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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ipziger Buchmesse > LBM 2017 전시도서 > 대호선생유고(大瓠先生遺稿)[박로]

 
대호선생유고(大瓠先生遺稿)[박로]
상품명 : 대호선생유고(大瓠先生遺稿)[박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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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책 2017 라이프치히 도서전
     
 

家文을 찾아서 : 밀양박씨편①
『≪韓琴新譜≫와 마포 水明亭 이야기』관련문헌

▣原本 書誌

-도서명 : 大瓠先生遺稿
-表題 : 家傳文集
-편저자 :  大瓠 朴𥶇[宣祖 17(1584)~ 仁祖 21(1643)] 著
-판사항 :  筆寫本 
-발행사항 : 未詳
-형태사항 : 單行本 (20.6cm x 32.4cm) 
-소장처 : 東國大學校 國語國文科 姜景勳 교수, 朴亨遠

*본 도서는 수명정 2대 중축자 大瓠(대호) 朴𥶇(박로)[1584~1643] 관련 기록문헌이다.

▣저자 소개 
 
-姓名 : 朴𥶇(박로)
-字 : 魯直
-號 : 大瓠, 復初軒
-諡 : 文獻 *紀年便攷, 文譜, 陰譜 등 다수의 榜目 책에 기록되어 있음
-本貫 : 密陽
-曾祖 : 朴德老[활인서별제], 祖 : 朴栗[사헌부장령], 父 : 朴彛叙[이조참판]
-母 : 廣州李氏[李士栗의 女], 妻 安東權氏[權曄의 女]
-生沒年 : 宣祖 17(1584)~ 仁祖 21(1643) 享 60歲
-光海君 1년(1609) 己酉 增廣試 覆試 2等 及第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스승, 인조(仁祖)의 대청외교 사신. 澤堂 이식(李植)과 32년 막역지우.


1584(선조 17)∼1643(인조 2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로직(魯直), 호는 대호(大瓠). 활인서 별제 박덕로(朴德老)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사헌부 장령 박률(朴栗)이고, 아버지는 이조참판 박이서(朴彛叙)이며, 어머니는 동고(東皐) 이준경(李浚慶)과 같은 집안인 이사율(李士栗)의 딸이다.

1609년(광해군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 보임된 뒤 홍문관(弘文館) 수찬(修撰)‧교리(校理)를 거쳐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성균관 직강(成均館直講)을 역임하였다. 그때 이조 정랑(吏曹正郞)에 추천되었으나 이이첨(李爾瞻) 일파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광해군대에 요직인 이조정랑 진출이 대북인에 의해 거부되었으며, 그들에 맞서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비반대 운동을 주도하여 관인 명단에서 삭출되었다.
1618년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가 되었고, 이듬해 안동 부사(安東府使)로 나갔다가 곧 사퇴하였다.
1620년 의정부 검상(議政府檢詳)이 되고, 청(淸)나라 병사가 요동(遼東)을 점령하여 명(明)나라에 갔던 사신들이 돌아오지 못하자, 수리부사(修理赴使)에 임명되어 해로의 항해를 독치(督治)하게 되었다. 일행이 선천(宣川)에 이르렀을 때 진위사(陳慰使)로 명나라에 갔던 그의 아버지 참판 박이서가 배의 전복으로 죽었다는 기별을 듣고 초혼(招魂)하여 의장(衣裝)을 거두어 돌아왔다.
1623년(인조 1) 사섬시 부정(司贍寺副正)에 제수되었으나 사퇴하였다. 반정 뒤에도 정란을 주도한 서인들로부터 광해군을 동정하였다는 음해로 소외되었다.
1624년 이괄(李适)의 난에 왕이 공주(公州)로 피난할 때 산직(散職)으로 호종(扈從)하였고, 가을에 기용되어 전적(典籍)을 거쳐 장연 부사(長淵府使)가 되었다. 당시 감사(監司)의 모함으로 옥에 들어갔으나 무죄임이 밝혀져 풀려났고, 1626년 무고(誣告)로 또 옥에 갇혔으나 곧 풀려났다.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왕이 강화도(江華島)로 피란하자 순검사 종사관(巡檢使從事官)으로 대가(大駕)를 호종하였고, 김류(金瑬)의 신임을 얻어 장악원 정(掌樂院正)이 되었다. 환도(還都) 후 신천 군수(信川郡守)가 되어 황해 감사(黃海監司)와 함께 구월산성(九月山城)을 수축(修築)하였고 치적(治績)이 있었다.
1631년 무인(武人) 박난영(朴蘭英) 등이 여러 차례 외교 실수를 하고 후금(後金)이 변방을 공략하는 등 조선을 괴롭히자, 6월~12월까지 회답사(回答使)[1차 使行]로 심양(瀋陽)에 다녀왔고, 그 공으로 동지 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되었다가 한성 우윤(漢城右尹)으로 옮겼다.
1632년 판결사(判決事)를 제배하여 청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당상(堂上)으로 차출[胡差 接待 句管堂上]되었다가 곧 파주목사(坡州牧使)를 제수하였다.
1633년 춘신사(春信使)[2차 使行]로 심양에 다녀와서 형조참판(刑曹參判)에 부총관(副摠管)과 사역원제조(司譯院提調)를 겸하였다.
1635년 추신사(秋信使)[3차 使行]로 심양에 다녀오고, 1636년 조정(朝廷)의 의론이 척화(斥和)로 기울어져 청나라 사신이 성내어 돌아갔을 때 반드시 화가 일어날 것이라 하며 전비(戰備)를 수습해야 된다고 역설하였다.
1636년 겨울에 병자호란(丙子胡亂)으로 청나라 병사들이 침입하자, 추신사(秋信使)[4차 使行]로 급파되어 청군의 진격을 늦추기 위해 적진(敵陣)에 들어가서 강화(講和)를 주선하고자 죽음을 무릅쓰고 적장(敵將)에게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힐책(詰責)하였다. 특히 남한산성에서 다시 청군의 진영에 들어가 항의하고 성 안으로 들어가 복명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억류되자 40일간 눈 속에서 농성을 하는 등 많은 고초를 겪었으나 반청의 분위기 속에서 노고와 역량을 인정받지 못하였다.
1637년 1월 30일 인조의 항복과 함께 소현세자(昭顯世子)가 볼모로 심양에 갈 때 세자 빈객(世子賓客)으로 수행했다. 세자를 따라 청에 있을 때 그곳으로 끌려간 삼학사(三學士)와 정뇌경(鄭雷卿)의 구명을 위해 진력하였으나, 구하지 못하고 그들의 죽음을 목도하였다.
1639년 12월 신병(身病)으로 3년 만에 귀국한 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되었다.
1640년 좌승지(左承旨)‧문안사(問安使)‧도승지(都承旨)‧경기 감사(京畿監司)를 지냈다.
1641년 접반사(接伴使)‧형조 참판 겸 동지의금부사(刑曹叅判兼同知義禁府事)가 되었다.
1642년 춘추관(春秋館) 실록청(實錄廳) 유사당상(有司堂上)‧식년문과시관(式年文科試官)‧병조 참판(兵曹叅判)‧도승지(都承旨)를 지냈다.

▣영인본 견본


<비단 표지>

▲마포 수명정(水明亭)의 2대 승계자 박로(朴𥶇)의 문집



심양에서 수명정을 그리며 시강원후배들에게 건넨 시.

▣ 해제 : 대호선생유고(大瓠先生遺稿) 해제(解題)

본 유고(遺稿)는 병자호란 이후 대청외교(對淸外交)에 진력(盡力)한 대호(大瓠) 박로(朴𥶇) 공의 유시(遺詩) 모음이다. 본래 집안에 전해오던 초고(草稿)를 이번 국역(國譯)을 계기로 ≪대호선생유고(大瓠先生遺稿)≫로 고쳐 간행하게 된 것이다.
내용은 단순히 시(詩)만 모은 미정본(未定本)으로 구성을 보면 오언절구(五言絶句), 칠언절구(七言絶句), 오언율시(五言律詩), 칠언율시(七言律詩), 오언배율(五言排律), 오언고시(五言古詩) 약간 수씩으로 되어 있는데 대부분 심양관소(瀋陽館所)에서 세자 및 대군(大君), 동료들과 고국을 그리워하며 주고 받은 작품이 주류를 이룬다.
가첩(家牒)에 의하면 집안에 공의 문집으로 ≪복초헌집(復初軒集)≫ 이 따로 전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최근 ≪술선록(述先錄)≫에서 ≪복초집(復初集)≫ 64章을 필사한 것이 발견되었다.  본 유고집에 없는 시가 수십편이 들어 있어 별본의 문집으로 정리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1. 생애와 관력(官歷)


공의 휘는 로(𥶇), 자(字)는 로직(魯直), 호(號) 대호(大瓠) 또는 복초헌(復初軒)이며 밀양인(密陽人)이다. 원조(遠祖) 윤문(允文)은 고려 대광(大匡) 밀천군(密川君)이요 증조 덕로(德魯)는 활인서 별제(活人署別提)요, 조부 률(栗)은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 지제교(知製敎)요, 아버지는 이조 참판(吏曹參判) 이서(彛叙)이며 어머니 정부인(貞夫人) 광주이씨(廣州李氏)는 판서 윤경(潤慶)의 손녀이며 군수(郡守) 사율(士栗)의 딸인데 선조(宣祖) 17년 갑신(甲申 1584) 6월 27일 서울 청파(靑坡, 숭례문 밖 桃楮洞 맞은편) 옛집에서 태어났다.
1609년(己酉)에 증광시(增廣試) 문과(文科) 2인(人)으로 합격하여 승문원(承文院)에 분관(分館)되면서부터 벼슬을 시작하여 이후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 병조정랑(兵曹正卽), 홍문관(弘文館)의 교리(校理)와 수찬(修撰),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등을 거쳐 안동부사(安東府使)로 나갔으나 곧 돌아오고 말았다.
경신년(광해군 12, 1620년)에 태창 황제(太昌皇帝: 명나라 光宗)가 승하하여 아버지 참판공이 진위사(陳慰使)로 연경(燕京)에 가게 되었는데 육로가 막혀 뱃길로 돌아오다 바다에서 파선되어 초혼(招魂)하여 3년을 곡읍(哭泣)하며 미음만 들었고 종신토록 물고기는 먹지 않았다.
계해년(인조 1, 1623년) 사섬시 부정(司贍寺副正), 갑자년(인조 2, 1624년) 산직(散職)으로 임금을 남쪽으로 수행하고, 가을에 전적(典籍)으로 기용되었다가 장연부사를 제수하였다.
정묘년(인조 5, 1627년)에 청나라가 깊숙이 쳐들어와 임금이 강화(江華)로 파천하게 되자 순검사(巡檢使)의 종사(從事)가 되어 조운(漕運)을 감독하여 기일 내에 모두 거둬들이니 김류(金瑬)가 기특하게 여겨 막부로 천거하여 장악원정에 제수되었다가 신천 군수(信川郡守)로 나갔다.
경오년(인조 8, 1630년) 통정(通政) 품계에 올라 판결사(判決事)를 제수되었고, 곧 뒤에 파주(坡州)를 맡게 되었으나 곧 인조가 특별히 구직(舊職)으로 다시 소환하였다.
이때 이미 청(淸)과 화친하여 박난영(朴蘭英)으로 하여금 통빙(通聘)토록 하였는데 여러 번 사명(使命)을 다하지 못하여 다른 사람으로 바꾸려 했으나 모두 그 일을 맡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피하니 부득이 공을 보내게 되었다. 공은 조금도 꺼리는 기색을 보이지 않고, 위험을 무릅쓰며 싸움터를 뚫고 심양(瀋陽)에 이르니, 청나라 임금이 경의를 표하고 전처럼 오만하지 않았다. 귀국하여 가선(嘉善) 품계로 올려 동지중추부사를 제수하고 한성부 우윤 겸금화제조(漢城府右尹兼禁火提調)로 전보시켰다.
계유년(인조 11, 1633년)에는 다시 심양(瀋陽)에 사신으로 갔으며, 돌아와서는 형조참판 겸 부총관(刑曹參判兼副總管), 사역제조(司譯提調)를 배수하였다.
갑술년(인조 12, 1634년)에는 강원 감사(江原監司)를 배수하였으나 배척하는 자가 있어 상소하여 해직을 빌었다.
을해년(인조 13, 1635년)에는 다시 심양에 사신으로 갔다.
병자년(인조 14, 1636년)에는 조정 의논이 척화(斥和)로 돌아서 청나라 사신이 노하여 돌아가니, 공이 홀로 상소하여 말하기를“지금 척화론이 비록 우세하지만 전쟁에서 싸워 지킬 수 있는 장비가 아주 허술하니 반드시 화가 미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해 겨울에 과연 청병이 대거 침입하여 상황이 급박해지자 조정에서는 공을 보내어 청나라 병사들의 진군을 늦추어 보고자 하였다. 공은 분연히 죽기를 각오하고 적진으로 갔다가 구금되어 임금이 출성(出城)한 후에야 풀려났다.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청나라에 인질로 가게 되자, 공이 평소부터 청나라의 실정을 잘 안다 하여 공과 함께 갈 것을 바랬다. 공은 집안일을 부탁할 겨를도 없이 세자빈객(世子賓客)이 되어 따라 나섰다.
심양 관소(館所)에 3년 동안 머물면서 두 나라 사이의 외교를 전담하여 주선하고 조정하면서 피를 토하는 병을 얻어 조정에서 비로소 교체를 허락하여 귀국했다.
귀국 후 병을 조리하는 동안 승정원의 좌승지와 도승지, 경기 감사, 형조참판, 사옹원 제조, 병조참판을 역임하였는데, 병이 더 심해져 계미년(인조 21, 1643년) 6월 22일에 도저(桃渚)의 옛집에서 66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니 조정에서 부제(賻祭)하고, 세자는 사람을 보내 제(祭)를 올렸다.
부인 안동 권씨(安東權氏)와 사이에 수소(守素), 수초(守初), 수현(守玄), 수고(守古), 수화(守和), 수허(守虛), 수충(守忠) 일곱 아들과 딸 둘을 두었다.
염헌(恬軒) 임상원(任相元)은 공의 신도비명(神道碑銘)에서 이르기를
“공은 사특한 논의를 억제하고 힘껏 정론(正論)을 주장해서 간사한 자들의 모의를 꺾었다. 창칼을 무릅쓰고 임금의 명령을 전함으로써 적인(敵人)의 공경을 받았으며 위태로움을 보고 죽음에 이르더라도 돌아보지 않았으니 충신(忠信)함이 없었다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세상에서 고담대언(高談大言)을 하면서 스스로 고상한 체하는 사람들은 눈으로 심양의 청인들의 동정은 보지도 못하였고 또 그들과 교접하는 것마저 치욕으로 몰아붙이고 있으나 무릇 나라는 약한데 강한 자와 이웃해 있으면 그들과 화목하면 편안하고 틈이 생기면 위태로운 것이니 그들과 왕래하며 수호하여 신맹(信盟)을 두터이 하는 것이 어찌 공(功)이 아니겠는가? 또 이는 임금의 명령이었으니 어찌 사양하겠는가? 혹자는 공이 정뇌경(鄭雷卿)을 구제하지 않았다 하여 공을 허물하고 있으나 공은 포악한 자는 교화시키기가 어려움을 알고 있었고 또 참소하는 사람들 틈에서 혹시 세자가 다치지나 않을까 염려하여 그리된 것이지 어떻게 그의 죽음을 슬퍼하
지 않아서 힘써 구제하지 않았을 리가 있었겠는가? 집의(執義) 윤선거(尹宣擧)가 일찍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내가 청병(淸兵) 군중에서 박모(朴某)를 보았는데 몸이 새끼줄로 묶이고 의복은 너절한 채 눈 속에서 있었으나 기상이 늠연자약(凜然自若)하였다. 청인들이 그를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이 사람은 예(禮)를 내세워 저항하면서고 굴복하지 않아서 이렇게 된 것이다」라고 하였다. 나는 그때 마음으로 깊이 감복하였기에 한 번도 덩달아 그를 흠잡지 않았다’라는 말로 공의 평생을 요약하였다.”


2. 정뇌경(鄭雷卿) 사건의 전말


조선시대의 국난(國難)으로는 두말할 것도 없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두 외침(外侵) 사건을 들 수 있는데 임진란은 삼국시대 이래 왜구(倭寇)의 잦은 침입으로 평소 예비(豫備)하느라 교린(交隣)을 통해 기미(羈縻)하고 회유(懷柔)해 오던 터라 그리 갑작스러울 것도 없었다. 그러나 병자호란은 이와는 달리 명(明)나라와 청(淸)나라의 교체기를 당해 중원(中原)에 이는 풍운(風雲)의 정세에 어두웠을 뿐만 아니라 명나라에 대한 의리(義理)를 내세운 명분론 때문에 갑작스레 당한 참혹한 변란이었다.
거기다가 평소 오랑캐로 치부하여 도외시하던 청(淸)나라에게 임금이 무릎을 꿇고 항복한 굴욕감, 세자가 인질로 잡혀간 치욕감은 오래오래 씻을 수 없는 것이었다. 국론은 주화(主和) ․척화(斥和)로 갈라져서 척화를 주장하던 삼학사(三學士)가 끌려가 처형당하고, 곳곳에서 부녀자들이 적군에게 능욕을 당하고, 포로로 끌려가며 울부짖는 수많은 백성들의 비명소리를 못들은 체해야 했던 무능한 조정이요 임금이었다.
공은 이런 미증유(未曾有)의 국난 시기에 전후 여러 차례 청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두 나라 사이의 현안 문제 해결에 앞장섰다. 명분을 앞세운 대신들은 청나라와 교섭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아무도 가려 하지 않았으나 공은 임금의 명이 있으면 조금도 사양하지 않고 가서 사명(使命)을 잘 수행하였다. 그 결과 인조(仁祖) 임금의 신임은 물론 청나라 사람들도 공을 어렵게 여기고 존중해서 나중에는 두 나라 사이의 조정자 역할을 전담하다시피 하게 되었다.
소현세자가 심양에 인질로 가면서 이처럼 청나라 사정에 정통한 공을 버려둘 리 없었다. 빈객(賓客) 신분으로 세자를 모시고 심양 관소(館所)에서 여러 종관(從官)들과 함께 3년 남짓 있는 동안 교대할 임기가 되었는데도 교대하지 못하고 두 나라 사이의 어려운 분쟁과 현안 처리와 조정에 노심초사하다 각혈(咯血)화는 병을 얻고서야 귀국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심양 관소에 있을 때 정뇌경(鄭雷卿)의 사건이 일어났다. 청나라의 역관 정명수(鄭命壽)는 본래 평안도 은산(殷山)의 천인(賤人) 출신으로 광해군 때 강홍립(姜弘立)을 따라 갔다가 청나라에 포로가 되어 그들 말을 배우게 되었다. 이후 청나라 임금의 신임과 세도가인 용골대(龍骨大)와 마부대(馬夫大)에 의지하면서 방자하고 난폭하게 굴었는데, 문학(文學) 정뇌경(鄭雷卿)이 분하게 여겨 항상 틈을 엿보아 도모하려고 벼르고 있었다.
마침 정명수가 사사로이 의주(義州)로부터 들어온 감과 배를 횡령하여 보관하니, 청나라 사람 중에 정명수를 밉게 본 자가 명수가 뇌물을 받은 사실을 귀띔해 주었다. 정뇌경이 이를 기회로 삼아 사서(司書) 김종일(金宗一), 종사관(從事官) 강효원(姜孝元) 등과 더불어 비밀리에 약속하고 정명수와 원수진 사람들과 함께 모의하여 그 죄를 증명하려고 하다가 일이 발각되어 되려 그들의 모함을 받아 인조 17년(1639) 3월 18일 정뇌경과 강효원이 참수형을 당하게 된다. 이 사건의 개요는 부록(附錄)한 심양장계(瀋陽狀啓)와 심관일기(瀋館日記)에 자세히 나와 있으니 참고하기 바란다.
이 사건은 앞에서 말한 대로 정뇌경 ․김종일 ․강효원 등이 정명수를 제거하려고 계획한 일로 세자와 공은 전혀 내막을 모르고 있다가 일이 발각된 후 청나라 형부(刑部)의‘세자도 알고 있지 않았느냐?’는 추궁을 받고서야 사건의 전모를 알게 되었다.
공과 세자가 용골대와 마부대에게 정뇌경을 구해달라고 청하자 그들은 되려 평소 자신들을 못마땅하게 여긴 세자가 정뇌경을 사주하여 꾸민 일이라며 세자를 핍박했다.
“정뇌경, 강효원 등의 죄는 마땅히 죽어야 옳소. 세자께서 나를 해치려고 한 자를 반드시 구제하려고 하니 우리를 죽이고 싶어 하는 마음을 알 수 있겠소. 우리 두 사람과 두 역관의 살을 재신(宰臣)들이 먹고 나서야 속이 시원하겠소? 그런 말은 아예 입 밖에 내지도 마시오.”
그래서 일이 다급하게 되었는데, 관소의 의견이 둘로 나뉘어지게 되었다. 정지화(鄭知和) 등은 말하기를
“청나라 사람들이 세자는 어렵게 여기고 있으니, 세자께서도 사건의 전말을 알고 있었다고 하면 설마 세자를 죄주겠는가? 그렇게 되면 정뇌경도 사형은 면할 수 있을 것이다.”
공은 그 의견에 찬동할 수가 없었다.
“우리들은 세자를 따라 이곳에 와서 아무 것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목숨을 내맡기고 있다. 설사 세자께서 그 일에 참여했다 하더라도 신하된 도리에 마땅히 감추고 자기 스스로 짊어져야 하거늘 하물며 세자께서는 모르는 사실이 아닌가? 만일 세자에게 어떤 위험한 상황이 닥치기라도 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죄를 면하겠는가?”
여러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세자가 친히 청나라 아문(衙門)에 가서 정뇌경을 구해 보려고 물어보니, 공은 대답하기를,
“신의 생각에는 청나라 사람들이 세자의 말씀을 틀림없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니 욕만 당하게 될 것 같습니다. 그들의 동정을 서서히 살펴본 다음 말을 할 만하면 해보시되 경솔히 말을 꺼내지는 마십시오.”
라고 하였다.
세자가 굳이 나아갔으나 청나라 사람들이 앞을 막고 들여보내지 않아 그대로 돌아오고 말았던 것이다.
이때의 상황을 심양장계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저희가 세자를 뵙고 그 연유를 아뢰니 세자께서 극히 놀라고 측은해 하시며 구제하려고 생각하여 재삼 방도를 물으셨으나 달리 마땅한 계책이 없기에, 몸소 아문에 나아가려고 하셨습니다. 저희가 거듭 생각해보니, 이미 결정된 일이라 필시 다시 바꿀 리가 없으며 저들의 분노가 지금 극성이니 욕을 당하기 알맞으므로 경솔히 모시고 가기 어려울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살릴 방도를 물으시는 뜻이 심히 아름다운 일이며 장차 주선이 순조롭게 되면 그것도 혹 한 가지 방법일 것이므로 모시고 관문을 나갈 즈음에, 정명수와 김돌시가 여러 통사들과 더불어 말 앞을 막아서며 큰소리로 발악하며 말하기를,‘만약 아문으로 나아간다면 반드시 큰일이 생길 것이오. 우리의 머리를 자른 후에야 앞으로 나갈 수 있을 것이오.’라고 하였습니다. 사서(司書) 정지화가 옆에 있다가 아뢰기를,‘이미 문을 나서셨으니 속히 앞으로 나아가셔야 합니다.’하니, 정명수가 눈을 부릅뜨고 마구 짖어대기를,‘너는 어떤 놈이냐?’고 하면서 이어 느닷없이 들어와서는 주먹으로 정지화를 쳐서 갓끈과 옷끈이 다 떨어져나가기에 이르렀습니다. 부득이 관소로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이런 저런 구명운동에도 불구하고 정뇌경은 결국 처형을 당하게 된다.
“정뇌경이 새 옷으로 갈아입고 관대를 바로 하고 차비문 밖에서 숙배(肅拜)하고 하직인사를 하니, 세자께서 이끌어서 보시고 술을 먹이고 영별하셨습니다. 정뇌경이 대문을 나와서 동쪽으로 본국을 향하여 네 번 절하는 예를 행하고 또한 노모를 향하여 두 번 절한 후에 길에 올랐습니다.
정뇌경이 인사를 드리고 나간 후에 세자께서 문학(文學) 신유(申濡)에게 영을 내리시어, 뇌경으로 하여금 자결(自決)하게 하라고 저희에게 말하였습니다. 정신이 없는 중에 독약과 소주를 구해주었으나 재료가 미비하여 마셔도 효험이 없을 것 같아서 저희가 목매어 사형시키려는 뜻을 이응징에게 말하니 정명수가 불끈 성내며 말하기를,‘청나라에는 본래 이런 법이 없소. 반드시 목을 베어 죽여야 하오.’라고 하였습니다. 저희가 말하기를,‘우리나라의 법에, 유관(儒官)은 비록 죽을죄를 지었더라도 반드시 교살형(絞殺刑)에 처한다. 또한 정뇌경은 이미 우리나라의 관청에서 처단하도록 하였으므로 마땅히 우리나라의 법을 적용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응징도 말하기를,
‘내가 들어올 때 교살형에 처하라고 명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명수는 극구 욕을 하고 또한 주먹으로 서너 번을 쳤으나 응징이 끝까지 고집하였습니다. 처형할 때 정뇌경, 강효원 등은 같이 교살형에 처하였습니다.”<심양장계 인조 17년 4월 20일>


3. 공에 대한 오해(誤解)


이상이 정뇌경 사건의 전말이다. 그런데 이때의 전후 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공이 정뇌경을 살릴 수 있었는데도 살리지 않았다고 의심하고 비난하는 의논이 있게 되었는데 이는 정뇌경과 함께 일을 도모하였다가 혼자만 살아남은 김종일이 자신의 입장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사람들에게“재신(宰臣:公)이 정뇌경을 살릴 수 있었는데도 힘을 쓰지 않아서 죽은 것이다.”라고 하여 책임을 공에게 돌린 데서 비롯된 오해이다.
또 한 가지 단서는 「심양일기(瀋陽日記)」17년 4월 18일 처형당일 기록에 서리(書吏) 강효원(姜孝元)이 형장으로 끌려가면서 공에게“영감, 어찌 차마 죄 없는 사람을 죽이십니까[令監 何忍殺無罪之人乎]”하는 대목이다. 이는 나라를 위해 거사한 자신들이 죽는데도 구원해 주지 못한 세자를 비롯한 관소, 더 나아가서는 무력한 본국에 대한 원망을 공에게 털어놓은 것이지 어찌 꼭 공을 지목하여 한 말이라 할 수 있는가?
정뇌경은 공보다 24세 연하의 후배로 평소 누구보다 아껴서 그와 수작한 시가 본 유고에 여러 수 보이는데 그중‘정진백의 운을 차운하다[次鄭震伯韻]’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任氏筵中始見君  임씨의 잔치자리에서 그대를 처음 보고는
心知雛鳳早承恩  추봉 이어서 일찍 임금의 은혜 입을 줄 알았네
俄看雲路飛騰勢  얼마 후 보니 벼슬길에 날아오르는 기세였고
仍信公家善慶門  이어 선행을 쌓아 복을 받은 집안임 믿게 되었네
機事縱爲猜造物  일의 기미가 혹 조물주의 시기를 받아서
壯懷寧復畏遊魂  장한 회포 어찌 다시 유혼 을 두려워하랴
忠良定有神明佑  충량에게는 신명의 보우가 있게 마련이니
佇待移危作保存  위태로움 벗어나 보존되길 기다리겠네

이 시를 지은 배경을 자세하지 않으나 내용상 혹시 정뇌경의 처형이 확정된 후 차운한 것이 아닌지 의심된다. 왜냐하면 함께 심양관소에 문학(文學)으로 가 있던 신유(申濡)의「심관일기(瀋館日記)」3월 15일(壬申) 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이기 때문이다.
“이날 비가 내리고 추워서 쓸쓸했다. 빈객(賓客) 박모(朴某:朴𥶇) 영공(令公)을 만나 소주 두 병을 가지고 정진백(鄭震伯: 鄭雷卿)의 처소에 갔다. 나는 빈객 신득연(申得淵) 영공과 부솔(副率) 강공(姜公) 등과 더불어 대좌하여 간단하게 마시고서 술자리를 파하였다. 술을 주고받으면서 시를 지었는데 정필선(鄭弼善:정뇌경)이 부채에 시 한 수를 썼다.

孤臣血淚沛城江 외로운 신하 눈물 패성강에 뿌리는데   
三月陰風冷透窓 삼월의 음산한 바람 창문으로 스며드네   
老母弱兒何處托 늙은 어머니와 어린 아들 누구에게 부탁하나  
知君忠義世無雙 그대의 충의심 세상에 짝이 없는 줄 아네

라고 하였는데, 이는 빈객 박모(朴某, 박로)가 지은 것이다.

三月十五日 壬申 是日天雨微寒 景物蕭索 朴賓客某令公 適得燒酒二壺就鄭震伯所處 要余申賓客得淵令公 姜副率公等 對坐細酌而罷 有酬唱詩鄭弼善題所把唐扇絶句一首曰 孤臣血淚沛城江 三月陰風冷透窓 老母弱兒何處托 知君忠義世無雙 屬朴賓客某

이처럼 아끼던 후진(後進)을 공인들 어찌 살리고 싶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공의 사후에 이러쿵저러쿵 말을 들어야 했으며 심지어 현종(顯宗)때 정뇌경 아들 정유악(鄭維岳)을 설서(說書)로 임명하는 기사(記事)에서 사신(史臣)[송시열 제자 이선(李選)이 낭청으로서 이 부분 담당했음]은 실록에 논평이란 사족을 달아 당시 상황을 이렇게 왜곡하고 있다. *참고로 조선왕조실록에서 기사 아래 추가된 '小註' 혹은 '史臣曰'로 시작하여 인물평을 달아 놓은 것은 실록이란 이름에 오점이 되는 사족이다. 실록은 말 그대로 실제 사건만 기록하는 것이다. 당색에 치우친 내용들이다.

“정유악은 정뇌경의 아들이다. 정뇌경은 필선으로 소현세자를 배행하여 심양에 들어가 정명수를 죽이려고 꾀하다가 박로에 의해 누설되어 참혹하게 죽음을 당했다. 정뇌경이 죽을 때 시 한 수를 부채에 적어서 사람을 시켜 정유악에게 주었는데 대개 아들이 세상에 나와 벼슬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도 정유악은 장성하자 어미의 뜻이라고 핑계대고 과거시험 공부를 그만두지 않더니 벼슬길에 올라서 출세에 급급하여 경박하고 줏대가 없어 사람들이 모두 천박하게 여겼다.”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11년 3월 3일조


4. 결어(結語)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공은 병자호란이란 미증유의 국난을 겪고 인조 임금의 출성(出城) 이후에는 볼모로 가는 세자를 따라 심양에 가서 삼년 동안 두 나라 사이의 난제들을 푸는 해결사로서 역할에 진력하느라 병을 얻어 중도에 귀국해야 했다. 이런 공의 능력과 공로를 누구보다 인정한 것은 인조 임금이어서 두 나라 사이 문제가 생기면 제일 먼저 공을 불러 의논하고 처리를 명하였다. 귀국 후 병을 앓으면서 몇 직책에 봉직했으나 이런 모함 때문에 공 자신조차도 크게 현용(顯用)되지 못했으니, 후일 자손들의 관도(官途)야 더 말할 게 무엇이겠는가? 당시 명분만을 내세워 주화(主和)를 주장하던 지천(遲川) 최명길(崔鳴吉)이나 청나라의 강요를 받은 왕명에 의해 굴욕적인 삼전도비문(三田渡碑文)을 지은 백헌(白軒) 이경석(李景奭)도 배척과 비난을 면치 못하였으며, 세자 내외마저 귀국 후 청나라와의 원한을 잊고 가까이 지냈다는 질책을 받고 죽음을 당한 현실에서 공이 받은 이 정도의 비난은 어쩌면 오히려 당연한 것이 아니었나 싶다.

조수익(趙洙翼) 삼가 씀








家文을 찾아서 : 밀양박씨편①
『≪韓琴新譜≫와 마포 水明亭 이야기』



▣인물 연구<5> : 大瓠(대호) 朴𥶇(박로)

수명정 중축자, 朴𥶇(박로)는 참혹한 전란 세대의 대표 學者이자 仁祖의 유일한 외교관이었다.

朴𥶇[1584(선조 17)~1643(인조 21) 향 60歲]의 字는 魯直(노직), 號는 大瓠(대호), 復初軒(복초헌)이다. 문집으로 ≪大瓠先生遺稿(대호선생유고)≫와 ≪復初軒集(복초헌집)≫이 있다. 壬辰倭亂(1592), 丁酉再亂(1597), 丁卯胡亂(1627), 丙子胡亂(1636)을 모두 겪은 朝鮮朝 가장 불우한 세대였다. 60년 인생 전부가 전쟁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大瓠先生遺稿≫ 朴亨遠 개인소장

1613년 5월 22일, 진사 李偉卿(이위경)이 인목대비 폐비를 청하는 상소문이 조정에 투서되었다. 이때는 ≪東國新續三綱行實圖≫ 撰集廳을 통해 국가의 綱常을 바로 잡을 때여서 더 충격적인 일이었다. 당시 홍문관 수찬으로 찬집청에 소속된 박로는 동료 관료들과 성균관 유생들을 동원하여 반대 상소를 주도하였다. 동료 홍문관 검열 嚴惺(엄성)과 승문원 박사 尹烇(윤전), 正字 權護(권호) 등과 논의하여 ‘動搖母后 得罪綱常’[모후를 동요시켜 강상에 죄를 얻었다]’라는 여덟 글자를 榜에 내걸자 공론화가 되었다. 실제 이위경의 상소문 발론자는 聯名으로 등재된 이이첨의 사위이자 李昌後(이창후)의 아들인 李尙恒(이상항)과 韓纘男(한찬남)의 세 아들이 주동자이다. 결국 한찬남, 이창후 등 이이첨 세력의 강력 반발에 광해군은 마지못해 엄성을 체직하는 것으로 반대 운동을 무마했다. 
  

≪東國新續三綱行實圖≫ <忠臣 편> 朴𥶇의 사촌형 朴箎(박호) 임진왜란 순절

한편 광해군의 처남이였던 柳希奮(류희분)의 아들인 柳忠立(류충립)과 朴承宗(박승종)의 아들 朴自興[딸이 광해군의 세자빈]은 당시 吏曹 銓郞으로써 인사를 전횡하고 있었기에 이조 참판으로 상관이었던 부친 박이서가 저지하려 했지만 법적으로 권한이 없었기에 아들인 박로와 함께 폐비론을 저지하려 했던 것이다. 조선조때 이조의 인사권은 이조 판서에게 있지 않고 젊은 관료 전랑직에 있었는데, 그것을 모두 류희분과 박승종이 차지한 상태였다. 이조 전랑의 자리싸움은 사림이 東人, 西人으로 갈라서는 계기가 된 바로 그 직책이다.
박로는 당시 병조 좌랑, 홍문관 수찬, 사헌부 지평, 사간원 정언으로 매달 인사 이동을 받았지만 친분있는 동료들과 함께 폐비 반대 상소를 진행했다. 이 폐비 저지 운동은 ≪澤堂集≫에 자세히 나온다.

  

≪澤堂集≫

說書赴召
……<중략>………
○在京時。朴𥶇與儒生等。主張攻廢妃之論。儒疏連上。朴皆預知之。時來見余。相議疏事。或草創與之。余旣被朴調捄。而又其所論事關重不避。自此情勢頗親昵矣。

說書로 召命에 응하다.
……<중략>………
○ 내가 京城에 있을 적에 박로가 儒生 등과 함께 廢妃論을 공격하는 일을 주도하였다. 그리하여 유생이 잇달아 상소문을 올릴 때마다 박로가 모두 거기에 참여하여 개입하면서, 이따금씩 나를 찾아와서는 상소하는 일에 대하여 상의하곤 하였으므로, 내가 草稿를 작성해서 그에게 주기도 하였다. 나는 이미 그로부터 도움을 받고 구제된 일이 있었던 데다가 논하는 일이 관계된 바가 중요하여 피할 수가 없었던 까닭에, 이로부터 情理상으로나 형세상으로 그와 자못 친하게 지내게끔 되었다.
≪澤堂集≫

폐비 반대의 주동자로 배척된 두 부자는 조정에서 물러나 마포에 정자를 짓기 시작했다. 1616년 완성되자 그곳에서 박로는 매일같이 부친을 보살폈다. 하지만 1618년, 이이첨에 의해 부친이 전라도 영광 군수로 좌천되어 떠나게 되었고 이듬해 사직하고 돌아오게 되었지만 2년 뒤, 또다시 예조 판서 이이첨에 의해 명나라 사신의 명을 받고 떠나고는 끝내 돌아오지 못하였다.

두 부자의 애틋한 정을 담은 전설이 황해도 구월산에 전한다. 박로는 아버지의 3년상을 황해도 구월산에 있는 望海庵에서 부친이 돌아가신 바다를 바라보며 매일같이 눈물로 보냈다. 그 효심에 대한 일화가 알려지면서 많은 사림들이 海西(해서)를 유람할 때 찾는 명소가 되었다. 朴世堂의 ≪西溪集≫에 <望海庵 3首>, 그의 제자 李德壽(이덕수)의 ≪西堂私載≫에 <望海菴記>가 실려있다. 睦萬中의 ≪餘窩集≫, 洪敬謨의 ≪冠巖全書≫, 任天常의 ≪窮悟集≫에도 그 사연이 기록되어 있는데, 홍경모의 <九月山記>에 그 내력를 상세히 전하고 있다.

   

≪冠巖全書≫

九月山記
九月山國之西岳也。山之體神䧺俊異。山之高飛騰盤紆。抗標一方。靈氣氤氳。...回輿向濟衆庵。旁有小室。妥一画眞。僧言朴𥶇之父航海朝天。溺于西海。𥶇痛之。後爲信川守刱此庵。仍留像望海。以寓追慕之誠。故亦名望海庵。...

구월산기
구월산은 나라의 서쪽 산악이다…<중략>…수례를 돌려 제중암으로 향했다. 곁에 작은 방이 있는데 평온한 모습의 眞影 그림 한점이 있었다. 스님이 말하기를, 박로의 아버지가 항해로 사행길 중 서해에서 익사했는데 박로가 그것을 애통해했다. 후에 신천군수가 되어 이 암자가 비롯되었는데 이에 화상을 남겨 바다를 바라보게 해서 추모의 정성을 머물게 했다. 그래서 이름도 망해암이라 이름하였다….

1927년 9월 1일 동아일보에 白陽桓民의‘九月山巡禮記(七)’ 연재기사에도 실려있다. 그 내용이 박로의행장에 기록된 것과 유사하다.

山城高絶處。有濟衆庵。平臨遼海。公隱痛在心。每登望遲徊不忍去。顧以心不可窮而身不得留。則乃遺像庵中。以寓其懷。信川之民。感其德。悲其志。備位田屬庵僧。以資香火。稱其庵爲望海庵云。

산성[九月山城]의 높고 험한 곳에 濟衆庵(제중암)이 있는데 앞에 요동 바다가 펼쳐져 있어 공의 마음 속에 남모르는 痛心이 있어 매양 올라가 바라보다가 머뭇거리며 차마 내려오지 못하셨다. 이에 바다에서 돌아가신 참판공을 사모하는 마음은 끝이 없으나 자신은 오래 머물 수 없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遺像을 암자에다 남겨 두어 회포를 푸시니, 신천 군민들이 그 德에 감격하고 그 뜻을 슬프게 여겨 位田을 장만해 암자에 소속시켜 香火의 비용으로 쓰게 하고 그 암자를 望海庵이라고 하였다.
<朴𥶇 行狀>

그 때부터 박로의 후손들은 매년 이곳에서 제사를 모셔왔으나 현재는 북한 땅이라 그 자취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 길이 없다.

수명정은 박로가 건축 실무자이며 부친의 노년을 위해 지었다 하는 것이 옳을 듯 하다. 그 근거가 송시열과의 예송논쟁으로 유명한 남인계 白湖 尹鑴(윤휴)의 문집에 나온다. 병진(숙종 2, 1676)년 60세의 나이로 현종의 국상때 상경하여 거주한 곳이 수명정이다. ≪白湖集≫과 ≪白湖全書≫에 그 집의 주인을 ‘박참판 𥶇의 亭舍’로 기록하고 있다. 윤휴는 1차 예송논쟁이 벌여질 때 예조 정랑으로 있던 아들 朴守玄(박수현)과 친해졌다. 박수현은 효종의 신주를 종묘에 모실 때 예조의 실무자였다. ≪孝宗祔廟都監都廳儀軌≫(1661)에 都監廳의 郎廳으로 기록되어 전한다.


≪白湖集≫

白湖先生文集附錄/年譜
○二年丙辰。先生六十歲 …八月。移寓麻浦村舍。以所寓亭舍風高。不宜寒節。借朴參判𥶇亭舍于麻浦。移居之。 以國祥入城。疏請未參起居之罪。遣史官傳諭。

○2년 병진(숙종 2, 1676) 선생 60세 …8월. 麻浦의 촌가에 이주하였다. 살고 있는 객사에 바람이 거세어 추운 절기에 지낼 수 없으므로 마포에 있는 참판 朴𥶇(박로)의 정사를 빌려 이주하였다. 國祥으로 인하여 성 안에 들어와 상소로 문안드리는 반열에 참여하지 못한 죄를 청했는데, 史官을 보내어 傳諭하였다.

이 때는 박로 사후 33년이다. 아들 박수현도 세상을 떠난 해이다. 당시 정자의 상속인은 손자 박신이다. 윤휴가 사헌부 대사헌으로 있을 때 손자 박신이 장령으로 있으면서 친분을 유지했다. 윤휴는 수명정의 주인으로 할아버지 박로로 기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수명정은 ‘박로의 정자’로 알려졌다는 것을 말해준다.


박로의 외교 철학, '소나무 보다는 대나무처럼 휠 줄 알아야 한다.'

  

≪澤堂集≫

松竹問答 二首  솔과 대의 문답 2수

松問竹     솔이 대에게 말을 걸었다
風雪滿山谷   눈보라가 산골 가득 휘몰아쳐도
吾能守强項   강직한 나의 자세 고수하고서
可折不可曲   부러지면 부러졌지 굽히지는 않는다오

竹答松     이에 대가 대답했다
高高易摧折   높이 솟으면 솟을수록 부러지기 십상이라
但守靑春色   청춘의 푸른 색깔 언제나 간직한 채
低頭任風雪   머리 숙여 눈보라에 몸을 그냥 맡긴다오

소나무는 나무목[木]변의 ‘植(식)’을, 대나무는 대죽[竹]변의 ‘𥶇(로)’를 지칭한다. 이식과 박로의 인생관을 압축하여 표현한 택당의 시이다. 청나라 사신행에서 돌아온 친구의 본심을 알아본 32년 莫逆之友의 詩이다. ‘휘지 않으면 되지 않는 일’. ‘외교’라는 것이 그런 것이다. ‘내가 옳고 자네가 틀렸어’가 아닌 ‘자네도 옳고 나도 옳다’는 것을 말하려 함이다. 이와 같은 형식의 글이 <先天器說>에서 박로를 大瓠子, 이식을 德水子로 칭하며 안동서 발견된 고대유물 銅器를 소재로 좌담하는 글에서도 엿볼 수 있다. 박로가 발견한 이 유물은 당시 한양에 큰 화제가 되어 李睟光의 ≪芝峯類說≫, 柳夢寅의 ≪於于野談≫에도 실려 있다.
목은 이색부터 鵝溪 李山海(이산해)로 수백년 世交를 이어온 한산이씨의 石樓 李慶全(이경전)이 수명정을 찾았다. 그리고 심양으로 떠나는 후배 박로에게 써준 이별시가 최근 예산 한곡 한산이씨 수당고택에서 발견되었다.

  
≪石樓先祖筆澤≫ 禮山 閒谷 韓山李氏 修堂古宅 소장

奉贈朴魯直令公再入瀋陽  다시 심양에 들어가는 朴魯直(박노직) 영공에게 받들어올리다[문집제목:朴魯直還入瀋陽]

遼陽本是朝天路  요양은 본시 명나라 朝天 사행길이니
此別寬心強盡杯  이번 전별 큰 마음먹고 술잔을 다했네
雁正南時人北去  기러기가 남향일 때 사람은 북으로 가니
家無着處夢常廻  집에는 눈 둘 곳 없어 꿈에 늘 배회하네
平生自信腸餘鐵  평생토록 肝腸이 鐵石같다 자신했는데
卽席難堪淚滿顋  즉석에선 참기 어려워 눈물이 볼에 가득찼네
早識逢場還卽送  일찍이 상봉장인줄 알았는데 돌아오자 곧 떠나니
未如初不到京來  아직 첫사행 도착하지 않아 서울에 들어오지 않은 것 같네
戊歲秋     무인년(仁祖 16, 1638) 가을
≪石樓先祖筆澤≫, ≪石樓遺稿≫

이식은 수명정에서 4차례의 청나라 사신행과 심양재신으로 떠나는 전별 모임에 빠짐없이 참석하여 그 때의 일을 시로 남겨 ≪택당집≫에 전한다.

 
≪澤堂集≫
送朴魯直四使瀋陽 네 번째 瀋陽에 사신으로 가는 朴魯直을 전송한 시

七歲四行役   일곱 해 동안에 네 차례 심양의 길
孤臣半死生   반쯤은 죽었다 할 외로운 신하의 몸
停車氷擁輅   얼음에 가로막혀 가던 수레 멈춰 서고
戒旆雪迷程   사방을 뒤덮은 눈발 속에 조심조심 길 찾으리
寸舌當全算   세 치 혀로 局面을 완전히 타개하고
長身任衆評   훤칠한 키로 뭇 논의 감당해야 하실 분
惟應桑海旭   오직 扶桑에 솟는 아침 해만은
隨處照心明   가는 곳마다 그대 丹心 밝게 비춰 주리라
≪澤堂集≫

병자년(인조 14, 1636) 12월. 백척간두의 국가위기 속에 기습적으로 쳐들어 오는 청나라의 예봉을 저지코자 박로를 급파한다. 네번째 사행이다. 목적은 타협보다 진격을 늦추는 것이었다. 하지만 청군은 이미 개성을 지났다. 급보로 仁祖(인조)의 피신을 알리고 자신은 사신이면서 포로가 되어 두차례나 협상을 진행하지만 수포로 돌아간다. 남한산성으로 인조가 피신했다는 소식을 듣고 남한산성에 주둔한 청나라 진영으로 찾아가 다시 요구했다. “내가 임금께 복명해야 하니, 성으로 들어가게 허락해 주시오”. 청군이 허락하지 않자 40여일간 성 아래에서 사신의 節旗[깃발]을 들고 서리와 눈을 맞으며 노숙하며 시위를 했다.

  

≪南漢日記≫

朴𥶇 彛叙子。字魯直。号大瓠。參判。丙子被拘南漢城下。持節處雪中四旬。
박로 이서의 아들. 자는 노직. 호는 대호. 참판. 병자년 남한산성 아래에서 구금되어 節旗를 잡고 눈 속에서 40일을 보냈다.
≪東國氏族攷≫

하지만 47일만에 인조가 굴욕적으로 항복하며 성문을 나오자 박로는 어가를 모시고 환도했다. 昭顯世子(소현세자)가 인질로 잡혀가는 仁祖에게 박로는 마지막 신하요, 외교관이었다. 인조는 직접 박로를 불러 侍講院의 世子賓客으로 삼아 세자를 보필해 줄 것을 부탁한다.

臨發上召見公慰諭曰。卿久陷虜陣。僅得生還。而今又遠役。雖非體下之道。念儲嗣沖弱。虜情叵測。調護之任。彌縫之責。捨卿其誰。天語丁寧。有使感泣。
출발에 임박하여 임금께서 공을 불러 보시면서 위로하시기를, “경이 오랫동안 적진에 붙잡혀 있다가 겨우 살아 돌아왔는데 이제 다시 멀리 보내는 것이 아랫사람을 대우하는 도리가 아니다. 생각하건대 세자는 나약하고 오랑캐의 정세는 헤아리기 어려우니, 보살피는 도리와 彌縫(미봉)하는 책임을 경 말고 그 누구에게 맡기겠는가?” 하셨는데 임금님의 말씀이 아주 간곡하여 감격해 울음이 나오게 했다.
<朴𥶇 行狀>

박로는 집안 식구들의 생사 여부를 물을 겨를이 없이 곧바로 재신의 임무로 길을 떠났다.

世子見公衣裳破裂。特賜衣帶。旣行。行中大小之事。委公周旋。及到瀋陽。淸人之恐喝不止。需索無限。公能隨事應變。不至生梗。且數開書筵。不廢勸講。裨益甚多。
세자께서 공의 옷이 찢어지고 해진 것을 보고는 특별히 衣帶를 하사하셨으며 출발하여서는 行中의 크고 작은 일을 모두 공에게 맡겨 두루 돌보도록 했다. 심양에 도착하자 청나라 사람들의 공갈이 그치지 않고 요구함이 한정 없었으나 공이 중간에서 그때그때 잘 대처하여 事端이 일어나지 않았다. 또 자주 書筵을 열어 공부를 폐하지 않아서 도움되는 바가 심히 많았다.
<朴𥶇 行狀>

정축년(인조 15, 1637) 1월 30일. 인조가 남한산성 西門을 나오는 것을 시작으로 매일 시강원에서 ≪昭顯瀋陽日記(소현심양일기)≫[일명 講院日記]를 기록하였고, 정기적으로 승정원에 장계를 올려 조정에 경과 보고를 한 것이 ≪瀋陽狀啓(심양장계)≫이다.

      

≪昭顯瀋陽日記≫                         

≪瀋陽狀啓≫
그 업무를 도맡아 진행한 사람이 박로였다. 한 겨울 남한산성에서 40여일간의 노숙과 68일간의 심양으로 가는 볼모행렬. 이때의 苦行으로 심양에서 피를 토하는 병을 얻어 3년후 1639년 10월 세자에게 하직인사를 올리고 귀국하게 된다. 이후 4년간 경기감사, 병조 참판, 도승지를 지냈으나 끝내 병으로 생을 마감했다. 향 60세. 박로의 문집에 그 때의 시가 실려있다.

 
≪大瓠先生遺稿≫

水明亭贈諸友    수명정에서 여러 벗에게 주다

隔年離別幾相思   작년에 이별하고 몇 번이나 서로 생각했나
此夕重逢喜且悲   오늘 저녁에 다시 만나니 희비가 엇갈리네
亂後江山渾舊面   난리 후에 강산은 모두 구면인데
歸來花木盡新枝   돌아와 보니 꽃나무는 모조리 새 가지이네
平林日暮蟬聲滿   숲에 해가 지니 매미 소리 가득 울려 퍼지고
極浦風回颿影移   먼 포구에 바람 부니 돛 그림자 옮겨 가네
鶴駕未還臣罪大   세자께서 돌아오지 못하시니 신하의 죄 커
淚痕長向瀋陽滋   오랫동안 심양 바라보며 눈물 흘리네

이긍익은 ≪연려실기술≫에 그를 인조의 명신으로 기록하였다.

仁祖朝名臣○朴𥶇(박로) 7남 2녀

박로, 자는 魯直(노직)이며, 호는 大瓠(대호)이다. 26세에 과거하여 南床(남상)에 뽑혔으며 갑신년에 났다.
○ 갑자년 가을에 長淵府使(장연 부사)를 배수하였다. 이때 큰 옥사가 있었는데, 원수진 사람이 죄수를 꾀어 무고로 공을 끌어넣었다. 그러나 대질을 하고 나서 즉시 석방되어 부임하여 갔다. 《恬軒集(념헌집)》
○ 병인년에 옥사에 또 무고를 당하였으니, 원수진 사람이 부추긴 것이었다. 《恬軒集》
○ 정묘년에, 信川(신천) 부사가 되어 나갔다. 여러 고을을 이끌고 九月山城(구월산성)을 쌓았는데, 경오년에 그 공으로 통정대부에 올랐다. 이때 박난영(朴蘭英)이 청 나라에 사신으로 내왕하였는데, 여러 번 사신의 임무를 잘못하였다. 조정에서 보낼 사람을 의논하여 택하였는데, 그때 사람들이 그 사신되는 것을 부끄러워하여 모두 회피하였으므로 공을 뽑아 보내었다. 청 나라 임금이 공경히 대우하여, 다시 예전처럼 교만하게 하지 않았다. 그래서 사신이 되어 임금의 명을 욕되게 하지 않았다 하여 가선대부를 가자하였다. 을해년에 또 심양에 사신으로 가게 되었다. 병자년에 조정에서 척화하자고 의논하므로, 청 나라 사신이 노하여 돌아갔다. 박로가 홀로 소를 올리기를, “방금 척화하자는 의논이 비록 우세하지만, 싸우고 지키는 준비가 아주 소홀하니, 난이 반드시 일어날 것입니다.” 하였다. 겨울에 과연 청 나라 군사가 크게 이르니, 조정에서 박로를 보내어 그 군사를 늦추려고 하였다. 中和(중화)에 도착하니, 적의 군사가 벌써 쳐들어왔으므로 물러나와 黃州(황주)로 들어가 성 밑에서 청 나라 장수를 만나보고 돼지와 술을 보내고, 또 온 뜻을 힐문하고 서울로 사람을 달려 보내어 급히 아뢰었다. 박로는 곧 돌아오다가 적병을 만나서, 수행하는 사람들이 모두 포로가 되었다. 박로가 말하기를, “나는 사신인데 너희 장수를 보려고 한다.” 하였다. 청 나라 장수가 박로를 만나보고는 곧 가게 하였다. 남한산성에 이르러 바라보니 적병이 사방으로 둘러싸고 있었다. 울면서 말하기를, “임금에게 복명하지 못하고 군사를 피하는 것은 신하의 도리가 아니다.” 하고, 청 나라 진중으로 달려들어가서 말하기를, “내가 임금에게 복명하려고 하니, 성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시오.” 하였다. 청인이 서로 돌아보며 말하기를, “우리 진에 세 번째 들어왔는데 이미 나갔다가 다시 돌아왔으니, 차라리 억류하여 두자.” 하였다. 40여 일 만에 임금의 행차가 성을 나오자, 비로소 돌려보내었다.
○ 소현세자가 북으로 가는데, 박로가 세자빈객으로서 따랐다. 심양의 일은 박로에게 일임하였고, 세자궁이 또한 오직 박로만을 의지하였으므로 해가 차도 대신 바꾸기를 허락하지 않았다. 관에 머물러 3년이 되어 피를 토하는 병을 앓아 낫지 않으니, 비로소 바꾸어 돌아오기를 허락하였다.
○ 尹宣擧(윤선거)
가 일찍이 사람에게 말하기를, “내가 청 나라 군중에서 보니, 박로가 몸에는 결박을 당하고, 옷이 찢어지고 떨어진 채 눈 속에 서 있는데 늠름하고 태연하였다. 청인들이 가리켜 보이며 ‘이 사람이 대등한 예를 고집하여 굽히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하였다. 《恬軒集》
≪연려실기술≫

≪심양일기≫와 ≪심양장계≫는 인조에 대한 그의 외교 업부 보고서인 것이다. 그러나 조정의 서인/남인의 공동정권은 ‘정뇌경의 죽음’을 사주한 자로 누명을 덮어 씌웠다. 기존의 사신행과 처후가 똑같았다. 사신행은 ‘사행→승진→추고→파직’의 과정이었다. 속죄의 길로 다시 사신행이 주워지고 또 파직되는 일의 반복이었다. 그들에게 심양은 소현세자가 죽어야 끝이 나는 일이었다. 박로에 대한 억울한 누명은 아들 박수현이 감당해야 했다.
최근 자료를 수집하던 중 박로의 일기가 발견되었다. ≪凝川日錄(응천일록)≫[7책]이 그것인데, ≪大東野乘(대동야승)≫이란 모음집에 실려 알려져 있다. 이 일기가 박로의 것으로 확인되었다. 조선조에는 선비가 출사하면 자신의 관직생활을 일기형식으로 기록을 남겼다. 이이의 ≪石潭日記≫[일명 經筵日記], 李舜臣(이순신)의 ≪亂中日記≫가 그런 책이다. ‘응천’은 이미 살펴 보았듯이 밀양박씨이고 그의 호가 박씨를 뜻하는 ‘大瓠’이며 친구들의 문집에는 ‘응천’으로 자신을 기록한 사례도 있다. ≪응천일록≫은 박로가 과거급제하여 대기발령이던 날로부터 시작하여 3번째 기사가 자신의 승문원 직임을 받은 것이다. 6번째 기사가 부친 박이서의 弘文館 副提學을 제수받은 것이고, 이 일기의 끝은 그가 3번째 사행을 떠나기 전날까지의 기록이다. ≪응천일록≫은 박로의 ≪심양일기≫ 전편이 되는 것이다.

그의 친구 사귐과 명망높은 학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시가 있다. ≪淳昌郡誌≫ 淳昌郡 ‘題詠’편에 평소 벗하던 龜陰 楊時晉(양시진)의 사행 전별연을 기념하여 남긴 시가 기록되어 있다.


≪淳昌郡誌≫ 淳昌郡 ‘題詠’편

送楊員外時晉赴燕京   芝峯 李晬光(이수광)
契分從先世。相知自弱齡。辭來頭欲皓。逢處眼更靑。
款曲披肝膽。尋常對典刑。聲名今夏署。禮樂大朝廷。
日下乘驄馬。天涯逐使星。行裝三尺劍。道路幾長亭。
旅夢秋驚雁。歸期歲蓂變。別雙偏作惡。艱苦飽曾經。
物色詩添稿。愁懷酒滿甁。那堪西望處。惆悵暮雲情。
又         鶴谷 洪瑞鳳(홍서봉)
卷北携仍阻。燕南路更長。新奇供客眼。寒燠換年光。
情抵閑來倒。詩因別後忙。雄飛餘氣象。西望重彷徨。
又         大瓠 朴𥶇(박로)
此行不可駐。使我多苦容。觀周今日去。歸國幾時逢。
過薊永千里。到燕山萬里。遙知堯陛上。爭獻祝華封。
又         谿谷 張維(장유)
慶節回璇極。星槎度祈津。由來觀樂地。必待誦詩人。
鶴野炎雲密。燕山佳氣新。壯游男子事。況此覲楓宸。
又         一松 沈喜壽(심희수)
浿鴨黃塵沒帽簷。經遼還苦雨垂髥。書生胸海觀遊富。御史威風糾摘嚴。
金闕曉鍾搖彩伏。玉河秋月透緗簷。世交傷別多歸夢。萬事悠悠付黑甛。
又         疏庵 任叔英(임숙영)
赤鳳靑鸞倦不飛。銀河濕月星斗稀。軟風吹八廣寒殿。碧桂飄花香滿衣。
雲裾霞佩簇如指。下視人間九千里。瑤臺曲宴莫終朝。綠池群芳秋欲死。
又         白洲 李明漢(이명한)
長春使節上靑冥。專對高才政妙齡。家世關西稱伯起。文章海內說玄經。
千年華表聞仙鶴。八月銀河泛客星。試看中朝諸學士。誰將金鑑薦明庭。
又         淸陰 金尙憲(김상헌)
鴨水燕山路苦長。薊門煙樹接蒼茫。愁霖畏熟行經盡。歸把秋觥泛菊香。
又         滄洲 尹知敬(윤지경)
日出東溟地最偏。君家又在極南邊。行到薊門回首望。碧雲滄海共茫然。
又         寒松 鄭文翼(정문익)
同朝同譜又同心。半世琴期托素琴。三百詩才歸象望。雅疏風度起人欽。
鴨江波膩輕舟穩。鶴野雲低落日陰。臨別可無珍重語。往來須愼保千金。
又         延平君 李貴(이귀)
關樹沈沈暖更蒼。送君離思此時長。惟應遼海月明夜。遙念三淸舊酒狂。
又         五山 車天輅(차천로)
笠較淸曺錦帳郞。仙査八月上銀廣。乘驄御史風霜挾。握節行人玉帛將。
遠送使星朝析木。卽看裝劍發搏桑。誦詩專對才難得。比馭嚴程意更長。
東土陪臣擎土物。大明天子坐明堂。綠囊寶鏡絲綸煥。萬歲千秋萬曆昌。
華祝堯年惟祝聖。禮觀周樂是觀光。黃金臺古知燕地。紫氣關高認帝鄕。
莫遣旅愁輸久別。祗從王事答方强。白頭匏繫眞堪恨。却望行旌老欲狂。

당대 조정을 대표하는 대신들이자 문장가들이다. 수명정을 찾는 방문객들이다. 이들과 동류하며 어깨를 같이했으나 서인, 특히 선대로부터 악연이 이어진 김장생과 송시열의 문하들에 의해 북벌론의 희생양이 되면서 철저히 士論에서 삭제된다. 박로의 문집에는 시강원 후배 정뇌경에 대한 애뜻한 시가 여러 편이 실려있다. 사주한게 아니라 인질로 잡힌 약소국으로 어찌할 수 없는 처지를 한탄하는 시들이다.

유사이래 가장 가옥한 세대를 살다가 누명을 다 벗지 못하고 떠났으니 그 안타까움을 노래한 시가 택당이 지은 박로의 挽詩이다.


≪澤堂集≫

挽朴魯直 二首 朴魯直(박노직)에 대한 만사 2수

緩急人皆有  사람마다 위급한 일 당하게 마련인데
炎涼衆所移  염량 세태 보이는 세상 사람들.
吾儕惟義氣  우리는 의기만을 서로 중히 여기면서
此道未磷緇  물들거나 닳지 않고 이 길을 걸어왔지.
白首怜同病  백발이 다 되도록 동병상련 해 오면서
靑山負後期  청산에 돌아갈 그 약속은 끝내 이루지 못했구려.
龍鍾餘一死  꾀죄죄한 이내 몸 죽음만 하나 남겨 둔 채
獨立更何之  이제 홀로 서서 다시 어딜 갈꺼나.

桃渚春生漲  도저동 본가에 봄물이 출렁이고
麻湖月上弦  마호에 달이 거의 차오를 때,
過從非取醉  서로 왕래하면서 취토록 술잔을 권하거나
陶寫幾連篇  시를 주고받으면서 회포를 풀었었지.
勝事堪傳後  후대에 전할 만한 우리들의 멋진 풍류
陳蹤只在前  그저 눈만 들면 추억의 자취 즐비하네.
城塵淹老疾  도성 먼지 속에 늙고 병들어 파묻힌 채
無路哭新阡  새로운 안식처 떠나는 길 弔問마저도 못하누나.
≪澤堂集≫

이식은 漢文四大家로 이름을 얻었다. ≪택당집≫과 ≪대호유고≫에 서로 주고 받은 시가 40여 편이 전한다. 32년간 두 분의 우정록이다. ≪택당집≫은 김수항과 송시열이 편집하였는데, 아쉽게도 정뇌경 누명의 당사자들이다. 택당이 쓴 <박이서 신도비명>에 박이서의 字 ‘錫吾’를 ‘叙吾’로 바꿔치기 하여 이름자를 훼손하였는데, 당대에는 참을 수 없는 만행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아직도 이것이 수정없이 알려지고 있으니 그 폐독이 얼마나 큰 지 알 것이다. ‘國婚勿失’[국혼을 놓치지 말라]. 왕비와 세자빈은 서인 집안에서만 내겠다는 그들의 정치 제일 정책이 결국 조선을 극단으로 이끌어 갔다. 
 








*박로에 대한 정치인 송시열 일파의 조작 사례
 
세자빈객으로 박로가 소현세자와 함께 심양에 볼모로 잡혀있을 때, 시강원 후배 정뇌경(鄭雷卿)의 죽음을 사주했다는 억울한 누명을 받았다. 초임자인 32살 정뇌경이 소현세자와 직속 상관인 3명의 재신에게 보고 없이 청나라 역관 정명수와 김돌시를 제거하려던 음모가 발각되어 죽게 된 사연이다. 이 때는 청나라로부터 소현세자가 세자 책봉례를 다시 받아야하는 일이 진행되던 시점이라 소현세자와 재신들은 책잡힐 일을 해서는 안되는 상태였다. 박로는 정뇌경에 대한 구명을 다방면으로 모색하였지만 음모의 수괴가 세자로까지 일이 번지자 결국 음모에 가담한 사서 김종일은 풀려나고 직접 기획한 문학 정뇌경과 서리 강효원의 구명 활동은 한계가 있었다. 그가 처형된 후, 시신을 수습하는데도 갖은 뇌물과 비위를 맞춰야 했다. 곧이어 세자의 책봉례가 있었다. 이 굴욕을 감내하며 일을 담당한 현장 책임자가 심양재신 박로였다. 본 대호선생유고집에는 박로와 정뇌경이 주고받은 시가 7편 수록되어 있는데, 모두가 노년의 박로가 초임 후배 정뇌경을 아끼고 걱정하는 내용들이다. 이런 정세를 무시한채 서인[송시열(宋時烈), 김익희(金益熙)]과 친인척[정두경(鄭斗卿), 유백증(兪伯曾), 윤선도(尹善道)]들이 조직적으로 왜곡 날조했다. 북벌론과 정쟁(政爭)의 소재로 삼으며 희생양으로 박로가 청나라에 아부하며 사주한 일로 변질되면서 그를 간신배로 몰아갔다. 송시열은 자신이 지은 정뇌경 묘표문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그의 제자 이선(李選)에게 보낸 편지에서 고백했다.



*송시열 제자 이선. <현종개수실록> 낭청으로 참여, 실록도 왜곡함(현종개수실록 11년 3월 3일: 위 해제의 부채시 참조)

▲≪宋子大全≫ 권72 <與李擇之> *송시열이 자신이 잘못 지은 '삼학사전'과 '정뇌경 묘표문'으로 박로의 후손이 억울하게 오명을 쓰는 것은 불행하며 자신의 실수를 시인한 편지글

심양에서 시강원이 썼던 심양일기[시강원일기]를 살펴보니 박로에 대해 알려진 소문들이 전혀 사실 무근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박로의 후손들이 억울한 오명을 받아서는 안된다고 자신의 과오를 실토하고 있다. ≪宋子大全≫ 권72 <與李擇之>에 자세히 나온다. 하지만 택당 이식의 문집을 편집하면서 박로의 부친인 박이서신도비명에 자신의 글과 다르기에 제자이자 택당의 아들인 외재(畏齋) 이단하(李端夏)에게 비문을 고칠 것을 편지로 요구한다. 하지만 두 집안은 생명의 은인으로 世交하는 사이라 결국 비문을 고칠 수 없었기에 송시열은 박이서의 字인 석오(錫吾)를 서오(叙吾)로 바꿔치기 하여 판각하게 되었다. 이름자를 교묘하게 바꿔 능멸하는 못된 짓을 한 것이다. <비천선생박공신도비명> 책에 자세히 나온다. 
 




▲≪宋子大全≫ 附錄 권16 <朴光一錄> *'문학 박뢰'라는 가공인물 조작 사례

정뇌경의 죽음에 대한 누명은 그의 사후에 더욱 노골적으로 왜곡되어 정쟁이 극에 달한 숙종(肅宗) 때 송시열이 거제도(巨濟島) 유배에서 풀려난 경신년(1680, 숙종6)에 '문학 박뢰[朴뢰(竹+雷)=박로+정뢰경 이름조합]'라는 가상의 간신배를 지어내어 그의 제자 박광일(朴光一)에게 ‘박뢰’가 ‘박로’인양 유포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정치인 송시열은 사약을 받고 죽는다. ≪宋子大全≫ 附錄 권16 <朴光一錄>에 상세히 나온다. 결국 박로의 이름은 사론(士論)에서 완전히 배제되었다. 지금까지도 그에 대한 왜곡된 사실이 유포되고 있으며 그의 학식과 나라를 위한 공로가 폄하되고 있는게 안타깝다. 

박로를 잊지 않고 책으로 남긴 32년 막역지우 동갑친구가 있다. 조선왕조 중기의 한문사대가(漢文四大家)의 한 사람이자 대제학(大提學)을 지낸 택당(澤堂) 이식(李植)은 그의 문집 ≪澤堂集≫에 박로와 주고 받은 시와 글이 40여편이 있으며 그가 지은 박로의 만시(挽詩)에는 친구의 한 많은 일생이 잘 표현되어 있다. 택당은 친구 대호를 그의 문집을 통해 당시의 사실관계를 자세히 기록으로 남겼다면, 반면에 芝峯 이수광(李睟光), 鶴谷 홍서봉(洪瑞鳳), 谿谷 장유(張維), 白洲 이명한(李明漢), 淸陰 김상헌(金尙憲), 寒松 정문익(鄭文翼), 五山 차천로(車天輅) 등 교유했던 당대의 명사들은 그들의 문집에서 박로와 주고받은 시와 글이 누락되거나 혹은 의도적으로 이름을 빼버렸다. 

[참고문헌]仁祖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출처:한국학중앙연구원 역대인물정보, :『심양장계』(심야에서 온 편지) ‘박로’ 각주. 펴낸곳:창비. 서남동양학자료총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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