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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ipziger Buchmesse > LBM 2017 전시도서 > 진영수어(震英粹語)[박률]

 
진영수어(震英粹語)[박률]
상품명 : 진영수어(震英粹語)[박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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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권, 2017 라이프치히 도서전
     
 

家文을 찾아서 : 밀양박씨편①
『≪韓琴新譜≫와 마포 水明亭 이야기』관련문헌



▣原本 書誌

-도서명 : 震英粹語
-편저자 : 金馹孫, 盧守愼, 朴栗, 李珥 等著
-판본사항 : 訓鍊都監字 활자본
-책권수 : 上卷(下卷 零本)
-간행연도 : [刊年未詳]
-책크기 : 31.1×19.6cm, 匡郭 : 四周雙邊, 半葉匡郭:24.7×15.8cm, 9行 17字, 版心 : 上下內向細花紋魚尾
-소장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자료소개 : 16세기 유생들의 論, 策 등을 모은 책

*본 도서는 수명정 1대 건립자 비천 박이서의 부친 遯溪(돈계) 朴栗(박률)[1520~1569] 관련 기록문헌이다.

≪진영수어≫는 16세기 사림을 대표하는 학자들의 과거시험 답안지[對策]를 모은 책으로 박률의 대책문이 2개 실려 있다.
탁영 김일손, 소재 노수신, 율곡 이이와 어깨를 나란히 했던 사림의 대학자이다. 조선시대 밀양박씨 가문의 心法[家學]이
그로부터 확립되어 후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영인본 견본

<비단 표지>

▲율곡 이이의 이름자를 휘한 것으로 보아 율곡의 후학이 소장했던 책으로 보인다.



▲돈계 박률의 <征伐和親(정벌화친)> 대책문

▲율곡 이이의 <天道(천도)> 대책문

▣해제

≪震英粹語≫는 16세기 사림을 대표하는 학자들의 과거시험 답안지[對策]를 모은 책이다.
수명정의 1대 창립자 비천 박이서의 부친 돈계 박률의 대책문이 2개 실려 있다. 탁영 김일손, 소재 노수신, 율곡 이이와 어깨를 나란히 했던 사림의 대학자이다.

序‚ 목록‚ 跋이 없어 편찬동기와 연대를 알 수 없으나‚ 제목으로 보면 ‘우리나라(=震域) 英才들의 뛰어난 말’을 편집한 책임을 알 수 있다. 본문의 중요한 곳에는 批點을 쳤으며‚ 問의 첫머리나 답의 중요한 부분에는 欄의 상단에 요점을 필사하였다.
속지에 수기된 목록을 보면 이이의 이름 휘하고 '율곡'으로 표기한 것으로 보아 율곡의 후학이 소장했던 책으로 여겨진다.
본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上卷
 

科題

著者

내용

中興

金馹孫(김일손)

濯纓(탁영)

中興之主의 역할에 대한 답

1b

1464(세조 10)1498(연산군 4)

君子相與

盧守愼(노수신)

蘇齋(소재)

동시대의 군자가 서로 용납치 못하는 까닭에 대한 답

11a

1515(중종 10)1590(선조 23)

征伐和親

朴栗(박률)

遯溪(돈계)

오랑캐를 대하는 방책인 정벌과 화친에 대한 답

16b

1520(중종 15)1569(선조 2)

士氣士習

朴栗(박률)

遯溪(돈계)

士氣를 배양하는 일과 士習을 바르게 하는 방도에 대한 답

22a

梁應鼎(양응정)

松川(송천)

뜻을 이룬 前世의 인물들에 대한 답

29b

1519(중종 14)1581(선조 14)

恬退

金慶雲(김경운)

 

恬退에 대한 답

35a

?∼1624(인조 2)

天道

李珥(이이)

栗谷(율곡)

天道에 대한 답

42a

1536(중종 31)1584(선조 17)

盜賊

李珥(이이)

栗谷(율곡)

制治의 道에 대한 답

51a

文經武緯

李珥(이이)

栗谷(율곡)

文武 調用에 대한 답

60b

文武全才

徐崦(서엄)

春軒(춘헌)

文武를 겸비하는 물음에 대한 답

68a

1529(중종 24)1573(선조 6)

 


≪震英粹語(진영수어)

策問(책문)[1] 1 : 征伐和親(정벌화친)

朴栗(박률)

() :

왕자(王者)가 이적(夷狄)을 대하는 것은 정벌(征伐)과 화친(和親) 두 가지 방법일 뿐이다. 옛일에서 상고하자면 황제(黃帝)에 있어서 치우(蚩尤)[2]와 주선왕(周宣王)에 있어서 험윤()[3], 한광무(漢光武)에 있어 교지(交趾)[4], 당태종(唐太宗)에 있어서 돌궐(突厥)[5]은 모두 정벌을 해서 흥성(興盛)하고 주목왕(周穆王)에 있어서 견융(犬戎)[6], 진시황(秦始皇)에 있어서 흉노(匈奴), 남송(南宋)에 있어서 금원(金元)[7]은 모두 정벌을 하다 쇠망(衰亡)하게 되었다. 태왕(太王)에 있어서 훈육()[8], 문왕(文王)에 있어서 곤이(昆夷), 한고조(漢高祖)에 있어서 흉노(匈奴), 송진종(宋眞宗)에 있어서 거란(契丹)은 모두 화친하여 정치가 다스려졌으며 진무제(晉武帝)에 있어서 강호(羌胡), 당덕종(唐德宗)에 있어서 토번(吐藩), 송나라 흠종(欽宗)과 휘종(徽宗)[9]에 있어서 여진(女眞)은 모두 화친하다가 정치가 어지럽게 되었다. 정벌한 것은 같은데 흥쇠(興衰)가 다르고 화친도 마찬가지인데 치란(治亂)이 같지 않음은 왜인가? 대개 정벌하는 자는 화친함이 나라를 욕되게 한다고 여겨서요 화친한 자는 정벌을 하는 것이 틈을 여는 단서가 된다고 여겨서인데 어떻게 해야 이적(夷狄)을 제대로 잘 대우하여 나라를 욕되지 않게 하고 틈을 여는 근심이 없겠는가?

 

() :

저는 듣건대 외적을 물리는 방법은 덕()을 닦는 것만한 것이 없다고 합니다. 환난(患難)을 방지함은 오직 형세를 살피는데 달려 있으니, 참으로 형세를 잘 살핀다면 이적(夷狄)을 대우함에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지금 집사(執事) 선생(先生)께서 크게 잘 다스려지는 오늘날을 당해서 음우(陰雨)의 경계[10]를 방비하느라 특별히 역대(歷代)의 화친과 정벌 가운데 같고 다른 경우를 열거하여 제생(諸生)들이 어떻게 적용하는가를 보고자 하시니, 제가 비록 불민(不敏)하지만 어찌 드릴 말씀이 없겠습니까?

 

삼가 생각하건대, 중국에 나라가 있은 이래 이적을 제 방도로 대우하면 덕()에 복종하여 내부(來附)하여 감히 사단을 부리지 못하고, 제 방도로 하지 못하면 제멋대로 날뛰어 위엄 잃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옛날 제왕(帝王)들은 이적들이 중국의 근심거리가 되는 것을 걱정하지 않고 오직 이적을 제방도로 대우하지 못할까를 걱정하여 내가 널리 덕을 입히지 못할까를 근심하고, 저들이 함부로 범하지 못할 분수를 확실히 하여 오면 예()로써 대접하여 거절하지 않고, 가면 위엄을 보여서 친화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저들이 탐욕을 부려 요구함이 끝이 없더라도 가벼이 응대하지 말고 반드시 자세히 살핀 후에 처리하며 그러다가 저들에게 용서하지 못할 큰 죄가 있은 연후에 반드시 군사를 일으켜 토벌하며, 우리에게 화친할 만한 단서기 있으면 반드시 은혜를 보여 화친을 맺어 변방을 안정시켜 나라가 오래 잘 다스려지게 한다면 어찌 비단 이적을 잘 다스리는 것뿐이겠습니까? 그렇다면 때로는 정벌해야 하는데도 망령되이 화의(和議)를 제기하여 약함을 보이는 것도 불가하고, 급히 내정(內政)을 닦고 처한 형세를 살핀 연후에 정벌하는 자는 이적을 물리치는 방도를 제대로 하는 것으로 그들과 틈을 여는 지경에 이르지 않게 됩니다.

 

화친(和親)이란 군사를 쉬게 하는 뜻이 있고 나라를 욕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니, 또 어찌 나라가 어지럽거나 망하는 것을 어찌 걱정하겠으며 군사를 쉬자는 뜻이 있고 나라를 욕되지 않게 하는데 또 어찌 나라가 어지러워지고 망하는 것을 족히 걱정하겠습니까? 청컨대 질문을 인하여 아뢰겠습니다.

 

치우(蚩尤)[11]가 난리를 일으키자 지남거(指南車)[12]를 앞세운 군사가 출정하고, 험윤()이 역량을 헤아리지 않고 침범해오자 유월의 군사를 일으키켰고, 교지(交趾)가 명령을 거역하자 광무제(光武帝)가 토벌하였으며 돌궐(突厥)이 강력함을 믿고 날뛰자 당태종이 정벌했으며 주목왕(周穆王)이 오랑캐를 막자 황복(荒服)[13]이 이르지 못했으며 진시황(秦秦皇)이 오랑캐를 방비하자 천하가 흙더미처럼 무너졌으며 대대로 원수인 금()나라와 원()나라를 남송(南宋)이 복수하기를 꾀했습니다.

 

, 이는 모두 정벌하기를 급선무로 알아서 혹 이를 인해서 흥성하기도 하고, 혹 이를 인해서 망하기도 한 것은 왜이겠습니까? 훈육()이 침범해오자 태왕(太王)[14]이 후히 베푸는 은혜를 폐지하지 않았으며 곤이(昆夷)[15]가 강성해지자 문왕(文王)이 더욱 사대(事大)하는 예()를 부지런히 하였으며 평성(平城)이 포위되어 흉노(匈奴)가 한()나라를 가볍게 여기자 한고조(漢高祖)가 안정시켰으며 전연(澶淵)[16]의 싸움에 거란(契丹)이 화의(和議)를 청하자 송진종(宋眞宗)이 받아들였으며 강호(羌胡)가 그 침입하여 그 숫자가 번성하자 진무제(晉武帝)는 그것을 받아들였으며 토번(吐藩)이 맹약(盟約)을 저버려도 군사를 국경 밖으로 내보내지 않은 것은 덕종(德宗)이었으며 여진(女眞)이 강화(講和)를 청하자 즉시 문죄(罪者)하지 않은 것은 송나라 휘종(徽宗)과 흠종(欽宗)이었습니다. , 이들은 모두 화친을 중하게 여겼는데 혹 이를 인해서 태평을 이루기도 하고 혹은 이를 인해 나라가 어지러워진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제가 여러 사서(史書)와 임금들이 행한 일의 자취를 살펴보고 인하여 징험해 보건대 역대의 치란(治亂)이 다른 것은 그 정벌이 옳았는가와 화친한 시기가 제때였는지 아닌지에 달려 있었습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제가 평()하겠습니다.

 

철액(鐵額)[17]의 적()이 능히 큰 안개를 일으켜 큰 화()가 경읍(京邑) 근처에 가까워졌으니, 탁록(涿鹿)의 정벌과 태원(太原)의 정벌을 어찌 그만둘 수 있겠습니까? 참다운 임금이 중흥(中興)하자 사해(四海)가 그 명령에 복종하고 영웅(英雄)이 나라를 세우자 호월(胡越)[18]이 한 집안이 되었는데 저 하찮은 오랑캐가 어찌 감히 큰 나라에 항거하겠습니까? 항거하자 마원(馬援)[19]을 보내 토벌하고, 이정(李靖)[20]에게 명하여 격파하게 하였으니, 이는 제때였습니다.

 

유락(遊樂)이 무도(無度)하여 모보(謀父)의 덕을 보이자는 간언(諫言)을 듣지 않고 만리성(萬里城)을 쌓아 백성들의 원망을 극도로 쌓고, 의리상 한 하늘 밑에 살 수 없는 원수인데도 군부(君父)를 위해 복수할 생각을 않아서 일어난 서이(徐夷)[21]의 난리는 소장(蕭墻)의 화()[22]이니 이 두 이 두 임금이 부흥하지 못한 것은 족히 괴이할 게 없습니다.

 

태왕이 빈() 땅으로 피해 간 일[23]은 백성을 편히 하고 하늘의 경계(警戒)를 두려워하여 나라를 보위하려고 한 데서 나와, 도외시(度外視)하였으니 예()로써 대우한다는 뜻이 어떠하였습니까?

 

천하가 겨우 안정되어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는데 현군(懸軍)[24]이 깊이 침입해와 백성들이 그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자 진종(眞宗)은 누경(婁敬)[25]의 화친(和親)해야 한다는 설을 써서 구준(寇準)[26]의 도하(渡河)하자는 청()을 물리친 것은 참으로 까닭이 있었던 것입니다.

 

화이(華夷)의 변란(變亂)에 대해 《춘추(春秋)》에 자세한데 곽흠(郭欽)의 사융책(徙戎策)[27]을 버려두고 보고하지 않으면서 반복하여 오랑캐의 본성은 믿지 못하였으며 이성(李晟)과 충사도(冲師道)의 공격하자는 논의를 외면하고 받아들이지 않았으니, 자손들이 오랑캐의 궁정(穹庭)에서 술을 따르는 모욕을 당하고 토번(吐藩)이 크게 변방의 근심거리가 되고 여진(女眞)이 경사(京師)를 함락하는 변을 면할 수 있었겠습니까?

 

아아, 같은 정벌인데도 흥망(興亡)이 같지 않고, 같은 화친인데도 치란(治亂)의 효과가 같지 않음은 어찌 다른 것이 있겠습니까? 그 예를 찾자면 황제(黃帝)는 무위(無爲)의 정치[28]를 하였고, 선왕(宣王)은 자신을 낮추어 수행(修行)하여 백성들을 해치지 않았으며 태왕(太王)은 백성들을 아픈 자를 돌보듯이 사랑하였고 주문왕(周文王)과 한고조(漢高祖)는 관인(寬仁)하였으며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는 도량이 커서 당시 사나움을 제압할 수 있었으니, 때로 정벌하는 법을 써서 먼 오랑캐들이 귀순해 오면 나의 친화하는 은혜를 보였을 뿐 외적을 물리치는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내수(內修)에 더욱 밝아서 환난에 대비하기를 기약하지 않아도 형세를 살피는 것이 더욱 자상하였으니, 그 오랑캐를 대우하는 도리에 대서 제가 무슨 말을 더하겠습니까?

 

다만 애석한 것은 당태종(唐太宗)처럼 영무(英武)한 자질로 문명(文明)한 나라를 다스리면서 오랑캐를 제어하는 방도를 잘못 쓴 것이요, 진종(眞宗)은 인명(仁明)한 임금으로서 사사로운 의논을 받아들여 무략(武略)을 펴지 못한 폐단을 끼친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 비록 소강(小康)상태는 유지했으나 정벌하고 화친하는 즈음에 잘못이 없다고는 할 수 없는데 더군다나 주목왕(周穆王), 진시황(秦始皇), 진무제(晉武帝), 송왕(宋王)들이겠습니까? 혹자는 국정(國政)을 게을리 했고, 혹자는 멀리 있는 오랑캐를 정벌하여 한편으로 원수 오랑캐와 한곳에 살았으니, 의리상 볼만한 것이 없고 무력을 뽐낸 것도 정벌을 위한 것이 아니요 원망하는 마음을 풀고 적을 놓아준 것이었으며 화친할 시기도 아니었으니, 내수(內修)를 잘하여 외적을 물리친다는 뜻에 맞았다고 할 수 있겠으며 환난을 잘 대비하고 그 완급(緩急)의 형세를 잘 살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 정벌과 화친이 틈을 열고 나라를 욕되게 하는 데로 귀결되어 마침내 나라가 어지러워져 망하고 만 것은 마땅하였다고 할 수 있으니, 이적(夷狄)을 대우하는 방도에 있어 논의할 게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니 후세의 임금된 자들은 그중 융성한 경우를 따라서 본받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으며 어지러워지고 망한 경우는 경계하여 고쳐서 자신의 다스림 때문에 어지러워질 것을 잊지 말며 그런 일을 일삼지 말고 군비를 잊지 삼아야 합니다. 그래서 ‘명왕께서는 덕을 삼가라[明王愼德]의 훈계[29]와 백익(伯益)의 근심하지 말라는 경계[30]로써 문덕(文德)을 닦으면 먼 곳의 오랑캐들이 와서 모두 교화(敎化)될 것이요, 군정(軍政)을 닦아서 변방에 전쟁의 먼지가 일지 않는다는 효과를 거두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주문왕(周文王)의 명성에도 뒤지지 않을 것이요 주선왕(周宣王) 내수 외양(內修外攘)만이 유독 아름다움 것이 아닐 것이니, 어찌 오랑캐를 대우하는 데 방도가 없을까 염려하겠습니까?

 

제가 집사(執事)의 질문에 이미 덕을 닦는 것으로 외적을 물리치는 근본을 삼고 형세를 살피는 것으로 환난에 대비하는 방책을 삼으라고 답하였습니다. 또 사람을 임용하는 설()을 말하고, 이어서 말하기를 자신을 수양하는 방도는 비록 임금에게 달려 있지만 환난을 염려하는 방책은 반드시 인재를 얻기를 기다려야 하기 때문에 우선 이 글에서 나라를 어지럽히고 망하게 한 경우를 들어서 논하였습니다. 주목왕이나 진시황이 모보(謀父)와 부소(扶蘇)[31]의 간언(諫言)을 받아들이고 진무제나 당태종으로 하여금 곽흠(郭欽)과 이성(李晟)의 계책을 받아들이게 하고 나아가 송()나라 임금으로 하여금 충사도(沖師道)의 충언(忠言)을 받아들여 진회(秦檜)[32]의 사의(私議)를 물리치게 하였더라면 급할 때 어찌 강한 오랑캐를 막아서 나라의 형세를 보존하게 하였더라면 장차 나라가 흥성하게 되지 않았겠습니까? 이로써 보건대 영웅(英雄)들의 계책을 살펴보는 것이 오랑캐를 대우하는 방도에 보탬이 되지 않는다고 할 수 없습니다. 삼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策問(책문) 2 : 士氣士習(사기사습)

朴栗(박률)

() :

예로부터 임금이 천하 국가를 다스리려면 선비들의 사기(士氣)를 기르고 선비들의 습속(習俗)을 바로잡는 것을 급선무로 삼아야 한다고 여겼는데, 그걸 기르고 길러주고 바로잡을 자는 그 누구인가? 그 사기, 습속은 무엇을 중시해야 하는가?

 

대저 선비란 나라의 근본이다. 만일 사기가 위축되고 습속이 비루해지면 국가의 기맥(氣脈)도 거기에 따라서 저상(沮喪)되어 마침내는 그 폐단을 바로잡을 수 없게 된다. 재단(裁斷)할 줄을 모르면 전국시대(戰國時代) 열사(烈士)의 사기, 한말(漢末)에 마구잡이로 일어난 의논의 습성은 도리어 정치를 잘못되게 되어 함께 실패(失敗)하게 되었는데 어떻게 해야 기르고 바로잡는 방도가 되겠는가?

 

국가의 여러 성인들께서 계승하여 유도(儒道)를 존숭하여 많은 훌륭한 선비들이 수없이 배출되었다. 근년 이래 공부하는 자들이 도덕(道德)과 문장(文章)에 뜻을 두지 않고 한갓 벼슬에만 뜻을 두어 심한 자는 연소한 무리들이 이름을 유적(儒籍)에 올리고 부형(父兄)의 형세에 의지하여 지레 벼슬길을 구하고, 그게 점차 습성이 되었는데도 부끄러워할 줄을 몰라 하루아침에 현달하여 조정에서 시정(施政)하고 있다. 선비의 지절(志節)을 격양(激揚)하여 사업의 경륜(經綸)을 맡길 만한 자가 몇 명이나 되겠는가? 제생(諸生)들은 모두 뜻이 겸손하고 아름다운 자들이 니, 과격하게 말고 나라의 병폐를 고칠 대책을 진술하라.

 

() :

제가 일찍이 사기(士氣)가 길러지지 않은 것을 보고 눈물을 흘렸고, 사습(士習)이 바르지 못한 것을 보고 통곡했기 때문에 새 이론을 내 시폐(時弊)를 구할 대책을 진술하기를 생각한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닙니다. 이제 질문이 마침 이에 미쳤으니, 감히 평소 분개한 바를 대략 터놓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삼가 생각하건대, 지극히 크고 지극히 강건하여[至大至剛]하여 예로부터 지금까지 사라지지 않은 것은 사기(士氣)로 위에서 좋아하면 아래서 심히 따르되 달리하는 것이 사습(士習)인데 기란 기르지 않으면 반드시 쇠미(衰微)해지게 마련이요 습관이 바르지 못하면 반드시 비야(鄙野)한 데로 흐르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옛날 제왕(帝王)들은 나라를 다스리면서 모두 사기를 길러 주어 강대(剛大)한 체()를 세우도록 하고 역시 사습을 모두 바르게 하여 하여금 그 돈후(敦厚)한 실속(實俗)을 숭상하도록 하여 중도(中道)에 맞게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국맥(國脈)이 오래 견고하게 되었던 것이지 실()이 없는데도 그렇게 되었겠습니까?

 

혹시 사기를 기르더라도 제 방법으로 하지 않으면 과격하여 서로 다투는 형세가 이루어지며 사습을 바로잡되 제 방법으로 하지 않으면 보고 느끼어 스스로 격려하는 바가 없게 됩니다. 그러면 강대(剛大)한 사기는 어떻게 진작시켜야 하며 돈후(敦厚)한 사습은 어떻게 이루어지도록 해야 합니까? 그렇다면 풍속을 바르게 할 책임을 맡은 사람이 변하게 할 방책을 반드시 이런 마음으로 실천의 근본을 삼고 반드시 자신이 솔선하여 모범이 된 연후에 사기가 모두 길러지고 사습이 모두 바르게 되어 국가가 거기에 따라서 잘 다스려지게 될 것입니다.

 

청컨대 물으심을 인하여 아뢰겠습니다. ()란 사()에게 있는 것이며 습()이란 사가 지향(志向)하는 것으로 서로 번갈어 수응(酬應)하여 어느 하나가 치우치게 없어서는 안 되어 어리석은 저로서는 어느 것을 먼저 해야 하고 어느 것이 더 중요한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이 사기가 있은 연후에 사습이 있고, 사습이 바르게 된 연후에 사기가 길러지기 때문에 기르고 바로잡기를 제방도로 하고자 하는 자는 겸해서 논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융성했던 당우(唐虞)[33] 시대나 삼대(三代)[34] 때에는 아름다운 오전(五典)[35]이 있어서 인륜(人倫)이 충경(忠敬)을 숭상하여 중도(中道)에 맞게 해 찬란한 교화를 이루었습니다. ()나라에 이르러 크게 갖추어져서 당시의 기습(氣習)이 탁월하기만 했습니다. 이후부터는 성왕(聖王)의 영향(影響)이 끊어져 대아(大雅)의 시()[36]가 이루어지고, 사람이 멀어져 위로 임금된 자들은 편벽된 술책(術策)을 쓰고 아래로 선비된 자들은 공리(功利)의 설에 훼손되어 정사(政事)를 해치는 단서가 되어 스스로 기르고 바로잡힐 이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기가 위축되어 시들고 습이 비야(鄙野)해져 국맥(國脈)이 깎이고 상하게 된 것이 괴이하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바로잡아 배양하는 바가 중도(中道)를 많이 잃었기 때문에 저 전국(戰國) 열사(烈士)들의 기()와 후한(後漢) 시대 함부로 의논하는 습속은 비록 한때에는 숭상할 수 있겠지만 다투어 은원(恩怨)을 갚는 유()는 물 웅덩이에서 죽는 것을 면치 못하여 지나치게 격양(激揚)되어 마침내 모조리 죽게 되는 참혹함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집사(執事)께서 도리어 정치를 해쳤다고 여겨 후세 사람을 감발(感發)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기를 배양하여 인재(人才)를 만들고 사습(士習)을 바로잡아서 지향(指向)할 바를 정하는 것이 참으로 천하의 큰일인데 그 요령은 임금이 몸소 어떻게 솔선(率先)하여 인도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성조(聖祖)께서 개국한 이래 신성한 자손들이 계속해 나와 학교(學校)를 세워 수선(首善)[37]하는 바탕을 삼고 절의(節義)를 숭상하여 행동의 표준을 삼아 몇 년 동안 기르자 도()를 배운 선비들이 많이 배출되어 예양(禮讓)하는 풍속이 밝아져서 볼만했으니, 이 어찌 열성조(列聖祖)께서 몸소 실천한 효과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다 전하(殿下)께서는 조종(祖宗)에서 배양해온 뒤를 계승하여 오늘날 다스리는 정사가 유술(儒術)을 존숭해 길러 이미 선비들의 기개를 고무(鼓舞)하고 염근(廉謹)을 숭상해 일시의 사습을 교화(敎化) 시켰습니다. 그러니 선비된 자들은 마땅히 순강 정직(純剛正直)한 기운을 자신의 것으로 삼고 온근 돈후(溫謹敦厚)한 습성을 스스로 몸소 실천해서 공론(公論)의 예봉(銳鋒)이 필부(匹夫)의 임에서 늠름하게 나와야 하고, 충직한 어진이가 조정에 가득해 기강이 확립되는 정치의 효과가 이루어졌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근년 이래 기절(氣節)이 크게 무너져서 나약한 풍습이 이루어지고 극도로 투박해져 염치(廉恥)의 도가 사라졌습니다. 처음으로 배우는 자들은 도학(道學)이 무슨 물건이며 문장(文章)이 무슨 일이냐고 물어서 중시해서 배우는 것은 훈고문(訓詁文)[38]뿐이요 마음속에 간직한 바는 녹봉(祿俸)을 이롭게 여기는 마음뿐입니다. 그러니 적용(適用)하는 학문이 어떻게 이루어지겠으며 조진(躁進)[39]하는 습성이 어디를 말미암아서 제거되겠습니까? 심한 자는 부형(父兄)의 형세를 의지해서 몰래 음거(蔭擧)[40]의 열에 끼고자 사사로이 뇌물로 청하기도 해서 관직이 벼슬을 사고파는 매개체가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겨우 포대기를 면한 어린 자가 이미 높은 벼슬을 차지하고 일찍이 아무 경험도 없는 자가 갑자기 백성을 다스리니, 직책이 걸맞아야 한다는 뜻이 어떻게 이르겠으며 젖비린내 나는 어린애가 벼슬해서는 안 된다는 경계(警誡)를 어떻게 면하겠습니까?

 

, 사기는 배양하지 않을 수 없는데 지금 이처럼 위축되었으며 사습은 바로잡지 않을 수 없는데 오늘 날 이처럼 야비(野鄙)하게 되었으니, 조금이라도 생각이 있는 자라면 어찌 이런 때가 한심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일찍이 먼 초야(草野)에 살면서 시속에 마음이 상해서 그렇게 된 까닭을 깊이 생각해서 한 가지 설을 얻었으니 감히 겸양하지 않는 다는 꾸중을 피해서 숨기지 않고 말해야 하는 의리를 저버리겠습니까?

 

아아, 사기는 저절로 길러지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진작시킨 연후에 진작되는 것이며 사습은 저절로 바르게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이끌어준 이후에야 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위에서 진작시키고 이끌어주는 실제가 없으면서 사기가 위축되지 않기를 바라고 사습이 야비한 데로 흐르지 않기를 바란다면 어렵지 않겠습니까? 비록 그러하나 사기가 위축되고 사습이 야비하게 되는 것이 어찌 선비들이 바라는 바이겠습니까? 인순(因循)하는 폐단 역시 반드시 말미암는 무슨 까닭이 있을 것입니다.

 

옛날을 사모하는 한 선비가 스스로 큰 포부를 지녀 요순(堯舜) 시대의 임금과 신하의 뜻으로 당우(唐虞)의 정치 교화를 이루고자 해서 충분심(忠憤心)이 격발한다면 그 기개가 가상한 데도 중인(衆人)들은 반드시 비웃고 모욕할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배척해 화망(禍網)이 닥치고 사림(士林)이 함께 매장시킨다면 그 누가 기꺼이 이 기개를 분발해서 경솔히 시대의 비방을 부를 것이며 습성을 바로잡아 망령되이 화 부르기를 바라겠습니까? 지금을 위한 계책으로는 위에서부터 솔선해서 사기를 배양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비단 배양할 뿐만 아니라 반드시 제대로 된 방법으로 진작시키고 사습을 바로 잡고 비단 바로잡을 뿐만 아니라 반드시 지향할 바를 세워 교도(敎導)해 오래오래 끊임없이 행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 선()이 참으로 가상하다면 비록 필부(匹夫)이더라도 포상(褒賞)하고 참으로 그 사람이 쓸 만한 사람이라면 비록 천하고 소원하더라도 반드시 임용하며 채용할 만하면 비록 광간(狂簡)[41]한 사람이더라도 반드시 용납하며, 사기(邪氣)가 정기(正氣)를 해침이 없고 간사한 자가 충현(忠賢)을 이간질하지 않으며 사사로운 의논이 시비(是非)를 혼란하게 하는 일이 없게 하는 것이 모두 배양하는 방법입니다. 이런 방도를 각기 지극히 하여 사기를 진작시키고자 한다면 당당(堂堂)한 한줄기 기가 작게는 사방의 기강을 바로잡고 크게는 천지를 가득히 채우게 될 것입니다.

 

쉽게 변하는 것이 습성입니다. 점점 변하여 인심을 갈고 다듬지 않으면 위로 국체(國體)를 유지할 수가 없는데 어찌하여 책을 끼고 스승을 따라 배우는 자들이 한갓 천한 구이지학(口耳之學)[42]만 일삼으면서 자기에게 간절한 공부는 힘쓰지 않고, 또 홍진(紅塵) 세상에서 벼슬을 구할 생각만 하고 또 권세(權勢)의 힘을 빙자하여 분경(奔競)하는 부끄러움을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까?

 

이상과 같이 하면 장차 녹()을 이롭게 여기는 마음을 돌려 학문에 뜻을 두게 되고, 벼슬을 구하려는 모습이 도에 부지런한 모습으로 바뀌어 몸에 가득한 것이 모두 성대한 도덕(道德)과 문장(文章)이요 몸소 지키는 바가 예의와 염치에 불과하여 하루 아침에 나와서 나라에 쓰여 현달하여 국가를 경륜하는 그릇이 되어, 사업을 시행하여 치효(治效)를 돕게 되는 것을 볼 것인데 어찌 나라의 병폐를 다스릴 계책이 없음을 걱정하겠습니까?

 

사세(事勢)에 대해 편()의 끝에서 또 말씀하기를 “투미하거나 과격하게 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저는 배움이 부족하여 시무(時務)에 대해 통달하지 못하였으니, 비록 투미하거나 과격하지 않고 절충(折衷)하는 의논을 내고자 하더라도 어찌 그렇게 되겠습니까? 그러나 제가 평일(平日) 통곡하고 눈물을 흘린 것이 거기에 있었으니, 감히 집사께 다 말씀드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대개 투미함은 과격함을 징계(懲戒)한 데서 나오는데 그 폐단은 자신을 위하는데 불과하며 과격함이란 투미한 것을 분개하여 나온 것인데 그 마음은 한결같이 나라를 위한 것입니다. 천하에 자신의 이익을 꾀하지 않는 자는 없으며 나라를 위하면서 의리를 뒤로 하는 자도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 임금을 위하는 자가 선비들로 하여금 어찌 투미하도록 시키며 어찌 과격하게 하겠습니까? 이 두 가지는 비록 지나치고 미치지 못한 폐단은 있으나 투미함을 과격함에 비교하면 그 투미함이 더욱 정치를 해침을 알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오늘날의 근심은 과격함에 있지 않고 지나치게 투미함에 있으니, 반드시 격하게 하여 새롭게 하고 경장(更張)해서 사기가 크게 진작되고 사습이 크게 변한 연후에 또 성인(聖人)이 공정한 도리로 중간에서 재단(裁斷)해 선비들로 하여금 따르게 한다면 어찌 이런 폐단이 있겠습니까? 맹자(孟子)께서 말씀하기를 “중이란 부중을 기르는 것이다[中養不中]이라고 하셨으니, 저의 투격(渝激) 논의에 또 집사의 설로써 폐단을 바로잡는 약석(藥石)을 삼아 삼가 대답합니다.

 

 

출전:『震英粹語』上, 『密陽朴氏家藏』, 국역 術先錄』  

 



[1] 책문(策文) : 과거 시험과목의 한 가지. 정치에 대한 어떤 문제를 제시하고, 거기에 대한 대책을 답안(答案)으로 써 올리게 함.

[2] 황제(黃帝)에……치우(蚩尤) : 황제는 중화민족이 공통으로 받드는 시조이며 치우는 흔히 동이족(東夷族 )의 선조로, 철제(鐵製) 병기를 만들어 중국을 침범하자 황제가 이를 토벌해 죽였다고 한다.

[3] 주선왕(周宣王)에……험윤() : 주선왕은 쇠퇴한 주()나라를 부흥시킨 임금. 험윤은 중국 북쪽에 자리잡고 사는 유목민(遊牧民)인데 역대 이래 중국을 괴롭히자 이를 크게 정벌했다.

[4] 한광무(漢光武)에……교지(交址) : 교지는 한()나라 때 설치한 군() 이름으로 지금의 베트남 호치민시() 일대이다.

[5] 당태종(唐太宗)에……돌궐(突獗) : 돌궐은 고대 중국 주변의 한 종족 종족 이름으로 흉노(匈奴)의 한 갈래인데 역대 이래 틈만있으면 중국을 괴롭혔다.

[6] 견융(犬戎) : 고대 중국 주변의 한 종족 이름. 주목왕(周穆王)이 크게 정벌했다.

[7] 남송(南宋)에……금원(金元) : 북송(北宋) 말기 금()나라의 끊임없는 침략으로 마침내 중원(中原)을 금나라에 내주고 흠종(欽宗)과 휘종(徽宗)은 금나라로 붙잡혀가는 모욕을 당했다. 이에 흠종의 아우 고종(高宗)이 남쪽으로 내려가 세운 나라를 남송이라 한다.

[8] 태왕(太王)에……훈육() : 태왕은 주무왕(周武王)의 조부(祖父)인 고공답보(古公亶父). 훈육은 험윤()의 다른 이름.

[9] 송나라 흠종(欽宗)과 휘종(徽宗) : 북송(北宋) 말기의 임금으로 금나라에 붙잡혀 가는 모욕을 당했다.

[10] 음우(陰雨)의 경계(警戒) : 병란(兵亂)에 대비하라는 경계.

[11] 치우(蚩尤) : 고대 전설상 구려족(九黎族)의 수령(首領). 쇠로 병기(兵器)를 만들어 황제(黃帝)와 축록(涿鹿)에서 싸우다 패하여 피살되었다고 한다.

[12] 지남거(指南車) : 방향을 가리키는 수레. 황제가 치우(蚩尤)와 축록(涿鹿) 들판에서 치우가 크게 안개를 일르키자 군사들이 길을 잃고 좌왕우왕하니, 황제가 지남거를 만들어 방향을 지시해 치우를 사로잡았다고 한다.

[13] 황복(荒服) :  5()의 하나로 서울에서 2500리 떨어진 먼 지방.

[14] 태왕(太王) : 주무왕(周武王)이 건국 후 할아버지인 고공단보(古公亶父)를 태왕(太王)에 봉()했다.

[15] 곤이(昆夷) : () ()나라 시대 서북쪽에 살던 부족 이름. 이들이 북쪽의 험윤족()과 함께 중국을 끊임없이 괴롭혔다.

[16] 전연(澶淵) : 옛날 위()나라에 있던 호수 이름.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복양시(濮陽市) 서쪽에 있었다.

[17] 철액(鐵額) : 동두 철액(銅頭鐵額)의 준말로 인면수심(人面獸心)의 인정사정 없이 흉폭한 강한 적을 일컫는 말.

[18] 호월(胡越) : 호는 북쪽, 월은 남쪽 지방의 민족으로 서로 다른 부족을 뜻한다.

[19] 마원(馬援) : 후한(後漢) 시대의 용장(勇將)으로 교지(交趾) 지역을 정벌하여 복파장군(伏波將軍)에 봉해졌다.

[20] 이정(李靖) : 닫태종(唐太宗) 때의 장수. 돌궐(突厥)을 격파한 공로로 위국공(衛國公)에 봉해졌다.

[21] 서이(徐夷) : 옛날의 종족 이름. 서융(徐戎)이라고도 하는데 동이족(東夷族) 가운데 가장 강성해 나라를 세우고 주()나라에 대항했다.

[22] 소장(蕭墻)의 화() : 집안에서 일어난 싸움. 나라 안의 싸움.

[23] 태왕(太王)이……피해 간 일:기산은 지금 중국 섬서성(陝西省) 기산현(岐山縣)에 있던 산. 주무왕(周武王)의 할아버지 태왕이 오랑캐가 자주 침범하여 백성을 괴롭히자 종족을 이끌고 그동안 도읍이던 빈()을 버리고 기산(岐山)으로 이주하였다.

[24] 현군(懸軍) : 적진에 깊숙이 들어가 있는 외로운 군대.

[25] 누경(婁敬) : 한고조(漢高祖) 때 신하로 공로가 있어서 임금의 성()인 유씨(劉氏)를 하사받았다.

[26] 구준(寇準) : 송진종(宋眞宗) 때 사람. 거란(契丹)이 자주 침입하자 도읍을 옮기자는 주장을 했다.

[27] 사융책(徙戎策) : 곽흠은 한애제(漢哀帝) 때 사람. 사융책이란 무력(武力)을 써서 오랑캐를 멀리 내쫒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28] 무위(無爲)의 정치 : 도가(道家)의 주장으로 작위(作爲)함이 없이 자연에 순응하는 청허(淸虛)한 정치.

[29] ()을 삼가라는 훈계 :《서경(書經)》 여오편(旅獒篇)에 나오는 말.

[30] 백익(伯益)의 ……경계 :《서경(書經)》 백익편(伯益篇)에 나오는 말.

[31] 부소(扶蘇) : 진시황)秦始皇)의 큰아들. 이사(李斯)와 조고(趙高) 등에게 밉보여 즉위하지 못하고 해를 당했다.

[32] 진회(秦檜) : 북송(北宋) 말기 금( )나라와 화친(和親)을 주장한 사람. 간신(奸臣)이라 일컬어진다.

[33] 당우(唐虞) : 태평성세(太平聖世)로 알려진 요()임금과 순() 임금 시대.

[34] 삼대(三代) : 태평한 정치가 이루어졌던 하(), (), () 3().

[35] 오전(五典) : 고대 다섯 가지 윤리도덕(倫理道德). 오륜(五倫).

[36] 대아(大雅)의 시() : 시경(詩經) 구성의 한 부분. 시가(詩歌)에 사특함이 없는 정성(正聲)이란 뜻으로 소아(小雅)와 대아가 있는데 대아는 대부분 서주(西周)시대 왕실에서 지어진 작품이라 한다.

[37] 수선(首善) : 남보다 제일 먼저 선()을 행하여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뜻.

[38] 훈고문(訓詁文) : 고서(古書)의 자구(字句)를 해석하고 변증(辨證)하는 학문.

[39] 조진(躁進) : 벼슬에 빨리 진취(進就)하려고 서두는 일.

[40] 음거(蔭擧) : 과거(科擧) 시험을 거치지 않고, 조상의 공훈(功勳)으로 임명되는 음직(蔭職)에 천거되기를 바라는 일.

[41] 광간(狂簡) : 뜻은 고상하고 원대하지만 일처리가 엉성한 사람.

[42] 구이지학(口耳之學) : 귀로 듣고 입으로 말하는 소인(小人)의 학문. 도청도설(道聽途說)의 얄팍한 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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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연구<3> : 遯溪(돈계) 朴栗(박률)


朴栗(박률)[1520(中宗 15)~1569(宣祖 3) 향 50歲]의 字는 寬仲(관중), 自號는 遯溪(돈계)이다. 만성보, 호보, 신도비명에 적힌 그의 인물평이다.
도서명 인물평 내용
萬姓譜抄 有文名 학문으로 이름이 났다. 
名人號譜 以文章名。策問刊行。爲一時程式。*여타 호보 동일 내용 문장으로 유명하다. 책문이 간행되어 일시에 程式(정식)이 되었다. 
姓號譜彙
號譜
朴栗神道碑 公天資篤實。儀度端重。沈厚寡。喜怒不形。不甚矜持。而擧止自中禮法。造次倉卒之際。亦未有疾言遽色。爲文章不徒尙詞藻。典雅純正。爲一時楷範。 공은 타고난 자질(資質)이 독실(篤實)하고, 태도가 단정(端正)하고 중후(重厚)하며, 침착(沈着)하고 후덕(厚德)하며 과묵(寡)하였다. 기쁨과 노함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았고 긍지(矜持)를 심히 들어내지 않아서 행동거지가 저절로 예법(禮法)에 맞았다. 아무리 다급하고[造次] 허둥지둥[倉卒]할 때도 역시 빨리 말하거나 급히 서두르는 안색을 낸 적이 없었다. 문장을 짓는데, 오히려 아름다운 문사[詞藻]를 취하지 않았으나 전아(典雅)하고 순정(純正)하여 일시에 세상의 모범이 되었다. 

종합하면, ‘많이 안다는 것’이 아니다. ‘內功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알아본 사람이 성균관 동기 恥齋 洪仁祐(홍인우)였다. 花潭 徐敬德(서경덕)과 退溪 李滉(이황)의 문인이다. 홍인후가 계획한 금강산 유람에 朴栗(박률)과 南彦經(남언경), 許忠吉(허충길)까지 동행하여 4명이 1553년(명종 3) 4월 9일 서울을 떠나 5월 20일[42일간] 돌아와서 여행기를 탈고한 것이 그 유명한 ≪關東錄(관동록)≫이다. 이들은 모두 연이은 士禍(사화)에 염증을 느끼고 과거를 폐하고 求道에 전념했던 젊은 道學者들이였다.

<金剛全圖>(1734) 정선(호암미술관)

이 책이 유명한 이유는 退溪 李滉(이황)이 序文을 쓰고 栗谷 李珥(이이)가 跋文을 쓴 책이기 때문이다. 퇴계로 시작해서 율곡으로 끝맺음한 유일한 책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 동반자 중 유일하게 박률의 詩가 실려 있다. 돈계 박률이 비로봉에 올라 고승을 만났을 때의 감흥시이다. 16년 후 퇴계 이황이 이 고승을 다시 만나 읊은 次韻 시를 같이 실었다. 
 

<元韻 朴栗>

與洪上舍仁祐 字應吉号恥齋 遊金剛山 - 遯溪*
상사 홍인우 자는 응길(應吉), 호는 치재(恥齋)이다 와 함께 금강산을 유람하다. – 돈계

追隨應吉曾同伴  응길을 뒤따라 길동무 되니
心仰心工近古  근래에 드물게 어진 사람이네.
癸丑年中乘款段  계축년(명종3, 1553)에 말 빌려 타고서
毘盧峯上問高  비로봉 위에서 고승을 물었었네.
人云眼大尤容物  사람들 안목 높여 만물을 용납한다고 하는데
天爲樓成喚作  하늘은 누각을 지어 신선 불러 놀게 하네.
偶値元賓相與者  우연히 큰 손님 만나 어울리니
旅窓疎雨意范  客窓(객창)에 내리는 빗소리 듬성하네.

*≪述先錄≫에 시의 제목이 ‘<與洪上舍仁祐[字應吉号恥齋]遊金剛山>-遯溪’로 되어 있다.
≪恥齋先生遺稿≫ 卷之三 續內集

<次韻 李滉>

余友洪上舍應吉。求道甚切。不垂遭親喪。過毁滅性。痛哉。應吉曾示余以遊金剛山錄。余爲之敍題。今不復能記。東歸船上。偶逢一僧。乃所與導遊山者。能言當日探歷事。余感涕久之。聊以一詩[次詩軸中朴栗韻]*見情云。
내 친구 上舍 洪應吉은 道를 매우 간절히 구하였는데 불행히 親喪을 당해 너무 슬퍼하다 죽었으니, 애통한 일이다. 응길이 일찍이 나에게 金剛山遊覽錄(금강산 유람록)을 보여주어 내가 序文을 써주었다. 이제 다시 기억나지 않았는데 동쪽으로 가는 배에서 우연히 한 중을 만났다. 바로 금강산 유림 때 길 안내를 맡았던 자로서 그날 두루 탐방하던 일을 말하므로 내가 오랫동안 눈물을 흘렸다. 부족하나마 시 하나로[詩軸(시축) 가운데 朴栗(박률)의 운을 次韻하여] 정을 보인다.
*≪述先錄≫에는 ‘聊以一詩見情云’이 ‘聊次詩軸中朴栗韻見情云’으로 되어 있다. 제목에 ‘次韻’字를 넣지 않으면 표절시비가 된다.

楓岳久聞天下勝  전에 풍악산이 명승이란 말 들었는데
洪君可惜後來  애석하게 홍군이 뒤늦게야 왔네.
盪胸曾喜憑遊錄  일찍이 유람기 읽고 가슴 뛰었는데
隔世今嗟遇伴  이제 스님 만나 함께 하니 격세지감 드네.
只爲相同從學道  서로 만나 함께 도를 배웠지만
非緣長往獨求  오래 지냈는데 신선될 인연은 아니었네.
冷烟風雨驪江上  여강에 찬 연기 끼며 풍우 치는데
回首平生思惘  고개 돌려 평생을 돌아보니 뜻이 서글프네.

隆慶己巳暮春退叟書  융경 기사년(선조 2, 1569) 늦봄 - 퇴수

 
≪退溪先生文集≫ 卷之五 續內集 *퇴계집을 편집한 유성룡이 시제목에서 박률 이름자와 '次韻'한 내용을 빼버렸다.

물론 이 시는 ≪退溪集(퇴계집)≫에도 실렸다. 69세 이황이 40세에 요절한 제자를 벗으로 칭하며 사제의 정을 담은 시로써 유명해져 李廷馨(이정형)의 ≪東閣雜記≫, 權鼈(권별)의 ≪海東雜錄≫ 등 다수의 책에 옮겨져 널리 알려졌다. 박률의 시를 차운했다는 내용은 빠져있다. 홍인우의 아들 洪進(홍진)이 이이에게 편집을 부탁하여 ‘편집인 율곡’이 간행한 책이 되며 유명세를 탔다.
박률은 홍인우가 죽은지 4년 후 명종 13년(1558)에 39세 나이로 出仕(출사)를 한다. 式年試 갑과 2등으로 급제했는데 그 때의 科文 2편이 ≪震英粹語(진영수어)≫에 실려 있다. ‘동쪽 영재들의 빼어난 말’이란 뜻의 ≪진영수어≫는 과제별로 모범답안지를 선별하여 科擧를 준비하는 士林들에게 필독서로 전국의 鄕校에 보급된 책이다.

  
≪震英粹語≫

▲외교 정책을 다룬 <征伐和親> : 박률

▲선비의 기상과 학습을 다룬 <士氣士習> : 박률

외교 정책을 다룬 <征伐和親>, 선비의 기상과 학습을 다룬 <士氣士習>이 그것이다. 이 두 科文은 당대 사림들에게는 물론 집안 후손들에게 미친 영향력은 지대했다. 이이의 대책문도 3편이 실려있는데 그 유명한 <天道策>이 여기에 실려 있다. 박률의 출사를 계기로 그 후손들은 대를 이어가며 과거에 급제하며 밀양박씨 제일의 가문으로 성장한다.


<贈吏曹參判遯溪先生朴公神道碑銘(증이조참판돈계선생박공신도비명)>

‘박률신도비’의 두전(頭篆)은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이 篆書로 썼고 남창(南窓) 김현성(金玄成)이 비문의 글씨를 써서 유명하다. 비문은 형조판서,대사헌을 지낸 망촌(忘村) 송순(宋諄)이 찬(撰)하였다. 송순은 박률의 사위이다. 비석은 양주 밀양박씨 선영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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