순히 신세한탄이나 정말 벼슬길에서 벗어나 공기 맑고 조용한 시골에서 자연친화적인 삶을 갈구하는 것이라면 굳이 초정의 이 작품이 아니라도 새삼스러울 것이 없다. 그러나 문제는 이와 같은 시작품 속에 그의 생애와 관련한 작품 성향이 일관되게 나타난다는 데에 있다.“가을 생각[秋懷]”이라는 제목의 5언율시(五言律詩)의 미련(尾聯)에서도“어느 곳에서 환한 얼굴 한번 지어볼까 했더니[何處好顔色], 강과 산이 찌 푸렸던 얼굴을 펴게 하누나[江山獻解頤]라고 읊고 있으며, 또 다른 작품“가을의 감회[秋感]”라는 제목의 작품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가 가능하다.


사방에서 나는 풀벌레 소리에 온 방이 적막키로  四壁蟲鳴一室幽
밤이 돼도 잘 수 없어 앉아서 가을만 슬퍼하네  夜深無寐坐悲秋
늘그막에 버려져서 속절없이 몸은 늙는다마는  暮年廢置身空老
젊은 날에 솟구치던 꿈이야 아직 식지 않았네  少日飛騰志未休
세상을 버렸으니 은사(隱士) 된 줄 이미 알겠고  世棄已知爲隱士
운수가 기박한데 봉후(封侯) 아님 뉘에게 말할까  數奇誰道不封侯
남아로서 한평생의 계획을 이루고자 하였으나  男兒欲遂平生計
늙어버린 지금 와선 센 머리만 탄식하노라  黃落如今歎皓頭

한 때 크게 펼쳐보고자 했던 포부가 있었지만 이룬 바 없이 이제는 몸만 늙어버린 신세를 탄식하는 시기에 와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세상을 버리다[世棄]’의 원인이 운수가 기박하다[數奇]에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은사(隱士)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는 것이기는 하나 그 누구에게도 말 못할 사나이의 평생 계획이란 것이 결국은 봉후(封侯)와 같은 원대한 꿈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는 현실이 너무도 허무하고 답답한 것이었다. 이를 보면 결국 초정이 마지막으로 역임한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 벼슬은 의도했던 바가 아니었던 듯하다. 이러한 정황과 관련하여 초정에 관한 여러 기록들이“그가 뜻을 펴지 못하고 생을 마쳤다.”는 것으로 기술한 것으로 보여진다. 이 시(詩)의 둘째 수의 미련(尾聯)에서 “재주 없어 버림 받은 줄 내 스스로 아는 터라[自識不才堪杇棄], 태평가나 부르는 걸로 공 삼을까 하노라[太平歌頌擬爲功]”와 같이 읊고 있는 것도 같은 이해의 선상에 있다 하겠다. 다시 그의 작품“탄흥[歎興]”이라는 칠언율시의 두련(頭聯)과 미련(尾聯)을 보기로 한다.


평소에 다섯 수레 되는 책 독파했었건만 
生平讀破五車書
세상과 맞지 않아 같지 않음을 탄식하네  世與心違歎不如
…………………
듣자니 성상께서 현인 찾아 예우한다는데  聞說禮賢勤聖志
풍운의 길이 끊겨 집에 있음이 부끄럽네  風雲路絶㛱端居


오거서(五車書)에 달하는 수많은 서책을 읽어 웅대한 뜻을 실현할 기초를 충분히 다졌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현실과의 맞지 않는 자신을 발견하고 탄식하는 어조로 구성되어 있는 작품이다. 게다가 조정에서 임금은 현인을 찾아 예우하기에 여념이 없다지만 자신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을 때 오는 실망감이 이 작품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이처럼 평소에 품었던 뜻이 커서 쉽게 포기할 수 없는 것이었다면 그 실망감은 더욱 극대화되어 나타날 수밖에 없다. 이런 경우 또 다른 양상으로 나타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다음은“얼어죽은 참새를 탄식하다[凍雀歎]”라는 칠언고시(七言古詩)를 보기로 한다. 흘간산(紇干山) 높은 봉우리에 참새가 둥지를 틀었는데, 새끼가 얼어 죽은 것을 보고 읊은 내용의 일부이다.


참새야 참새야 너 혼자만이 아니란다 
雀兮雀兮非獨爾
그물에 걸려 짝 잃은 봉황새도 너와 같구나  虞羅被嗟孤鳳


급기야는 외톨이가 된 참새를 두고 그물에 걸린 봉황새를 상정하여 그 외로운 참새를 위로하기에 이른다. 여기에는 작자의 감정이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마치 자신이 그물에 걸려 짝을 잃은 봉황새가 된 것처럼 말이다. 다음은“상림의 까마귀[上林烏]”라는 오언고시(五言古詩)의 작품의 일부이다. 상림(上林)은 진(秦)•한(漢) 시대의 궁전 이름이며 궁궐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이 작품도 위의 작품과 같은 의미를 담고 있다.


상림오를 모두가 미워하건만  上林烏皆嗔怒
상림오는 스스로 즐겨 먹노라  上林烏自樂哺
그대는 보지 못하였는가  君不見
전답 사이에서 짹짹거리는 참새를  田間黃雀但啾啾
메추라기가 외려 붕새를 비웃나니  猶能笑南圖
또 보지 못하였는가  又不見
백한의 희기가 비단 같고 눈 같지만  白如錦雪衣
오랫동안 굶고서 강호에만 있는 것을  長飢在江湖
세상에는 백과 흑이 이와 같은데  世間白墨乃如此
허명이 구름 속 달인걸 어디에 쓰랴  何用浮名雲月孤

상림의 까마귀는 주변의 비난을 아랑곳하지 않고 자락(自樂)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메추라기와 붕새의 비유는 장자(莊子)의 글에서 그 모티브를 취한 것인데, 세상의 모든 만물은 그들의 역량대로 가는 것이며 아는 만큼 이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 것이다. 또한 흑(黑)과 백(白)의 실질여부도 불확실한 것이어서 과연 눈에 보이는 백(白)이 실제의 백인지, 흑(黑)으로 비쳐지는 그것이 과연 실제의 흑인지 모를 일이다. 이는 눈앞에 드러나 있는 현상만으로는 참이라는 것을 단정지을 수 없다는 것으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그래서 허명(虛名)이란 구름속에 스쳐지나가는 달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이 작품 역시 현실과 자신과의 맞지 않음을 묘사하고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이는 초정이 67세의 나이로 더 이상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향거(鄕居)를 결심하게 된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또한 이러한 작품성향은 크게 초정이 속해 있었던 집단의 두드러진 양상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으로 본다. 그가 속한 당파인 소북파(小北派)의 성향이 다른 정파(政派)와는 달리 높은 관직이나 정치적 능력을 추구하기보다는 학문(學問)과 문학(文學), 예술(藝術)에서의 명성과 지위를 갖는 데에 더 비중을 두고 있었던 것과 직접적인 연관성이 있을 것으로 본다. 또한 그는 문장가(文章家)의 한 사람이었던 만큼, 문장에 대한 애착과 자신만의 논리를 가지고 있었다. 다음은 초정이 그의 종인(宗人)인 나산(螺山) 박안기(朴安期)의 시문집에 남긴 서(序)의 일부이다.

대저 문장(文章)이란, 의(意)를 주인으로 삼고 기(氣)를 보좌로 삼으며 사(詞)를 호위로 삼는다. 비록 재격(才格)이 고상한 자일지라도 반드시 그 힘을 널리 펴서 곡량(穀梁), 맹자(孟子), 순자(荀子), 등의 서책을 참고로 하여 그 지취(志趣)를 넓히고 그 기상(氣象)을 가다듬으며 그 사어(詞語)를 즐긴 연후에야 옥(玉)을 다듬어서 문양을 이루고 금을 녹여서 광채를 내도록 하듯이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되면 그 문장이 어찌 밝게 빛나거나 넉넉하고 풍요롭지 않겠는가.

초정은 이 글을 통해 천기(天機)와 인교(人巧)의 조화를 강조하면서 위의 인용문에서 말한 것처럼 의(意), 기(氣), 사(詞)가 체계를 이루어야만 훌륭한 문장이 될 수 있다고 피력하였다. 이 작품은 초정이 작고하기 3년 전인 67세 되던 신해년(1671)에 지은 만년(晩年)의 작품으로 그의 문장에 대한 이론을 체계화해서 정립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그의 문장에는 인교(人巧)와 관련하여 노력한 흔적이 두드러지게 나타날
뿐만 아니라 의(意), 기(氣), 사(詞)에 의한 작품 경향도 확인이 가능하다. 특히 그의 작품 중에서 산군전(山君傳)이 전(傳)의 형식을 빌어 호랑이의 덕과 위용을 찬양함으로써 그 풍자적인 요소를 기술한 작품이라면, 양묘설(養猫說)은 그가 실제로 경험한 내용을 사실적으로 기술하여 그의 문장력을 한껏 뽐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양묘설의 일부를 보기로 한다.

아, 까치라는 미물을 기르는 데에 있어서 어찌 그 성품이 유독 인자하다 하겠는가. 그러나 사람이 주는 먹이를 받아먹고 만족스럽지 않아도 물러가고 사람의 훈련을 받아 말을 하지 않아도 알아듣는다. 그는 은혜가 중한 줄을 알고 보답을 하려고 하며 그의 재능을 시험할 때 견지(見知)의 수준을 저버리지 않는다. 걱정하는 바가 깊은 것을 알고 아끼는 바가 무엇인 줄을 알아 찌르거나 쪼아서 해치지 않는다. 또 반드시 주기를 기다려 먹을 뿐, 훔쳐 먹는 행위를 하지 않는다. 그래서 일찍이 도마 위의 음식을 맛보지 않았으며 솥에 있는 음식을 훔쳐 먹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오로지 나물국에 거친 밥으로 배를 채울 뿐이었다.…… 까치가 이채로운 것에 대하여 한갓 그것을 아름답게만 보고 그 행적을 기록하지 않는 것은 안 될 일이어서 설(說)을 지어서 후세에 전하고자 하는 바이다.

이 글의 전체 내용은 작가가 집안에 쥐가 득실대지만 어찌할 방도를 찾지 못하다가 어느날 까치가 한 마리 날아와서 먹이를 주어 훈련을 시켰더니, 은혜에 보답하려는 것처럼 살아 있는 쥐를 9마리나 잡아왔고 집에 기르던 닭과도 다투지 않고 잘 지낸 것이 자신의 감화를 입은 것이 아닌가라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이는 그 내용도 내용이려니와 문장의 사실적인 표현법과 기술(記述)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으로 보인다. 그가 위의 문장의 이론에서 추구하고 있는 것처럼 그가 남긴 대부분의 글들이 이러한 이론적 체계하에서 창작되었다는 점을 재차 인식할 필요가 있겠다.

4. 결어(結語)

초정(草亭) 박수현(朴守玄)이 소암(疎菴) 임숙영(任叔英)과 사승(師承)관계에 있음을 위에서 이미 밝혔거니와  김득신(金得臣)의《종남총지(終南叢誌)》에는 또“오언 배율(五言排律) 700운(韻)을 지어 이안눌(李安訥)에게 보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 노두(老杜)와 같은 대단한 솜씨로도 100운 밖에 짓지 못하였고 후세의 시인(詩人) 역시 이러한 대작(大作)은 없다. 더구나 시의 광박(廣博)하고 기벽(奇癖)함이 참으로
천하의 걸작으로 평가받을 만하다.”라고 전하고 있다. 초정의 유고에도 배율(排律)의 시작품이 30여 편이나 되며, 그 중에는 50운에 달하는 효종대왕(孝宗大王)의 만사(輓辭)라든가 20운, 30운에 달하는 작품들도 꽤 많은 편인데, 이 역시도 그들의 영향관계에 있었던 것으로 보고자 한다. 또한 작품 경향을 놓고 볼 때도 그의 문장이론에서 본 것처럼 천기(天機)와 인교(人巧)를 중시하는 특징이 그의 유고(遺稿) 전반에 나타나 있는 것을 확인할 수가 있다.
특히 성리학적(性理學的)인 언급은 전혀 보이지 않고 오히려 사찰(寺刹)이나 불교(佛敎)에 관한 언급들이 보이는 것도 이들이 지니는 실용적(實用的)인 글쓰기의 한 특징이라 할 수 있겠다. 그밖에 선(仙) 또는 도교(道敎)와 관련된 문자가 이따금씩 보이기도 하는데, 이는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의 현실세계에 대한 괴리감에서 표출된 한 양상으로 파악할 수 있겠다.

【參考文獻】
韓國文集叢刊
密陽朴氏族譜
成均館司藝 朴公 草亭先生 墓碣銘
姜景勳,『重菴姜彛天文學硏究』동대박사학위논문, 2001.

2010년 5월 10일
趙東永(成均館大學校 文學博士)



▣인물 연구


詩만큼은 조선 1인자. 수명정 세번째 주인, 박수현은 부친의 누명으로 출사길이 막혔다.


朴守玄[1605(宣祖 38)~1674(顯宗 15) 향 70歲]의 字는 太玄(태현), 號는 草亭(초정)이며 문집 ≪草亭先生遺稿≫(5책)가 전해진다. 문집의 첫 시가 <經亂離>[난리를 겪고서]이다. 병자호란으로 도성은 무법천지가 되고 충청도 보령까지 老母를 모시고 피난을 갔다 다시 돌아온 사정을 서사적인 시로 담아낸 것이다. 그의 시작품은 세상을 향한 자조적이고 회환적인 내용이 많다.

  
秋懷 가을생각    -오언율시
……<중략>………
何處好顔色 어느 곳에서 환한 얼굴 한번 지어볼까 했더니 
江山獻解 강과 산이 찌푸렸던 얼굴을 펴게 하누나
秋感 가을의 감회    -칠언율시
……<중략>………
自識不才堪 재주 없어 버림 받은 줄 내 스스로 아는 터라 
太平歌頌擬爲功 태평가나 부르는 걸로 공 삼을까 하노라
歎興 탄식하는 감흥   -칠언율시
生平讀破五車書 평소에 다섯 수레 되는 책 독파했었건만 
世與心違歎不如 세상과 심이 어긋나 같지 않음을 탄식하네 
……<중략>………
聞說禮賢勤聖志 듣자니 성상께서 현인 찾아 예우한다는데 
風雲路絶㛱端居 풍운의 길이 끊겨 집에 있음이 부끄럽네

20세 司馬試에 합격하며 五車書(오거서)에 달하는 서책을 읽어 웅대한 뜻을 펼 기초를 다졌건만, 막상 현실은 자신을 멸시했다. 부친의 누명이 대를 이은 것이다. 청나라 사신이 도성에 들어오면 ‘박참판[박로] 아들’을 보고 싶다 찾아오니 참으로 불편한 손님이었다. 만나면 아첨한다 하고, 물리치면 어명을 무시한다 음해를 받는 처지였다. 하지만 청나라 사신은 부친 소식을 들을 수 있는 통신원이기도 했다. 조정에서는 청사신 영접도감청을 설치하여 그에게 낭청의 직임을 부여하여 일임했을 정도다. 문제가 되면 책임을 전가하려 함일지도 모른다. ≪仁祖癸未淸使迎接都監應辦色儀軌(인조계미청사영접도감응판색의궤)≫(1643)에 날짜, 절차, 연회 및 예물 품목까지 자세히 기록되어 전한다.

  
≪仁祖癸未淸使迎接都監應辦色儀軌≫(1643) 郎廳 朴守玄(39세)

시간이 흘러 예송논쟁으로 말 많았던 효종이 승하했다. 그리고 효종의 신주를 종묘에 모시는 일에 박수현도 참여했다. 1차 윤휴와 송시열, 2차 윤선도와 송시열이 논쟁할 때 그는 현장 실무자였다. ≪孝宗祔廟都監都廳儀軌≫(1661)에 그가 낭청으로 직임을 맡아 행한 것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반차도에 그림도 있어 영정이 없는 후손들에겐 반가운 책이다. 돌이켜 보면 예송 논쟁이란, 남인과 서인이 거기서 거기인 논쟁거리로 민생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에 목숨 걸고 싸운 한심한 정치 싸움이다. 




≪孝宗祔廟都監都廳儀軌≫(1661) 郎廳 朴守玄(57세), 監造官 朴純(32세)

이제 새로운 임금, 현종이 등극했다. 경축하는 과거시험이 열렸다. 과제는 ‘詩’였다. 그의 전공과목이다. ‘增廣 覆試 壯元 朴守玄’! 기쁨도 잠시. 그의 대책문에 政敵이 시비를 거는 상소를 올린다. 그가 인용한 고사 2건이 금일의 조정을 풍자했다는 것이다. 억울한 일이었지만 오히려 이런 논쟁거리가 그의 과문이 널리 퍼져 읽혀지게 되었다. 과거모음집 중 하나인 ≪執策≫[미국 버클리대 소장]에 그 전문이 실려 전해지고 있다.

  
≪執策≫ 三上魁 박수현(56세) 庚子(1660) 增廣試 會試 壯元 *策問 : <問詩>


그의 시들 중에는 술과 관련된 말이 많다. 酒, 酣, 酩, 酊, 醉, 醺, 醒, 醪, 酸…

飮酒謌 음주의 노래   -오언고시
……<중략>………
耽酣覺日多 마냥 취하고 싶은데 깨어 있는 날이 많고 
等世浮雲輕 세상을 등한히 여기길 뜬 구름 같이 보네 
……<중략>………
酩酊我爲誰 흠뻑 취한 나 과연 무엇을 위함이던가 
竊取飮者名 술 좋아한다는 그 이름을 갖고자 해서라네 

그가 세상을 등진 것인지, 세상이 그를 버린 것인지 되묻는 시가 그의 시집에 많이 나온다.

凍雀歎 얼어죽은 참새를 탄식하다  -칠언고시
……<중략>………
雀兮雀兮非獨爾 참새야 참새야 너 혼자만이 아니란다 
虞羅被嗟孤鳳 그물에 걸려 짝 잃은 봉황새도 너와 같구나 
……<중략>………
박수현은 소북 칠학사들의 후손들과 모임을 가져 소북들의 결속을 다졌다. 아울러 소북의 ‘八文章’으로 불리우던 벗들과 함께 ≪北譜≫[28姓 59家]의 발간을 주도하며 가문 간의 유대를 이어갔다.

소북 팔문장은 草亭 朴守玄(박수현), 南谷 任翰伯(임한백), 滄溟 南翧(남선), 雪峯 姜柏年(강백년), 竹堂 申濡(신유), 庥菴 李休徵(이휴징), 沙川 沈𪗆(심제), 晩洲 鄭昌胄(정창주)가 그들이다. 이들은 대를 거듭하며 세교를 하고 혼인을 맺어가며 당쟁의 풍파를 이겨 나갔다.
그들의 사귐에 대해 강백년의 아들 白閣 姜鋧(강현)이 정창주의 ≪晩洲集(만주집)≫ 서문에 자세히 적어 놓았다.

 
≪晩洲集≫


晩洲先生集序 [姜鋧]
...公少與吾先君文貞公及南滄溟,申竹堂,朴草亭,任南谷,沈沙川,李庥庵。爲詩酒莫逆之交。一世欽艶焉。…

공[정창주]은 어려서 나의 선친인 문정공[강백년]과 창명 남훤, 죽당 신유, 초정 박수현, 남곡 임한백, 사천 심제, 휴암 이휴징에 이르기까지 시와 술로 막역한 교류를 했다. 일세에 흠모하여 부러움이 되었다….

이식의 門人으로 막역한 친구였던 明谷 具崟(구음)의 家狀에도 그의 시에 대한 명성이 기록되어 있다.

家狀[具鶴祖]
先生諱崟。字次山。號明谷。...居常簡出入。不妄交遊。如鄭侍郞斗卿,南尙書龍翼,閔相國煕,睦參議兼善,李都憲夏鎭,權侍郞大載,許承宣顗,朴司藝守玄,宋諫議挺濂,金學士文夏,李吉州球,鄭鍾城華齊。皆以文學風節相砥礪。…

선생의 휘는 음이요 자는 차산, 호는 명곡이다.…거처하면서 항상 출입을 간소하였으나 시랑 정두경, 상서 남용익, 상국 민희, 참의 목겸선, 도헌 이하진, 시랑 권대재, 승선 허의, 사예 박수현, 간의 송정렴, 학사 김문하, 길주 이구, 종성 정화제 같은 분들과는 교유를 잊지 않았다. 모두 文學과 風節로써 서로 갈고 닦았다….
≪明谷集≫


‘草亭’, 초가 정자. 거칠지만 꾸밈이 없는 그가 취한 號이다. 할아버지, 아버지의 수명정은 그에게 사치였나 보다.

 

題水明亭 수명정에 쓰다    -칠언고시
漢水渺渺入胸 넓고 넓은 한강물이 가슴에 들어와
藍如帶分如襟 푸른 물은 띠와 같고 나뉨은 옷깃 같구나
其間三浦水所都 그 사이 삼포는 물이 모여드는 곳이니
琉璃不受塵埃侵 유리처럼 깨끗해 티끌 하나 없네
繚以晴沙照白雪 둘러싸인 모래는 하얀 눈 같고
列以長島堆靑林 벌려 있는 긴 섬에는 푸른 숲이 쌓였네
干霄木末置曲欄 하늘 높이 솟은 나무 끝은 난간이 되고
金璧流輝凝翠岑 금벽에 빛난 빛은 푸른 봉우리에 엉겼네
橫壓朱欄耀千甍 붉은 난간은 용마루를 비껴 비추고
俯瞰滄浪跨百尋 머리 굽혀 푸른 물결 비추어 보니 백 길 깊네
連雲大㠶繞賈舶 이어지는 구름은 큰 배를 에워싸고
嚮風落日聞村砧 해질 무렵 다듬이소리 멀리 들리네
仙遊何處晩送 신선놀이 어느 곳에서나 피리 소리 좋고
案對君山抽玉簪 君山을 마주대하니 옥비녀를 뽑은 듯
蚕頭遙指戴鰲背 蠶頭峯은 멀리 자라 등에 실려 있고
錢壁磨空橫碣沉 전벽은 허공에 갈리어 빗돌에 잠겨 있네
粟米流脂稻米白 곡식은 기름기가 흐르고 쌀은 백옥 같은데
海陵露峙迷江潯 바다 언덕에 드러난 재에는 강물이 희미하네
江湖挽我造勝境 강호가 나를 만류하여 승경을 자랑하니
麗日畫閣來登臨 좋은 날 화각에 와서 다시 오르리라
雲巒掃黛若明眸 구름 봉우리에 검은 빛 쓸어내니 더욱 밝고
玉鏡涵如洗心 옥거울이 깨끗하니 마음이 씻긴 것 같구나
流波泛泛落花忙 흐르는 물결에 떨어진 꽃 잊혀지고
隔岸依依垂柳森 막힌 언덕에 늘어진 버들가지 하늘거리네
巖排屋角語山鳥 바위머리 모퉁이에서 산새 지저귀고
潮退漁梁喧水禽 조수가 물러가니 어량에는 물새들 떠들어대네
還看鳳巢壽日月 돌아오는 길에 봉황새 집 보니 오랜 세월 지냈고
斗覺駒隙催光 빠른 세월 재촉함을 갑자기 깨달았네
吾童再 어릴 적 놀던 생각 간절하고
惠子㨿梧昭 惠子는 오동나무에 기대어 거문고 생각하였네
從知數椽作思亭 이 수명정 세운 뜻을 알만하니
不獨三槐前世欽 전세의 三槐堂만이 흠앙하는 것 아니라오
須將封植戒勿剪 나무 심을 때는 가지 자르지 말라고 경계하건만
幸保丹存如今 다행히 단청색이 지금까지 보존되었네
風樹餘生感何極 風樹之嘆을 감히 어찌 다하리
酒澆胷次如䋲斟 술잔 거듭거듭 마시네
堂堂駟馬復充閭 말이 끄는 수레 타고 오신 손님 뜰에 가득하니
哉斯言聊假吟 이 시를 조용히 읊노니 더욱 힘쓸지어다
把盃商略眼前事 술잔 들고 눈앞의 일 헤아려 보니
鷗鷺影內烟波深 갈매기와 해오리 연기 노을 속에 사라지네
≪草亭先生遺稿≫

실록을 보면 ‘다루기 힘든 사람’, ‘주색에 빠진 사람’ 등으로 政敵의 장계 속에 등장한다. 모진 국문에서 풀려나 돌아와 초가집 하나를 별도로 지었다. ‘坐忘堂’. 앉아 잊고 지내는 집. ‘좌망’이란《莊子》大宗師(대종사)에 나오는 말로 나와 사물을 모두 잊고 道와 合一하는 경지에 이르는 것을 뜻한다. ‘좌망당’에 대한 시와 기문이 여러 편 그의 문집에 실려 있다.

坐忘堂偶題   좌망당에서 우연히 짓다
居在洛城里   사는 곳은 도성의 마을인데
門無車馬賓   문 앞에는 수레 타고 오는 손님 없네.
鳥聲矜白日   새는 대낮부터 자랑스레 지저귀니
花事務靑春   꽃구경은 청춘 시절에 힘써야 하네.
藥竈頻添火   약탕기를 자주 끓이니
瓠樽積聚塵   술 마시는 표주박에 먼지가 끼네.
空事山簡興   공연히 山簡의 취흥이 나면
倒着接羅巾   接羅巾(접라건)을 거꾸로 쓴다네
≪草亭先生遺稿≫

좌망당의 주인은 오거서[다섯 수레]의 서적이 친구요, 찾아오는 손님이었다. 늙으막에 비석에 넣을 관직을 얻었으니, ‘成均館 司藝’가 그것이다. ‘성균관 예능[거문고] 선생’이다. 56세에 ‘詩’로 장원하여 ‘琴’ 선생으로 마치다. 그의 비석도 간초하게 ‘短碣’로 선영에 모셔져 있다.
그와 닮은꼴 인사가 한 분 있다. 친구 강백년의 손자 豹菴 姜世晃(강세황)이다. 같은 소북인으로서 젊어서 과거길이 막혔다가 늙으막 66세에 장원 급제한 강세황은 박수현과 너무도 닮았다. 표암은 전공이 ‘畫’라면 초정은 ‘詩와 琴’이였다. 당대의 일인자였다.

 
<姜世晃自筆本>(1782) 보물 590-1호

彼何人斯。鬚眉晧白。頂烏帽。披野服。於以見心山林而名朝籍。胸藏二酉。筆搖五嶽。人那得知。我自爲樂。翁年七十。翁號露竹。其眞自寫。其贊自作。歲在玄武攝提格。

저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수염과 눈썹이 하얗구나. 烏紗帽(오사모)를 쓰고 야복을 걸쳤으니 마음은 산림에 있으면서 조정에 이름이 올랐음을 알겠다. 가슴에는 만 권의 책을 간직하였고, 필력은 오악을 흔드니 세상 사람이야 어찌 알리. 나 혼자 즐기노라. 노인의 나이 일흔이요, 호는 露竹이라. 초상을 스스로 그리고, 화찬도 손수 쓰네. 때는 玄黓攝提格(壬寅, 1782)이다.

박수현의 운명은 豹菴(표암) 姜世晃(강세황)과 참으로 닮았다. 강세황은 박수현의 친구 雪峯(설봉) 姜栢年(강백년)의 손자이다. 두 집안은 小北(소북)을 대표하는 가문으로 世交를 이어갔다. 강백년의 손자 강세황의 누이가 박수현의 증손자 박징(朴澂)에게 시집을 오며 사돈관계로 이어졌다. 밀양박씨와 진주강씨는 혼인을 맺어가며 탄탄한 세교를 이어갔다. 박수현의 아들 박신은 스승이기도 했던 강백년의 문집 ≪雪峯遺稿≫를 忠淸監司 시절 공주 감영에서 간행하고, 강세황의 부친인 강현은 박신과 사돈 관계를 맺고 박신의 아들인 박윤동에게 가르침을 주고 아울러 비문을 써주는 관계로 친밀이 이어갔다. 黨色(당색)에서 배척받는 설움을 진주강씨는 '그림'으로, 밀양박씨는 '거문고'로 당대의 일가를 이뤄갔던 것이다. 지금도 그 후손가에서 밀양박씨 문헌들이 계속 발견되고 있다.

누명의 굴레를 끝내 벗지 못한 박수현은 부친 박로의 비석을 세우지 못하고 피눈물로 적은 行狀을 남겨 아들에게 후일을 맡긴다. 네가 집안을 일으켜 세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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