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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ipziger Buchmesse > LBM 2017 전시도서 > 한금신보(韓琴新譜)[박윤동]

 
한금신보(韓琴新譜)[박윤동]
상품명 : 한금신보(韓琴新譜)[박윤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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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책. 2017 라이프치히 도서전
     
 

家文을 찾아서 : 밀양박씨편①
『≪韓琴新譜≫와 마포 水明亭 이야기』관련문헌



▣原本 書誌

-도서명 : 韓琴新譜
-편저자 : 奎齋 朴胤東[顯宗 14(1673)~英祖 10(1734)][凝川後人]
-간행년 : 景宗4(1724)
-크기 : 29×22.5cm
-판종 : 필사본
-수량 : 1책 54장
-출처 :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도서실

*본 도서는 수명정 5대 승계자이자 ≪韓琴新譜≫(1724)의 편저자 奎齋(규재) 朴胤東(박윤동)[1673~1734] 관련 기록문헌이다.

▣저자 소개

-姓名 : 朴胤東(박윤동)
-字 : 世百
-號 : 奎齋,凝川後人
-本貫 : 密陽
-曾祖 : 朴𥶇[兵曹叅判], 祖 : 朴守玄[成均館司藝], 父 : 朴紳[忠淸監司]
-母 : 宜寧南氏[南斗瞻의 女], 妻 : 慶州崔氏[崔濟의 女]
- 景宗 3(1723) 癸卯 別試 丙科 1位
-官止 : 司憲府掌令
-生沒年 : 顯宗 14(1673)~英祖 10(1734)
-'한금신보'의 편저자. 시와 거문고로 유명. 梁巘(양헌),韓笠(한립)을 師事.

▣영인본 견본


<비단 표지>









▲한금신보 서문


▣해제

≪韓琴新譜(한금신보)≫는 수명정의 5대 승계자 규재 박윤동이 저술한 조선 한양 사대부의 거문고 악보이다.

1724년(경종 4)에 스승 한립의 악보를 얻어 일부 빠진 부분을 보강한 것이다. 조선 후기 거문고 연구에 중요한 문헌이다.



家文을 찾아서 : 밀양박씨편①
『≪韓琴新譜≫와 마포 水明亭 이야기』


▣인물 연구<1> : '응천후인'을 찾아서


≪韓琴新譜≫

韓琴新譜(한금신보). 1966년 한 권의 거문고 악보가 서울대학교에서 '서울서점'의 晉興善(진흥선)씨로부터 입수하여 음악대학 도서관에 소장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얇은 한지에 저자가 직접 붓으로 쓴 筆寫本 책. 이 책의 연구자인 韓明熙(한명희) 교수의 解題가 있다.

1. '凝川後人(응천후인)'이라 밝힌 無名氏가 修撰하였다.
2. 응천후인은 '韓笠(한립)'이라는 琴師로부터 거문고를 익혔다.
3. 편찬년대는 '景宗 4年 甲辰年(1724)'으로 밝혀졌다.
4. 申晟(신성)의 '玄琴新證假令(현금신증가령)' 이후로부터 徐有榘(서유구)의 '遊藝志(유예지)' 이전까지의 거문고 음악 연구에 중요한 악보이다.

≪한금신보≫ 책 말미에 '凝川後人(응천후인)'이 악보를 쓰게 된 사연을 적은 序文이 있다.



<한금신보 序文>

余年少時。居于麻湖水明亭。有志于琴。而不得其師。龍湖有鶴髮老人。姓曰梁名曰巘。
내가 소년시절 마호[마포] 水明亭(수명정)에 거주했다. 거문고에 뜻이 있었으나 스승을 얻지 못했다. 용호에 있는 백발노인이 있는데 성은 梁(양), 이름은 巘(헌)이다.

一日月夜。携琴來訪。余乃請學。師曰琴者禁也。禁其邪心也。君子所當御也。親自製琴敎。…未期年師忽逝焉。
어느날 달뜬 밤에 거문고를 들고 방문하였기에 나는 곧 가르침을 청했다. 스승이 이르기를, '琴은 禁하는 것이다. 사특한 마음을 금하는 것이다. 군자가 마땅히 다뤄야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친히 스스로 거문고를 제조하여 가르쳤다…. 기약한 해가 아닌데 스승은 홀연히 서거했다.

又聞洛下有解音律者。其姓韓者名笠。古以知音擅名
또 洛下[한양 일대]에 音律에 해박한 자가 있는데, 그 성은 韓이라는 者로, 笠[삿갓]이라 불리었다. 예부터 知音하여 이름을 날리던 자이다.

余又邀致再三請學。… 師感余誠。勤敎之以手法。作譜以與之。因以傳得其法。
나도 두 세번 맞이하여 배움을 청했다. 스승이 나의 정성에 감복하여 힘써 手法으로 거문고를 가르쳤다. 악보를 만들어 나에게 주었기에 傳하여 그 법을 얻었다.

이후 내용의 대략은 이렇다.

'中年에 불행히도 喪故가 연이어 닥치자 악보를 廢했다. 老年에 이르러 한가한 일상이 많아져 적적함을 깨고자 다시 重修하려는데 스승은 이미 돌아가셨고 악보도 遺失되었다. 이후 어떤 곳에 스승의 악보가 있다는 것을 듣고 간신히 얻었다. 다시 傳하려는데 유실된 부분이 있어 他譜를 보고 그 빠진 것을 보충하였다. 甲辰(景宗 4, 1724) 正月 壬午(7일)에 凝川後人 某는 序한다'

'韓琴新譜'는 '韓씨 거문고 새 악보'로 '한립류 거문고의 새로운 악보'란 것이다. '凝川後人'은 응천의 후손이란 뜻으로 '凝川'은 '密陽'의 별호로써 '밀양박씨 후손'이라는 것이다.


본 도서전을 준비하며 관련 서적들을 두루 수집하여 살펴본 결과, 응천후인은 수명정의 5대 계승자인 규재 박윤동으로 확인되었다. 그의 行狀에 거문고를 연주하여 부친과 친척들을 즐겁게 모셨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리고 한금신보 서문에 나오는 일련의 喪故에 대한 내용이 그의 가족관계에서 정확히 부합되었다.
보다 확실한 것은 그가 도저동 본가를 계승한 당사자라는 사실이다. 곧 수명정을 이어받아 그곳에서 거주했다는 것이다. 아울러 2013년 '『한금신보』(1724) 편찬자의 음악적 배경'이란 논문을 쓴 최선아 교수를 통해 논문에서 언급된 인물연구가 잘못 되었음을 확인받고 본 연구결과에 동의하였다. 조만간 수정된 논문이 발표되기를 기대한다.
*참고문헌 : 밀양박씨족보, 가장기사, 술선록, 박윤동 행장, 박신 신도비명 등


응천후인이 거주한 ‘麻浦 水明亭’은 泌川(비천) 朴彛叙(박이서)가 400년전에 건립한 정자이다.


응천후인이 어려서 거주하며 거문고를 배웠던 ‘마포 수명정’은 현재 전해지지 않지만, 東州 李敏求(이민구)의 ≪東州集(동주집)≫ <水明亭記> 기문에 1616년 건립되었고 그 위치와 내력을 자세히 알 수 있다.
  
≪東州集≫ ‘수명정기’

“夫以漢濱之勝而三浦專其美。以諸亭擅名而水明亭爲第一焉。則爲主人者必其得之天者全。優淸福保至樂。不數數於當世者之所能得以久專也。始萬曆丙辰歲。吏部左侍郞泌川朴公實刱爲是亭。嗣子兵部左侍郞大瓠公增治垣屋。至其孫奉化君。舍縣紱而歸去之。今三世三十九年。結構日益牢。階庭日益修。基不以傾。業不以隳。豈不難哉。”

한강가의 경치로는 三浦(삼포)가 제일 아름답고 여러 정자들 가운데는 수명정이 제일 아름다우니, 주인이 반드시 자연 경관을 차지한 것은 淸福(청복)이 많고 지극한 즐거움을 누리는 것으로 당세 사람 아무도 자주 누릴 수 있는 바가 아니다. 처음 萬曆 병진년(1616)에 吏部左侍郞(이부좌시랑) 泌川(비천) 朴公(박공)이 이 정자를 창건하고, 嗣子(사자) 兵部左侍郞(병부좌시랑) 大瓠公(대호공)이 증축하고 그 손자 奉化君(봉화군)에 이르러 현감관직을 버리고 돌아오니, 이제 3세 39년이 되었으니 그동안 집 건물이 날로 더욱 튼튼해지고 뜰이 날로 손질되며 기초가 기울지 않았다. 家業(가업)이 허물어지지 않기란 어찌 어려운 일이 아니겠는가?
≪東州集≫ <水明亭記>

수명정은 광해군때 密陽朴氏 중 ‘비천공’과 ‘대호공’이란 분이 있는 집안이다. 살펴보니 고려말 大提學 朴允文(박윤문)의 후손으로서 조선 중종조부터 朝廷에 진출하여 명문가를 이룬 遯溪(돈계) 朴栗(박률)의 아들과 손자의 號(호)이다.


<밀양박씨 돈계 박률 세계도>

1616년(광해군 8) 이조참판 泌川(비천) 朴彛叙(박이서)가 처음 짓고, 그 아들 병조참판 大瓠(대호) 朴𥶇(박로)가 증축하고 그 손자 奉化君(봉화군)에 이르렀으니 3세대 39년이 되었다. 記文을 쓴 년도는 1654년(효종 5)이다. 여기서 ‘봉화군’이란 인물에 논란이 있다. 2013년 최선아 교수가 쓴 ‘『한금신보』(1724) 편찬자의 음악적 배경’이란 논문에서 봉화군을 박이서의 손자가 아닌 증손자 ‘朴緻(박치)’로 특정하여 연구서를 발표하였는데, 여기에 착오가 있어 바로 잡고자 한다.

첫째, 박치가 奉化縣監(봉화현감)을 지낸 경력을 들어 박치를 봉화군으로 단정한 것이 잘못되었다.
≪奉化縣邑誌≫[表題:慶尙道邑誌(1832년)]를 보면 朴緻(박치)는 1697년에 부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記文을 쓴 년도와 43년의 차이가 난다.


≪奉化縣邑誌≫[表題:慶尙道邑誌(1832년)]

朴守素 [順治十八年莅縣...] 1661년(현종 2)    부임
…<중략>…18人   +36년(18x2)  *수령임기 2년
朴緻 1697년(숙종 23)    
…<중략>…3人    +6년(3x2)  
朴泰迪 [康熙 癸未莅縣...] 1703년(숙종 29)    부임

둘째, <수명정기>에는 분명 3세 손자로 기록되어 있는데, 박치는 4세 증손자이며, 박치의 선친인 朴守玄(박수현)이 향 70세로 1674년까지 살았는데, 이유없이 아버지를 건너뛰어 세대를 분석한 것이 잘못되었다.

셋째, ‘현감직을 사직하고 돌아와 家業을 이었다’는 부분에서 박치와 그 후손은 가문에서 가업을 이은 支孫이 아니다.
‘1654년 현감직을 사직하고 돌아온 사람’을 밀양박씨 선조들의 詩文을 기술해 놓은 ≪術先錄≫과 다수의 ≪家藏紀史≫를 찾아보니 박수현의 비문에 그 내력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術先錄≫

通訓大夫 成均館司藝 朴守玄 短碣文

庚寅
경인년(1650)
拜永平縣令 奉板輿榮養
永平縣令을 제수하여 板輿로 어머니를 모셔다가 榮養하였다.
甲午
갑오년(1654)
遞還 邑人立碑頌德…
遞職(체직) 하고 돌아오니 고을 사람들이 頌德碑를 세워 칭송했다.

‘영평현령직에서 교체되어 갑오년(1654)에 돌아오다’. 기문에 나온 년도와 내용이 일치한다. 곧 ‘박이서→박로→박수현’으로 이어지는 3세 39년이 가업의 계보를 있는 자연스럽고 당연한 이해이다. 아울러 기문에 사용된 관직명에는 전통적인 용례가 적용되고 있다. ‘吏部左侍郞’는 고려조때의 명칭으로 이조 참판을 말하고, ‘兵部左侍郞’은 병조 참판을 말한다. 그 맥락에서 奉化君에서 ‘奉化’는 ‘奉敎化’의 준말로 ‘백성을 교화하는 임금의 명을 받든다’는 뜻으로 곧 ‘지방수령’을 통칭하여 표현한 말이고, ‘君’은 ‘김군’, ‘박군’ 부르듯이 손아래 사람을 친근히 부르는 말씨이다. 기문을 쓴 이민구는 박이서의 친구 芝峯 李睟光(이수광)의 둘째 아들로서 박이서의 아들 박로의 친구이다. 이민구가 친구의 아들 박수현에게 친근히 써준 글이다.
위 전승 계보를 확증해줄 자료가 승정원일기에 나온다. 대호 박로가 병자호란 이후 소현세자가 심양에 인질로 잡혀갔을 때 시강원의 세자빈객으로 보필하던 시절의 일이다. 청나라 사신이 서울 도성에 왔을 때 ‘박로의 자식을 뵙고 싶다’고 하자 조정에서 부른 사람이 바로 박수현이다.

 
≪承政院日記≫


仁祖 15년(1637) 11월 23일
○ 李弘望以迎接都監言啓曰, 勅使分付, 招朴𥶇之子, 欲爲相見云, 故敢啓。傳曰, 使之入見。

이홍망이 영접도감의 말로 아뢰기를,
“칙사의 분부에, 朴𥶇(박로)의 아들을 불러서 만나 보려고 한다 하였으므로 감히 아룁니다.”
하니, 들어가 만나 보게 하라고 전교하였다.

仁祖 15년(1637) 11월 23일
○ 金尙以迎接都監言啓曰, 朴𥶇子社稷參奉守玄, 入見英使, 則使鄭命守傳致平安信, 仍示顔厚之色, 歸時當付答書云矣。敢啓。傳曰, 知道

김상이 영접도감의 말로 아뢰기를,
“朴𥶇(박로)의 아들인 社稷署參奉 朴守玄(박수현)이 들어가 사신 영아아대를 만나니, 정명수로 하여금 평안하다는 서신을 전해 주게 하고 이어서 얼굴에 부끄러운 기색을 보였고 돌아갈 때 답서를 부쳐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承政院日記≫

아래 자세히 언급하겠지만 草亭 朴守玄(박수현)은 小北을 대표하는 八文章의 한 분으로 科擧에서 장원급제 하였고 그의 ‘詩’에 대한 對策[과거답안지]은 모음집 ≪執策(집책)≫[미국 버클리대학교 소장]에 실려 있다. 또한 그의 시문집인 ≪草亭先生遺稿(초정선생유고)≫가 전해지고 있다. 박수현은 집안뿐만 아니라 소북을 대표하는 인물로 명망이 높았던 분이다.
다시 정리하면 수명정 1대 창립자는 비천 박이서, 2대 승계자는 대호 박로, 3대 승계자는 초정 박수현이다.

4대 승계자는 박수현의 아들 중 넷째 桃谷 朴紳(박신)이다. 그는 1638년(仁祖 16)부터 1715년(肅宗 41)까지 살았던 분으로 일찍이 대과급제하여 西浦 金萬重(김만중), 畏齋 李端夏(이단하) 등과 함께 성균관 徑書校正官(경서교정관) 직임을 시작으로 예조 좌랑,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 승정원 좌승지, 충청 감사, 안동 부사 등 조정의 내외직을 두루 거쳤다. 그는 고려말 박윤문에서 이어져온 밀양박씨 가문의 족보를 최초로 발간한 사람이다. 그리고 경기도 양주에 있는 先塋(선영)의 묘소를 정비하면서 유실된 비석을 다시 세우는 등 집안의 대소사를 전담한 분이다. 그 때 지었던 시가 전해진다.

宗族契會  [桃谷] 종족의 모임 [도곡]
城南佳會屬今年  성남의 아름다운 모임 금년에 있으니
正値榴花五月天  바로 석류꽃 피는 오월의 날씨를 만났네
爲語宗中諸少長  종중의 여러 젊은이와 어른들에게 말하노니
惇親厚義後孫延  친족의 정의 도타이 하여 후손에게까지 뻗어가세

≪術先錄≫
여기서 말한 城南은 숭례문 밖 桃楮洞(도저동) 本家를 말하는데, 비천 박이서 때부터 世居를 한 곳이다. 박신은 집안의 가업을 이은 後嗣였다는 것이다.

5대 승계자는 奎齋(규재) 朴胤東(박윤동)이다. 우리가 찾던 ≪한금신보≫의 편저자가 되는 분이다. 1673년(顯宗 14)에서 1734년(英祖 10)까지 살았던 분으로 앞에서 살펴본 ≪한금신보≫의 서문에 나오는 단서가 모두 맞아 들어가는 인물이면서 당시 가문의 종사를 도맡아 했던 분이다. 박윤동은 경종때 대과급제하여 사헌부 장령을 지낸 분으로 그의 行狀에 거문고 연주에 대한 내용이 있다.

掌令 朴胤東 行狀 ≪術先錄≫
癸未。四拙公感風痹。公日夜扶護。嘗藥供旨。克殫誠敬。日邀親戚長老。琴歌侑歡。適意養志。人皆稱孝。

계미년(1703)에 사졸공[박신]께서 風病이 나자 공이 밤낮으로 扶護(부호)하면서 약을 맛보고 맛있는 음식을 올리는 등 정성을 다하였다. 날마다 친척과 長老들을 초청하여 거문고를 타며 음식을 권해 즐겁게 보내면서 뜻을 기르도록 하니, 사람들이 모두 그 효성을 칭찬하였다.

이 거문고 美談은 부친 박신의 신도비명에도 나온다.

忠淸道觀察使 朴紳 神道碑銘 ≪術先錄≫
癸未感風痹。杜門屛居。醫治數歲益厭苦口盡去刀圭。語人曰。吾今老矣。何用藥爲。起居飮食。唯當適吾意洞開窓牖。或引盃酌。日與親戚娛樂。又約數三同志倣耆英會。蒼顔華髮掩映罇俎。花朝月夕。輒肩輿相訪。子弟列侍。或以琴歌侑勸。或以詩酒暢淮。暮境淸福寡貳。

계미년 風病에 걸려 문을 닫고 조용히 생활하며… 또 몇 명의 뜻이 맞은 친구들과 耆英會를 조직하여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들이 모여 술을 마시며 즐기고 花朝月夕이면 肩輿를 타고 서로를 방문하면 자제들이 늘어서서 모시며 거문고를 권하기도 하고 혹은 詩酒로 질탕하게 즐겨서 이보다 더한 늘그막의 淸福이 없었다.

박신은 세 아들을 두었는데, 가족들의 생몰년을 살펴보자.

성명 생년 몰년 1724년 생존
朴紳(父) 1638 1715 x
配 慶州崔氏 미상 1706 x
朴祖東 1657 1711 x
配 坡平尹氏 미상 1698 x
配 廣州李氏 미상 1700 x
朴宗東 1664 1724 o
配 宜寧南氏 미상 1734 x
朴胤東 1673 1734 o
配 宜寧南氏 미상 1740 x

≪한금신보≫가 작성된 1724년 생존했던 아들은 둘째 박종동과 셋째 박윤동 두 분이다. 둘째 박종동은 1715년 부친 박신의 喪을 당하자 묘가 있는 양주로 이주했다. 이후 제삿날에만 서울에 있는 집에 갔다. 서울집은 박윤동이 이어받아 祠堂(사당)과 함께 忌祭祀(기제사)를 주관했다.
 

通德郞 朴宗東 墓誌 ≪術先錄≫
丙戌丁崔夫人憂。乙未觀察公捐館挈家眷。移居于觀察公墓下。値喪餘之日。每至京第參祀。翌日卽還。不以他事。復作京洛之行矣

병술년(1706)에 崔夫人의 喪을 당하고 을미년(1715)에는 觀察公께서 세상을 버리자 가족을 이끌고 관찰공 묘소 아래로 이사하여 살면서 제삿날을 당하면 서울로 가 제사에 참석하고 이튿날이면 즉시 돌아와 다른 일로는 더는 서울을 왕래하지 않았다.

결론은 내면, 규재 박윤동이 26세 중년의 나이인 1698년부터 큰 형수 坡平尹氏를 시작으로 연이어 상을 당하고, 부친 박신의 장례를 치룬 이후엔 둘째 형마저 선영이 있는 양주로 이주하였으니 서울의 본가는 박윤동이 이어받아 가업을 이어갔다는 것이 명확해 진다. 아울러 박종동은 후사가 없어 박윤동의 長子인 朴澂(박징)이 繼子로 들어가 代를 이어간다.
박윤동이 가업을 이어 종사를 맡았다는 또 하나의 근거는 수명정의 건립자 박이서의 諡號가 당쟁에 밀려 사후 159년인 1793년(정조 17)에 내려지는데, 그 시호를 받는 延諡(연시) 행사를 박윤동의 장손인 朴道翔(박도상)의 집에서 행해진다. 위와 같은 가문의 학맥과 가업을 일목연하게 엿볼 수 있는 책이 있다. ‘萬姓譜’와 ‘號譜’가 그런 책인데, 그 중 ≪姓號譜彙(성호보휘)≫ ‘朴氏’편을 보면 자세하다.

     
≪姓號譜彙≫

朴栗-朴彛叙-朴𥶇-朴守玄-朴紳○子 胤東….



凝川後人 奎齋 朴胤東(박윤동)의 先代祖 음악관련 관직을 정리해 보면 더 분명하게 心法[家學]과 함께 거문고가 家業으로 전수되었음을 엿볼 수 있다.
 관계  성명  號/諡號  생몰년  관직명
 五代祖  朴栗  遯溪  1520(中宗 15)~1569(宣祖 02)  禮曹 佐郞
 成均館 司藝
 司憲府 掌令
 高祖父  朴彛叙  泌川/忠簡  1561(明宗 16)~1621(光海 13)  禮曹 佐郞
 掌樂院 僉正
 吏曹 叅判
 曾祖父  朴𥶇  大瓠/文獻()  1584(宣祖 17)~1643(仁祖 21)  成均館 司藝
 掌樂院 正
 兵曹 叅判
 祖父  朴守玄  草亭  1605(宣祖 38)~1674(顯宗 15)  禮曹 佐郞
 成均館 司藝
 父  朴紳  桃谷  1638(仁祖 16)~1715(肅宗 41)  禮曹 佐郞
 禮曹 參議
 忠淸 監司
   朴胤東  奎齋,凝川後人  1673(顯宗 14)~1734(英祖 10)  司憲府 掌令


여섯 분의 묘소는 현재 경기도 양주시 선영에 함께 모셔져 있고, 매년 鼻巖齋(비암재) 재실에서 시향을 받들고 있다.

 
<鼻巖齋> 밀양박씨 양주 先塋


▣인물 연구<2> : 고려말 大提學 朴允文(박윤문)과 朴密陽(박밀양),大陽(대양),紹陽(소양),三陽(삼양),啓陽(계양) 5형제


5인의 수명정 주인들, 그들의 心法[家學]은 고려말 대제학 朴允文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야기에 앞서 숙지해야 할 점이 하나 있다. 밀양박씨 중 돈계 박률의 후손은 가문의 後嗣를 ‘嫡長子(적장자)’ 승계가 아닌 ‘適合子(적합자)’ 승계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家學의 뿌리가 고려말부터 시작한다. 新儒學이 등장하던 고려말 충렬왕때 稼亭 李穀(이곡)의 대제학 후배인 朴允文(박윤문)에서 시작되어 密陽(밀양), 大陽(대양), 三陽(삼양), 啓陽(계양) 등 네 아들이 대과 급제하면서 家學의 근원을 다지게 된다.

  
≪東文選≫

丹陽翠雲樓[朴允文]  단양 취운루[박윤문]
奉使關東一上樓  관동에 봉사했다가 이 누각에 오르니
松陰十里最深幽  10리 솔 그늘이 가장 깊고 그윽하네
蔭程老樹童童立  길을 덮은 노목들은 오똑오똑 서 있고
遶郭長江袞袞流  성을 두른 긴 강은 늠실늠실 흐르네
橫麓斷煙迷犢臥  산 밑 비낀 연기 속에 길 잃은 송아지가 누웠고
滿軒涼吹勸人留  난간에 가득한 서늘 바람은 가는 사람 만류하네
此行未暇登臨賞  행색이 총총하여 구경할 여가 없으니
他月重來載酒遊  다른 날 거듭 오거든 술 싣고 노닐리라

수명정의 건립자 박이서의 직계는 둘째 대양의 후손이다. 아버지 ‘寶文閣 大提學’에서 둘째 아들 ‘進賢館 大提學’으로 이어갔다. 네 아들은 益齋 李齊賢(이제현), 牧隱 李穡(이색), 圃隱 鄭夢周(정몽주), 陶隱 李崇仁(이숭인), 冶隱 吉再(길재), 陽村 權近(권근), 獨谷 成石璘(성석린) 등과 깊은 친분을 맺어 그들의 문집들과 ≪東文選(동문선)≫에 다수의 詩와 글이 전해지고 있다.

      
≪稼亭先生文集≫ 가정 이곡(李穀, 1298-1351) *박윤문의 대제학 선배

<益齋先生畫像> 元나라에서 忠宣王을 모시던 33세때 李齊賢 *박대양의 경연 선배

≪益齋亂藁≫ 익재 이제현(李齊賢, 1287-1367) *박대양의 경연 선배

<牧隱先生畫像> 목은 이색(李穡, 1328-1396) *박윤문 및 박밀양[린],대양,소양,삼양,계양[개명 돈지] 5형제와 교유

≪牧隱藁≫ *박윤문 및 박밀양[린],대양,소양,삼양,계양[개명 돈지] 5형제와 교유


<圃隱先生畫像> 포은 정몽주(鄭夢周, 1337~1392) *박계양[개명 돈지]의 과거 동방

≪圃隱先生集≫ *박윤문 처 해양군대부인김씨묘지명 찬술 *松隱 박익(朴翊)과 교유


≪陽村先生文集≫ 양촌 권근(權近, 1352~1409) *박계양[개명 돈지]의 후배

조선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소수서원]의 건립 과정을 기록한 ≪竹溪誌(죽계지)≫에 명문가로 박윤문과 네 아들의 미담이 기록되어 있다.
    
≪竹溪誌≫ 周世鵬(주세붕) 編 *4형제 대과급제 : 밀양, 대양, 삼양, 계양

賀竹溪安氏三子登科詩序[李穡]

予惟光廟設科之後。至于令未嘗罷。而父子兄弟聯中者。夫豈少哉。吾病也。不能博考。子其訪之古老。求之史氏。錄之以來。吾將爲子序之。未幾。安氏又來曰。吾不敢遠稽諸古。爰自忠烈王以後。得上黨韓中贊公而下十六家耳。雖多何益。願先生之敎焉。予曰。宰相金覲有子三人登科。曰富佾。曰富軾。曰富儀。是已。…<중략>… 密城朴氏。曰密陽。曰大陽。曰三陽。曰季陽。…<중략>… 昌寧成氏。曰石璘。曰石瑢。曰石珚。…<중략>…

죽계안씨 세 아들의 등과 축하시 서문[이곡]
나는 말하기를, “光宗이 과거를 창설한 이래로 지금까지 한번도 파한 적이 없었으니, 부자나 형제가 내리 과거에 오른 자가 어찌 적겠는가. 나는 병이 들어서 넓게 상고를 못했으니, 그대는 옛 늙은이에게 물어보고 史家에게 구득해서 기록해 오라. 나는 장차 그대를 위하여 서를 하겠다.” 하였다.
그후 며칠이 못 되어서 안씨가 또 와서 말하기를, “나는 감히 멀리 옛일까지는 상고하지 못 하고, 우선 충렬왕으로부터 上黨 韓中贊公(한 중찬공) 이하 열여섯 집을 구하였습니다. 비록 많은들 무슨 도움이 있겠습니까? 원하건대 선생은 가르쳐주소서.” 하므로, 나는 이르기를,
“재상 金覲(김근)의 아들 삼 형제가 과거에 올랐으니 富佾(부일)ㆍ富軾(부식)ㆍ富儀(부의)가 바로 그 사람들이요, …<중략>… 밀성 박씨에 密陽(밀양)ㆍ大陽(대양)ㆍ三陽(삼양)ㆍ季陽(계양) 사 형제 …<중략>… 창녕 성씨에 石璘(석린)ㆍ石瑢(석용)ㆍ石珚(석인) 삼 형제 …<중략>… 가 있다.” 하였다.

응천후인, 박윤동의 직계 선대는 조선이 개국하자 정몽주와 함께 後日을 기약하며 은거하다가 조선 중종(中宗) 때부터 靜庵 趙光祖(조광조)에 의해 士林이 대거 등용될 때 수명정의 건립자 박이서의 부친, 돈계 박률이 출사하면서 조선의 조정에 이름을 올리며 밀양박씨 제일의 명문가로 커가게 된다. 정조(正祖) 때 북학(北學)의 대학자였던 초정(楚亭) 박제가(朴齊家)도 그 후손이다.


≪貞蕤閣集≫ 楚亭 朴齊家(1750~1805) *박윤문의 15세손 *박률의 7세손


▣인물 연구<8> : 奎齋(규재) 朴胤東(박윤동)

≪韓琴新譜≫의 저자, 奎齋 朴胤東(박윤동)에게 거문고는 좌우명이었다.

朴胤東[1673(顯宗 14)~1734(英祖 10) 향 62歲]의 字는 世百(세백), 號는 奎齋(규재)이며 ≪한금신보≫의 편저자이다.


琴者禁也。禁止於邪以正人心也。 琴은 禁하는 것이다. 사특함을 금지함로써 사람의 마음이 바로잡힌다.
琴者樂之統也故君子所當御也。 거문고가 음악을 통섭하기에 군자가 마땅히 다뤄야하는 것이다.

≪한금신보≫ 첫장 첫구절에 나오는 말이다. 그의 청춘은 서인과 남인의 세 차례 '환국정치'로 숙청의 시대였다. 엄숙할 '肅', 肅宗의 시대였다. 그 속에서 사는 법은 禁하는 것이다. 잘못 나서면 다친다는 것이다. 거문고는 그에게 울분을 참아내는 탈출구이자 마음을 다잡는 좌우명이었다.
이 책에서 선비가 거문고를 연주하는데 다섯 가지 금기사항을 언급했다.

五不彈[出萬寶全書] 다섯 가지 거문고를 타지 않을 때. ≪萬寶全書≫에 나온다.
疾風雨不彈 거세게 바람 불거나 비 올 때, 거문고를 타지 않는다. 
塵中不彈 紅塵[어지러운 세상]일 때, 거문고를 타지 않는다.
對俗子不彈 속된 자를 대할 때, 거문고를 타지 않는다.
不坐不彈 앉지 못할 때, 거문고를 타지 않는다.
不衣冠不彈 의관을 갖추지 못할 때, 거문고를 타지 않는다. 

박윤동에게 기회가 왔다. 새로운 임금, 景宗(경종)이 등극하면서 출사길이 열렸다. 17세 때 漢城試에서 봄, 가을 연달아 합격하며 집안의 기대를 모았다. 이후 10번이나 과거를 보았으나 서인들이 주관하는 會試에서 낙방하였다. 3년씩 열번이니 30년의 세월이다. 경종 3년(1723), 소론들이 정국을 잡았을 때 마침내 別試에 합격하였다.
  
≪科表集抄[可覽]≫ 朴胤東(51세) 三下

51세 나이로 급제하여 이듬해 사헌부 지평에 올랐으나 자신을 알아봐 준 임금이 지병으로 그해 승하를 하고 말았다. 30년을 기다려 찾은 꿈이 1년만에 끝나버린 것이다. 어쩌면 야속할 수도 있는 主君에게 마지막 송별사를 올렸다. 이것이 문제였다. 만사의 한 구절이 英祖(영조)를 등극시킨 노론의 政敵들에게 먹잇감이 되었다. 곧바로 파직시키고 國葬(국장) 기간동안 정국을 장악하는 좋은 소재된 것이다.

  
≪英祖實錄≫

英祖 卽位年 11월 27일
○敎曰 撰進輓章, 事體至重, 今觀副司直朴胤東所進輓詞, 則危塗閱歷千層浪, 黼座依俙一夢場一句, 語殊不審愼, 從重推考, 使之改進。 

하교하기를,
"輓章(만장)을 撰進하는 것은 事體가 지극히 무거운데, 지금 副司直 朴胤東(박윤동)이 올린 輓詞를 보건대, '위험한 길에서 천 겹의 파도를 겪었고[危塗閱歷千層浪], 黼座(보좌)는 한바탕 꿈속에 희미했네[黼座依佈一夢場]'란 한 구절은 매우 신중을 기하지 아니하였으니, 종중 추고(從重推考)하라."
하고, 고쳐 올리라고 하였다.
≪英祖實錄≫

'從重推考'. 엄중이 따져 물고를 내라는 말이다. 만사를 수정하여 다시 올린 것이 ≪景宗國葬都監儀軌(경종국장도감의궤)≫(1724)에 실려있다.

  

≪景宗國葬都監儀軌≫(1724) 挽詞 行副司直 朴胤東(52세)

行副司直 朴胤東

天祐吾邦寶曆綿。篤生神哲應千年。喤喤已占符昌聖。嶷嶷仍知邁啓賢。
明德盡心襁褓養。文皇遇物訓箴宣。躬持百行人無間。運履多艱德不愆。
三紀元良仁聞洽。四年參決聖功全。文王有子無憂者。大舜何人願學焉。
禮樂豈亶承令緖。誠明元自授眞詮。風霆半夜消虹孛。日月中天次度躔。
高拱穆淸如帝坐。旁馳風化若郵傳。淵泓不測千尋海。嵬蕩無名一大天。
便殿夜闌看牘奏。講帷秋早對箱編。薰琴遞與塤箎和。黼扆仍幷枕被聯。
千歲白雲方祝聖。一朝金鼎遽昇仙。欄花天上巡遊遠。階莢人間節序遷。
曉葆凄涼行有日。宵衣寂寞覿無緣。如傷惠入嬴癃厚。若喪情敎婦孺偏。
尺地瞻天曾儼若。寸心傾日自油然。生成有力恩侔海。報答無階淚徹泉。
怳愡有時驚夢寐。怦營謾自索筵篿。揄揚盛德臣何敢。慚愧詞場筆似椽。


行副司直 朴胤東 행부사직 박윤동
天祐吾邦寶曆綿 하늘이 도와 우리 나라 보력이 이어지니
篤生神哲應千年 독생하여 신령이 밝아 천년동안 응하리.
喤喤已占符昌聖 엉엉 울며 이미 부절을 잡고 성군을 불러봐도
嶷嶷仍知邁啓賢 높이 높이 올라갔음을 알고 어진 임금께 아룁니다. 
…<중략>…
生成有力恩侔海 나서 자라 세력을 가졌으니 성은이 하해와 같은데
報答無階淚徹泉 제 보답은 관직없는 처지니 흐르는 눈물은 샘과 같습니다.
…<중략>…
揄揚盛德臣何敢 신이 어찌 감히 성덕을 기려 드러내겠습니까?
慚愧詞場筆似椽 부끄럽게 만사를 쓰니, 붓이 서까래 만해졌습니다.
≪景宗國葬都監儀軌≫

≪한금신보≫가 이 해에 쓰여진 것이다. '만사 파동'으로 아들의 출사가 완전 차단되었다. 박률로부터 끊김없이 이어지던 과거 급제의 명맥이 처음 끊기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어린 英祖(영조)를 앞에 두고 노론과 소론의 싸움은 점입가경이었다. 끝내 사단이 났다. 무신년(영조 4, 1728)에 소론의 강경파 이인좌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 때 박윤동은 반란 진압에 참여하며 공신에 책봉되었다. '奮武原從功臣' 二等에 錄勳되었다. 그 때 관직은 文官에게 녹봉만 주고 實職은 없는 일종의 대기발령 상태인 武官職인 副司果(부사과)였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사헌부 장령으로 복직이 되었지만 자식들의 출사는 끝내 막히고 말았다.

  
≪奮武原從功臣錄券(분무원종공신록권)≫(1728) 副司果 朴胤東(56세)

40년후, 영조의 탕평책이 자리잡아 가면서 똑똑한 손자 朴道翔(박도상), 朴道仁(박도인), 朴道天(박도천)이 연거푸 대과에 급제하였다.

英祖 44년 9월 17일
○檢閱權禛上疏, 言奉敎朴道仁祖胤東, 負犯非尋常, 不可與作僚, 命給其章, 削其官。 敎曰 "朴胤東若名在丹書, 予何調用其孫? 今禛欲揚其祖之忠, 陷道仁於陷穽, 此道一開, 豈有完人?" 蓋禛疏盛稱其祖忭名節, 謂與道仁同列, 將不免爲先祖罪人, 故上敎及之。

檢閱 權禛(권지)이 상소하여, '奉敎 朴道仁(박도인)의 祖父 朴胤東(박윤동)은 죄를 지은 것이 예사롭지 않으니 함께 同僚(동료)가 될 수 없다.'고 말하였는데, 그 글을 돌려 주고 그의 관직을 삭탈하라고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박윤동의 이름이 만약 丹書[죄를 붉은 글씨로 쓴 刑書]에 있다면 내가 어찌 그 손자를 調用(조용)하겠는가? 이제 권진이 그 祖父의 忠을 드러내려고 하여 박도인을 함정에 빠뜨리니, 이 길이 한 번 열리면 어찌 완전한 사람이 있겠는가?"
하였다. 대저 권진이 그 조부 權忭(권변)의 名節[명분과 절개]를 훌륭하게 일컬으면서, '박도인과 班列(반열)을 같이 하면 장차 先祖의 죄인이 되는 것을 면하지 못한다.'고 말하였기 때문에 임금의 하교가 여기에 미쳤다.
≪英祖實錄≫

정조때 규장각검서관 李德懋(이덕무)의 ≪靑莊館全書(청장관전서)≫ 嬰處雜稿○戊寅篇에 수명정에서 머물렀다는 내용이 있다.


≪靑莊館全書≫

嬰處雜稿○戊寅篇
戊寅篇者。志歲也。是年冬。寓居于三湖之水明亭。有著書。自砭者數十條。

戊寅篇이란 歲時를 기록한 것이다. 그해(영조 34, 1758) 겨울에 三湖의 水明亭(수명정)에 寓居하면서 글을 지어 스스로 경계[針石]로 삼은 것이 수십 조였다.

이덕무의 아들이 쓴 그의 년보를 보면 1752년에 수명정은 반남박씨 외숙 박순원의 집으로 나온다.

先考積城縣監府君年譜上
壬申。公十二歲。 ○ 月日未詳。寓麻湖內舅朴公 淳源 第。
戊寅。公十八歲。 冬。月日未詳。寓麻湖水明亭。
임신년(영조 28, 1752) 공 12세 ○ 월일 미상 麻湖에 있는 외숙 박공 淳源(순원) 댁에 寓居하였다. 
무인년(영조 34, 1758) 공 18세 겨울 월일 미상 麻湖의 水明亭(수명정)에 우거하였다.
≪靑莊館全書≫

이덕무는 사소한 것까지 기록으로 남겼던 사람으로 그의 동료 楚亭 朴齊家(박제가)도 기록습관이 남다른 사람이다. 박제가는 박률의 7대손으로 박윤동과는 가까운 지손관계이다. 수명정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면 그의 글 어딘가에는 있을 듯한데, ≪貞蕤閣集(정유각집)≫에는 이덕무가 머물었다는 수명정 이야기가 없다. 집안의 先代祖인 대호 박로가 심양사건으로 누명을 쓴 일이 정조때에도 반복되는 것을 한탄하는 시가 있다.

  
≪貞蕤閣集≫

瀋陽襍絶
耶里河邊烏㹀呼。瀋陽城外白浮圖。夜來風雨黃泥滑。愁殺行人十里湖。
十里河。土人訛稱十里湖。此站最多泥潦。

凄風闌雨最高峰。靑石悲歌說孝宗。太息紹興都冷了。卽今冠盖日相逢。
四庫新書搨聚珍。閣成文溯應文津。祝公恰共翁公住。不識行人是故人。
翁侍郞方綱爲校正文溯閣四庫書。今夏來瀋陽。芷塘祝公德麟同來。計其日子。正度瀋時也。

明駝卧處喇嘛僧。玉壐卥來異敎興。寺裡雲松平似剪。靑山一髮見昭陵。
吾家瓠老早蜚英。京輔曾馳趙尹名。三入瀋陽勞更茂。浮言枉著鄭䨓卿。
澤堂贈大瓠詩。有京輔子能追趙尹。侍臣吾已謝終徐之句。公時畿伯也。

西門車馬漲黃塵。市井繁華隔世新。何處寒烟埋碧血。此間無地弔三臣。
曾明羅李難明案。復證三臣致命辰。我愛新書如好色。時人還笑入燕頻。
羅德憲李廓見全韻詩。余於戊戌見之。洪翼漢三學士死節事。見開國方略中。


심양잡절
…<중략>…
吾家瓠老早蜚英 우리 집안 대호자는 진작부터 영특하여 
京輔曾馳趙尹名 한성의 판윤 되어 조윤 이름 뒤쫓았네.
三入瀋陽勞更茂 세 번이나 심양에 와 나라 위해 애썼는데
浮言枉著鄭䨓卿 세상 뜬말 그릇되어 정뇌경만 드러나네.
澤堂贈大瓠詩。有京輔子能追趙尹。侍臣吾已謝終徐之句。公時畿伯也。
택당이 대호에게 준 시에 “경보 벼슬 그대는 조윤을 따르지만, 시신은 나는 이미 종서를 사양했네”라는 한 구절이 있다. 공은 당시 경기도 관찰사였다.
 
…<중략>…

1758년 이후로는 수명정에 대한 기록이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수명정의 다섯 주인들’, 그들에게 수명정은 전별, 만남, 은둔, 연회, 수련 및 공연의 장소였다.

지금까지 살펴본 ≪한금신보≫와 ‘수명정’에 대한 이야기를 정리해보면 1616년 박이서가 지어 108년후인 1724년 5대손 박윤동이 ≪한금신보≫를 기록할 때까지 밀양박씨의 家業으로 이어져 오다 1752년 소유권이 이전 되었다는 것이다.

≪한금신보≫와 수명정의 내력을 추적해 가다 보면, 한 집안의 五代에 걸친 사연과 마주치게 된다. 수명정은 박이서, 박로 두 부자가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비 논쟁으로 혼탁한 조정에서 물러나 ‘더러운 자취를 남기지 않겠다’는 뜻으로 두보(杜甫)의 시에서 ‘물가에 밝게 비추다’란 뜻의 ‘수명(水明)’이란 시구를 취해 한강이 비치는 곳에 세운 정자였다. 당대 명사(名士)들이 찾던 마포 제일의 사교의 장소였다.

주요 방문객으로 一松 沈喜壽(심희수), 仙源 金尙容(김상용), 竹窓 李德泂(이덕형), 愚伏 鄭經世(정경세), 月沙 李廷龜(이정구), 滄洲 尹知敬(윤지경), 石樓 李慶全(이경전), 澤堂 李植(이식), 汾西 朴瀰(박미), 東州 李敏求(이민구), 疎庵 任叔英(임숙영), 谿谷 張維(장유), 雪峯 姜栢年(강백년), 竹堂 申濡(신유), 白湖 尹鑴(윤휴), 恬軒 任相元(임상원), 白閣 姜鋧(강현), 松谷 李瑞雨(이서우), 星湖 李瀷(이익), 西坡 吳道一(오도일), 三淵 金昌翕(김창흡) 등이 그들이다.

수명정은 한 집안의 역사와 궤를 같이하면서, 여기 살았던 역대 다섯 주인들에게 각별한 의미를 담은 장소였다.
1대 朴彛叙(박이서)는 소북을 대표하는 칠학사(七學士)의 한 분으로 명나라 사행길에 목숨을 잃은 충신(忠臣)이었다. 시호가 충간(忠簡)이다. 박이서에게 수명정은 외지(外地)로, 사지(死地)로 떠나면서 친구들과 이별했던 ‘전별의 장소’였다.
2대 朴𥶇(박로)는 병자호란(丙子胡亂)때 인조(仁祖)의 유일한 對淸外交(대청 외교) 사신이자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스승이었다. 시호가 문헌(文獻)이다. 박로에게 수명정은 볼모지 심양에서 돌아와 친구들과 회포를 푸는 ‘만남의 장소’였다.
3대 朴守玄(박수현)은 천재 시인이자 학자이면서 부친의 누명으로 출사길이 막혔던 한 많은 성균관 거문고 선생이었다. 박수현에게 수명정은 정적들로부터 자신을 숨기는 ‘은둔의 장소’였다.
4대 朴紳(박신)은 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과 함께 성균관 경서교정관(經書校正官)이었으며 유가(儒家) 경전을 바로잡듯 가문을 바로 세운 분이다. 박신에게 수명정은 종친들과 벗들을 초대하여 친목을 다지던 ‘연회의 장소’였다.
5대 朴胤東(박윤동)은 엄혹한 정쟁(政爭)의 시대에서 가문과 자신을 지키며 수양하던 한양 사대부의 대표 선비였다. 박윤동에게 수명정은 거문고 명인들을 초대하여 배우고 연주하던 ‘수련의 장소’이자 ‘공연의 장소’였다.
 
공자가 거문고를 배울 때의 故事로 글을 맺고자 한다.


≪萬古際會圖像≫ 孔子 像

孔子學鼓琴師襄子。十日不進。
師襄子曰。可以益矣。
孔子曰。丘已習其曲矣。未得其數也。
有閒曰。已習其數。可以益矣。
孔子曰。丘未得其志也。
有閒曰。已習其志。可以益矣。
孔子曰。丘未得其爲人也。
有閒(曰)。有所穆然深思焉。有所怡然高望而遠志焉。
曰丘得其爲人。黯然而黒。幾然而長。眼如望羊。如王四国。非文王其誰能爲此也。
師襄子辟席再拜曰。師蓋云文王操也。

孔子가 師襄子로부터 거문고 연주를 배웠는데, 열흘이 지나도록 진도가 없었다.
사양자 이르기를, “앞으로 나아가도 되겠다.”
공자가 이르기를, “丘는 이미 그 곡조를 익혔습니다. 아직 그 기술을 얻지 못했습니다.”
얼마 뒤 이르기를, “이미 기술을 익혔으니 앞으로 나아가도 되겠다.”
공자가 이르기를, “구는 그 뜻을 얻지 못했습니다.”
얼마 뒤 이르기를, “이미 그 뜻을 익혔으니 앞으로 나아가도 되겠다.”
공자가 이르기를, “구는 아직 그 사람을 모르겠습니다.”
얼마 뒤, 공자는 경건히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편안히 높이 응시하며 멀리 향하고 있었다.
이르기를, “丘는 그 사람을 알겠습니다. 얼굴이 검고, 키가 크고 바라보는 눈빛이 천하의 왕 같으니, 文王이 아니고서야 그 누가 이러하리오.”
사양자가 자리를 피하고 절하며 이르기를, “스승께서 文王操라고 하였습니다.”

≪史記≫ <孔子世家>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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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𥶇 著, 成百曉•吳和銖•趙洙翼•趙東永 譯. 『국역 大瓠先生遺稿』. 서울: 密陽朴氏泌川公, 大瓠公派宗中 編․뿌리정보미디어, 2011.
朴守玄 著, 成百曉•吳和銖•趙洙翼•趙東永 譯. 『국역 草亭先生遺稿』. 서울: 密陽朴氏泌川公, 大瓠公派宗中 編, 2011.
朴義會 편저, 趙洙翼•成百曉 譯. 『국역 述先錄』. 서울: 密陽朴氏泌川公, 大瓠公, 都事公派宗中 編․뿌리정보미디어,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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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규장각의궤(국립중앙박물관) http://uigwe.museum.go.kr/
장서각디지털아카이브(한국학중앙연구원) http://yoksa.aks.ac.kr/
국회도서관 http://www.nanet.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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