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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ipziger Buchmesse > LBM 2017 전시도서 > 정유각집(貞㽔閣集)[박제가]

 
정유각집(貞㽔閣集)[박제가]
상품명 : 정유각집(貞㽔閣集)[박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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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책 포갑 포함, 2017 라이프치히 도서전
     
 

家文을 찾아서 : 밀양박씨편①
『≪韓琴新譜≫와 마포 水明亭 이야기』관련문헌

▣原本 書誌
-도서명 : 貞㽔閣集
-편저자 : 楚亭 朴齊家[박제가, 1750년(영조 26)~1805년(순조 5)] 著
-판사항 : 필사본
-발행사항 : [刊寫者未詳] 
-형태사항 : 4卷4冊, 附錄1冊, 共5冊:四周雙邊 半郭 17.8 x 12.5 cm, 有界, 10行21字, 上下向白魚尾;23.0 x 16.0 cm
-주기사항 : 附錄: 竟信堂夾帶
-서장처 : 미국 하버드대학교

*본 도서는 수명정 2대 중축자 大瓠(대호) 朴𥶇(박로)[1584~1643] 관련 기록문헌이다.

박로는 소북을 대표하는 학자이자 택당 이식과는 32년 막역지우이다. 그가 소현세자의 스승으로 심양에 볼모로 있을 때, 정뇌경의 죽음과 관련되어 누명을 쓰게 되었는데 그 왜곡된 사실이 정조 때까지 만연했다. 후손 박제가가 이것을 한탄하는 시가 이 문집에 실려있다. 박제가가 연행길에 심양에 들러 지은 <심양잡절>이 그 시이다.

▣저자 소개

-姓名 : 朴齊家(박제가)
-初名 : 齊雲
-字 : 在先,次修,修其,纇翁
-號 : 楚亭,葦杭道人,貞蕤居士,苕翡堂,竟信堂
-本貫 : 密城
-曾祖 : 朴純[黃海監司], 祖 : 朴台東[], 父 : 朴玶[右副承旨]
-母 : 全州李氏, 妻 : 德水李氏[李觀祥의 女]
-生沒年 : 영조 26(1750)∼순조 5(1805)
-조선 후기 북학의 대학자. 연암 박지원, 이덕무, 유득공, 이서구, 홍대용 등과 교유
-주요저서 : 《북학의(北學議)》,《정유집(貞蕤集)》, 《정유시고(貞蕤詩稿)》, 《명농초고(明農草稿)》 등
-주요서화 : 〈대련글씨〉, 〈목우도(牧牛圖)〉, 〈어락도(漁樂圖)〉, 〈야치도(野雉圖)〉 등

초정 박제가는 밀양(密城) 박씨(朴氏) 우부승지(右副承旨) 박평(朴玶, 1700-1760)과 전주(全州) 이씨(李氏, 1721-1773)의 둘째 아들로 1750년 11월 5일 서울에서 서자로 태어났다. 초명(初名)은 제운(齊雲)이고, 자(字)는 재선(在先)․차수(次修)․수기(修其)․뇌옹(纇翁)이며, 호(號)는 초정(楚亭)․위항도인(葦杭道人)․정유거사(貞蕤居士)․초비당(苕翡堂)․경신당(竟信堂)이다. 초정은 17세 되던 해에 충무공 이순신의 5대손인 이관상(李觀祥, 1716-1770)의 서녀 덕수(德水) 이씨(李氏)와 혼인하여, 3남 2녀의 자식을 두었다.
초정의 생애는 혼인 이전의 학습기와 이후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과 형암(炯庵)이덕무(李德懋, 1741-1793) 등과 함께 어울렸던 백탑청연기(白塔淸緣期), 규장각 검서관과 지방관으로 활동한 사환기(仕宦期), 네 차례의 연행 시기를 묶은 연행기(燕行期), 그리고 만년의 유배기로 대별할 수 있다.
1차 연행을 다녀 온 1778년(정조2) 이전까지 초정은 박지원, 이덕무, 유득공, 홍대용, 이희경, 이서구, 백동수, 유금 등과 시서화를 매개로 지속적인 교유를 펼쳤다.
연경에서 돌아온 이듬해인 1779년(정조3) 3월 초대 검서관으로 발탁되었으며, 1786년(정조10) 8월 검서관직을 떠났다. 1차 검서관직을 수행하던 1782년(정조6)부터 1784년(정조8)까지는 이인역승(利仁驛丞)으로 재직했다. 1789년(정조13) 1월 12일 『일성록(日省錄)』에 잘못 쓴 곳이 많다는 이유로 검서관서리수(徐理修, 1749-1802)를 면직시키고 대신 초정을 검서관에 재임용했다.
1790년 5월 27일 초정은 종사관으로 유득공과 함께 2차 연행 길에 올랐다. 연경에서 돌아오는 길에 정조의 부름으로 군기시정(軍器寺正)의 직함을 임시로 받고 연이어 3차 연행 길에 올랐다. 1792년(정조16) 8월 24일 검서관에서 물러났으며, 1793년(정조17)까지 부여현감으로 전보(轉補)되었다. 1794년(정조18) 1월 8일 다시 검서관에 복직했다. 1795년(정조19) 2월 12일 검서관을 다시 그만 두었으며, 1797년부터 4차 연행을 떠난 1801년(순조1) 2월 직전까지 영평현령으로 재임했다.
1801년 1월 28일 주자서(朱子書) 선본을 구해오라는 명을 받고 유득공과 함께 4차 연행 길에 올랐다. 초정의 4차 연행에서 돌아온 그 해 9월 흉서사건(凶書事件)에 연류되어 종성(鍾城) 유배형을 내려졌다. 초정은 곧바로 한양을 떠나 10월 24일 유배지인 종성에 도착했다. 1805년 3월 22일에 향리로 방축된 초정을 사면시키라는 명을 내렸다. 1805년 4월 25일 56세의 일기로 삶을 마감했으며, 경기도 광주부 엄현(崦峴)의 선산에 묻혔다.


▣영인본 견본

<비단 표지>





▲정조때까지 만연했던 박로에 대한 누명을 한탄하는 시. 북벌론의 폐해가 200년 넘게 조정의 눈을 가로 막았다.


▣ 해제

초정(楚亭) 박제가(朴齊家, 1750-1805)의 시작품을 편년체(編年體)로 엮어 놓은 문집이다.


貞蕤閣三集(정유각3)


 


瀋陽襍絶七首              심양잡절 7


 


耶里河邊烏呼。                 야리하(耶里河)[1] 주면에는 검은 소들 울어 대고


瀋陽城外白浮圖。                 심양성 밖에는 흰 불탑[2] 서 있구나.


夜來風雨黃泥滑。                 밤이 오자 비바람에 진흙탕 되었으니


愁殺行人十里湖。                 십리하[3] 길 나선 행인 한시름에 젖는구나.


 


十里河。土人訛稱十里湖。此站最多泥潦。


십리하는 이곳 사람들이 십리호라고 잘못 부른다. 여기 참()은 진흙탕이 가장 심한 길이다.


 


凄風闌雨最高峰。                 가장 높은 봉우리에 비바람 몰아치면


靑石悲歌說孝宗。                 청석령 슬픈 노래[4] 효종 마음 말해 주네.


太息紹興都冷了。                 선왕 옛 뜻[5] 모두 다 싸늘해짐 서글퍼라


卽今冠盖日相逢。                 이제는 사신 수레 날로 서로 만나누나.


 


四庫新書搨聚珍。                 『사고전서』 새 책을 취진자로 찍어 내니


閣成文溯應文津。                 문소각 이루어짐 문진각에 응함이라[6].


祝公恰共翁公住。                 축덕린은 옹방강과 함께 지냄 흡족하여


不識行人是故人。                 지나는 객 옛 친구임 알지를 못하누나.


 


翁侍郞方綱爲校正文溯閣四庫書。今夏來瀋陽。芷塘祝公德麟同來。計其日子。正度瀋時也。


시랑 옹방강은 문소각의 『사고전서』를 교정하기 위해 올여름 심양에 왔다. 지당 축덕린도 함께 왔다. 그 날짜를 헤아려 보니 바로 심양 지날 때였다.


 


明駝處喇僧。                 낙타가 누운 곳에 라마 승려 있으니


壐卥來異敎興。                 옥새가 서쪽 온 뒤 이교가 일어났네[7].


寺裡雲松平似剪。                 절 안의 큰 소나무 잘라 낸 듯 고르고


靑山一髮見昭陵。                 푸른 산 한 터럭 끝 청 태종 능[8] 보이네.


 


吾家瓠老早蜚英。                 우리 집안 대호자(大瓠子)[9]는 진작부터 영특하여


京輔曾馳趙尹名。                 한성의 판윤 되어 조윤(趙尹) 이름 뒤쫓았네.


三入瀋陽勞更茂。                 세 번이나 심양에 와 나라 위해 애썼는데


浮言枉著鄭卿。                 세상 뜬말 그릇되이 정뇌경(鄭雷卿)[10]만 드러내네.


 


澤堂贈大瓠詩。有京輔子能追趙尹。侍臣吾已謝終徐之句。公時畿伯也。


택당이 대호에게 준 시에 경보 벼슬 그대는 조윤을 따르지만, 시신인 나는 이미 종서(終徐)를 사양했네[11]라 한 구절이 있다. 공은 당시 경기도 관찰사였다.


 


西門車馬漲黃塵。                 서문에 수레와 말 누런 먼지 가득하니


市井繁華隔世新。                 시정은 번화하여 격세지감 새롭구나.


何處寒烟埋碧血。                 어느 곳 찬 연기에 푸른 피를 묻었던고


此間無地弔三臣。                 어디에도 삼신(三臣)[12]을 조문할 곳 없구나.


 


曾明羅李難明案。                 분명찮던 나리(羅李)[13]의 일 진작에 밝혀졌고


復證三臣致命辰。                 세 신하 순사한 날 다시금 증명됐네[14].


我愛新書如好色。                 여색을 좋아하듯 나는 새 책 사랑하여


時人還笑入燕頻。                 자주 연경 드나듦을 사람들은 비웃누나.


 


羅德憲李廓見全韻詩。余於戊戌見之。洪翼漢三學士死節事。見開國方略中。


나덕현과 이확의 일이 『전운서』에 보인다. 나는 무술년에 이를 보았다. 홍익한 등 삼학사가 순절한 일도 『황청개국방략』에 보인다.


 



[1] 야리하 : 심양 남쪽을 흐르는 강으로 심수(瀋水) 또는 혼하(渾河)라고 한다.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이 강을 고구려 전성기의 패강(대동강)으로 보았고,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고대의 압록강(아리가람)이라고 주장했다.
[2] 흰 불탑 : 원문은 백부도(白浮圖). 심양과 요양 사이에 백탑보(白塔堡)라는 마을이 있는데, 여기 있는 흰색의 7층 벽돌탑을 말한다. 옛 연행사들에게 백탑보에서 혼하 사이는 한나절도 걸리지 않는 거리였다.
[3] 십리하 : 원문은 십리호(十里湖). 요양과 심양 사이의 거리는 대략 80킬로미터인데, 그 중간에 있는 마을이 십리하다. 연행사들은 보통 여기서 하루를 묶었다. 봄에 눈과 얼음이 녹으면 길이 온통 진창으로 변해 연행사들이 크게 고생했던 곳이다.
[4] 청석령 슬픈 노래 : 1637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인질이 되어 심양으로 갈 때, 봉림대군이 청석령을 넘으며 불렀다는 시조 “청석령 지나거다 초하구 어드메냐…”를 가리킨다.
[5] 선왕 옛 뜻 : 원문은 소흥(紹興). 옛 뜻을 계승하여 흥하게 한다는 뜻이다. 여기서는 북벌을 계획한 효종의 뜻이 이젠 흔적도 없이 사라졌음을 말한다.
[6] 문소각…음함이라 : 건륭제 때 편찬된 <사고전서>는 총 7질이 만들어져 7곳에 수장되었는데, 심양 고궁에 있는 것은 문소각(文遡閣), 열하의 피서산장에 있는 것은 문진각(文津閣)이라 했다.
[7] 옥새가…일어났네 : 1635 9월에는 몽골에서 원나라의 마지막 황제였던 순제(順帝)의 옥새를 바쳤다. 이는 매우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1636 4월 칭제 건원(稱帝建元:황제라 칭하며 독자적인 연호를 제정함)하여 천하의 중심 국가임을 하늘에 알리고 대내외에 천명했다. 청나라는 몽골의 힘을 이용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몽골 왕실과 통혼하는 한편 그들의 종교를 받아들였다. 이때부터 심양에는 실승사(實勝寺) 등 라마 사원이 건립되었고, 라마교에 대한 우대는 청조 내내 지속되었다.
[8] 청 태종 능 : 원문은 소릉(昭陵). 심양에는 청 태조 누르하지의 두덤인 복릉(福陵)과 소릉(昭陵)이 있는데, 이 소릉은 연행로 가까이에 있어 연행사들의 심회를 자극하곤 했다.
[9] 대호자 : 원문은 호노(瓠老). 박제가의 선조 대호 박로(朴𥶇, 1584~1643)를 말한다. 그는 병자호란을 전후하여 대청 창구의 일선에서 활약했으며, 1637년에는 소현세자의 빈객으로 심양에 머물다가 삼 년 만에 귀국하기도 했다.
[10] 정뇌경 : 1608~1639. 1639년 당시 박로와 정뇌경은 모두 심양에서 소현세자를 모시고 있었다. 이때 함경도 출신으로 청나라의 통역을 담당했던 정명수의 행악이 심했는데, 정뇌경은 그 비리를 청나라 쪽에 고발했다가 도리어 무고를 입어 처형 당하고 말았다. 이때 박로는 신중하게 처신할 것을 주장했으므로, 훗날 사람들이 정뇌경의 공적만 높이 사고 박로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폄하했던 사실을 지적한 것이다.
[11] 경보 벼슬…사양했네 : <택당속집> 5에 실린 <차기노직(次寄魯直)>의 한 구절이다. 민족문화추진회 국역본에 따르면, 첫 구는 서울에 몸담고 있는 박로가 경조윤(京兆尹)으로 멋진 정사를 펼친 한()나라의 조광한(趙廣漢)이나 윤옹귀(尹翁歸)처럼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얼마든지 열려 있다는 말이라고 한다. 또 둘째 구는, 택당 자신은 시종신으로서 임금에게 진언(進言)하는 일을 이제 포기하고 시골로 돌아왔다는 말이라고 한다. 종서(終徐)는 한 무제(武帝)에게 직간(直諫)을 올린 종군(終軍)과 서악(徐樂)을 가리킨다. 흰 기린[白燐]이 잡혔을 때 종군이 상소한 글과 토붕와해(土崩瓦解)의 위험성을 논한 서악의 상소문이 <한서> 65권 하()와 상()에 각각 실려 있다.
[12] 삼신 : 1637년 척화했다는 이유로 심양에 압송되어 처형당한 홍익한•윤집•오달제 세 사람을 가리킨다. 서문은 당시 세 사람이 처형 당할 때 나갔던 문이기 때문에 12구에서 말한 것이다.
[13] 나리 : 나덕헌(羅德憲)과 이확(李廓) 1636 4월 청 태종이 건원 칭제하는 행사에 조선 사신으로 참여했는데, 끝내 황제를 인정하지 않아 온갖 수모를 당하고 귀국했다. 이때 청 태종의 국서를 가지고 오다가 연산관에서 버리고 왔다. 하지만 조선에서는 이들의 행적을 의심했는데, 나중에 사실이 밝혀져 존주사업(尊周事業)에서 그 공로를 인정받았다.
[14] 세 세 신하…증명됐네 : 삼학사가 처형 당할 때 공식적으로 참관한 조선 사람이 없어, 18세기 후반에 이를 때까지 이들의 최후에 대한 이견이 분분했다. 그러다가 1780년경에 간행된 『황청개국방략』을 보고 삼학사가 순사한 날을 알게 되었다는 뜻이다. 삼학사에 관한 기사는 『황청개국방략』권24에 짤막하게 나온다.


(출처 : 정유각집 세트, 돌베개, 2010)



▣ 인물 정보 : 박제가(朴齊家)

[정의]
1750(영조 26)∼1805(순조 5). 조선 후기의 실학자.

[개설]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차수(次修)·재선(在先)·수기(修其), 호는 초정(楚亭)·정유(貞蕤)·위항도인(葦杭道人). 박률(朴栗)의 6대손이며, 아버지는 승지 박평(朴坪)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소년 시절부터 시·서·화에 뛰어나 문명을 떨쳐 19세를 전후해 박지원(朴趾源)을 비롯한 이덕무(李德懋)·유득공(柳得恭) 등 서울에 사는 북학파들과 교유하였다. 1776년(정조 즉위년) 이덕무·유득공·이서구(李書九) 등과 함께 『건연집(巾衍集)』이라는 사가시집(四家詩集)을 내어 문명을 청나라에까지 떨쳤다.
1778년 사은사 채제공(蔡濟恭)을 따라 이덕무와 함께 청나라에 가서 이조원(李調元)·반정균(潘庭筠) 등의 청나라 학자들과 교유하였다. 돌아온 뒤 청나라에서 보고들은 것을 정리해 『북학의(北學議)』 내·외편을 저술하였다. 내편에서는 생활 도구의 개선을, 외편에서는 정치·사회 제도의 모순점과 개혁 방안을 다루었다.
한편, 정조는 서얼들의 누적된 불만을 무마시키려는 정책의 하나로 1777년 3월에 서얼허통절목(庶孽許通節目)을 발표했으며, 1779년 3월에는 규장각에 검서관직(檢書官職)을 설치해 박제가를 비롯한 이덕무·유득공·서이수(徐理修) 등의 서얼 출신 학자들을 임명하였다.
이로부터 13년 간 규장각 내·외직에 근무하면서 여기에 비장된 서적들을 마음껏 읽고, 정조를 비롯한 국내의 저명한 학자들과 깊이 사귀면서 왕명을 받아 많은 책을 교정, 간행하기도 하였다.
1786년 왕명으로 당시 관리들에게 시폐(時弊)를 시정할 수 있는 「구폐책(救弊策)」을 올리게 하였다. 이 때 진언한 소는 주로 신분적인 차별을 타파하고 상공업을 장려해 국가를 부강하게 하고 국민 생활을 향상시켜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청나라의 선진적인 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이 급선무라고 주장하였다.
그 뒤 1790년 5월 건륭제(乾隆帝)의 팔순절에 정사(正使) 황인점(黃仁點)을 따라 두 번 째 연행(燕行)길에 오르고, 돌아오는 길에 압록강에서 다시 왕명을 받아 연경에 파견되었다. 원자(元子: 뒤의 순조)의 탄생을 축하한 청나라 황제의 호의에 보답하기 위해 정조는 한낱 검서관인 박제가를 정3품 군기시정(軍器寺正)에 임시로 임명해 별자(別咨) 사절로서 보낸 것이다.
1793년 정원에서 내각관문(內閣關文)을 받고 「비옥희음송(比屋希音頌)」이라는 비속한 문체를 쓰는 데 대한 자송문(自訟文)을 왕에게 지어바쳤다. 1794년 2월에 춘당대 무과(春塘臺武科)를 보아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1798년 정조는 선왕인 영조가 적전(籍田)에 친경한 지 회갑이 되는 날을 기념하기 위해 널리 농서를 구하였다. 이 때 박제가도 『북학의』의 내용을 골자로 하는 「응지농정소(應旨農政疏)」를 올렸으며, 『소진본북학의(疏進本北學議)』는 이 때 작성한 것이다.
그리고 1801년(순조 1)에는 사은사 윤행임(尹行恁)을 따라 이덕무와 함께 네 번 째 연행길에 올랐다. 그러나 돌아오자마자 동남성문의 흉서 사건 주모자인 윤가기(尹可基)와 사돈으로서 이 사건에 혐의가 있다 하여 종성에 유배되었다가 1805년에 풀려났으나 곧 병으로 죽었다.
박제가가 죽은 연대는 1805년과 1815년 설이 있다. 그런데 스승이며 동지인 박지원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상심해 곧 죽었다는 기록과, 1805년 이후에 쓴 글이 보이지 않는 점 등으로 보아 1805년에 죽었다고 볼 수 있다. 묘는 경기도 광주에 있다.
아들은 박장임(朴長稔)·박장름(朴長廩)·박장엄(朴長馣) 등 셋인데 막내아들 박장엄은 유득공의 아들 유본예(柳本藝)·유본학(柳本學) 형제와 함께 순조 때 검서관이 되었다.
시·그림·글씨에도 뛰어난 재질을 보여, 청대(淸代) 『사고전서(四庫全書)』 계열 학자들과의 교류를 통해 우리 나라에 처음으로 대련 형식(對聯形式)을 수용하였다. 뿐만 아니라 글씨는 예서풍을 띠고 있으며 조선 말기의 서풍과 추사체의 형성에 선구적 구실을 하였다. 구양순(歐陽詢)과 동기창(董其昌)풍의 행서도 잘 썼으며 필적이 굳세고 활달하면서 높은 품격을 보여준다.
그림은 간결한 필치와 맑고 옅은 채색에 운치와 문기(文氣)가 짙게 풍기는 사의적(寫意的)인 문인화풍의 산수·인물화와 생동감이 넘치는 꿩·고기 그림을 잘 그렸다.
유작으로 「대련글씨」·「시고(詩稿)」·「목우도(牧牛圖)」·「의암관수도(倚巖觀水圖)」·「어락도(魚樂圖)」·「야치도(野雉圖)」 등이 있다. 저서로는 『북학의(北學議)』·『정유집(貞蕤集)』·『정유시고(貞蕤詩稿)』·『명농초고(明農草藁)』 등이 있다.
 
[참고문헌]
『정조실록(正祖實錄)』
『순조실록(純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오세창, 계명구락부, 1928)
『한국의 미』 6-서예-(임창순 책임감수, 중앙일보계간미술, 1981)
『한국의 미』 12-산수화 하-(안휘준 책임감수, 중앙일보계간미술, 1982)
『한국의 미 』18-화조사군자-(정모 책임감수, 중앙일보계간미술, 1985)
『조선후기 문화운동사』(정옥자, 일조각, 1988)
「정유박제가연구」(김용덕, 『중앙대학교논문집』 5, 1961)
「박제가의 북학의」(이성무, 『실학연구입문』, 일조각, 1973)
「박제가」(이을호, 『한국의 인간상』 4, 신구문화사, 1980)
「추사서파고」(최완수, 『간송문화』 19, 1980)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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