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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ipziger Buchmesse > LBM 2017 전시도서 > 심양장계(瀋陽狀啓)[박로]

 
심양장계(瀋陽狀啓)[박로]
상품명 : 심양장계(瀋陽狀啓)[박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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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책(포갑포함), 2017 라이프치히 도서전 전시도서
     
 

家文을 찾아서 : 밀양박씨편①
『≪韓琴新譜≫와 마포 水明亭 이야기』관련문헌

▣原本 書誌

-도서명 : 瀋陽狀啓(副本)
-편저자 : 大瓠 朴𥶇(박로,1584~1643) 等[侍講院(朝鮮) 編]
-판본사항 : 筆寫本
-간행년 : 17世紀 前半[仁祖15-21年:1637-1643]
-간행자 : 未詳
-책권수 : 10冊
-책크기 : 35×22.9cm
-청구기호 : 奎貴 1878-v.1-10

*본 도서는 수명정 2대 중축자 大瓠(대호) 朴𥶇(박로)[1584~1643] 관련 기록문헌이다.

심양장계는 심양의 시강원에서 본국의 승정원으로 보낸 장계를 모아 놓은 것이다. 정축년 2월 첫 장계부터 기묘년 10월 17일 박로가 병으로 귀국하게 될 때까지의 장계는 거의 모두가 박로의 글이다.
소현세자가 심양에 인질로 있을 때, 박로는 인조의 간곡한 부탁으로 세자 빈객으로 동행하여 보필하였다. 인조가 청 태종에게 굴욕적인 항복을 하고 나서 도성 궁궐로 돌아가려고 배에 오를 때, 일부 신하는 임금의 옷자락을 잡아 끌며 서로 먼저 타려 했다는 내용이 인조실록에 있다. (인조실록 34권 인조15년 1월 30일) 당시 서인/남인 공동정권의 행태를 엿보는 사례이다. 척화를 내세웠던 김상헌, 신익성 등은 남한산성을 나올 때 인조를 수행하지 않고 야반도주를 하였다. 그러한 정세에서 인조는 3차례 심양에 다녀와 그곳의 사정을 잘 아는 박로를 불러 侍講院의 世子賓客으로 삼아 세자 보필을 부탁한다.

臨發上召見公慰諭曰。卿久陷虜陣。僅得生還。而今又遠役。雖非體下之道。念儲嗣沖弱。虜情叵測。調護之任。彌縫之責。捨卿其誰。天語丁寧。有使感泣。
출발에 임박하여 임금께서 공을 불러 보시면서 위로하시기를, “경이 오랫동안 적진에 붙잡혀 있다가 겨우 살아 돌아왔는데 이제 다시 멀리 보내는 것이 아랫사람을 대우하는 도리가 아니다. 생각하건대 세자는 나약하고 오랑캐의 정세는 헤아리기 어려우니, 보살피는 도리와 彌縫(미봉)하는 책임을 경 말고 그 누구에게 맡기겠는가?” 하셨는데 임금님의 말씀이 아주 간곡하여 감격해 울음이 나오게 했다.

박로는 집안 식구들의 생사 여부를 물을 겨를이 없이 곧바로 재신의 임무로 길을 떠났다.

世子見公衣裳破裂。特賜衣帶。旣行。行中大小之事。委公周旋。及到瀋陽。淸人之恐喝不止。需索無限。公能隨事應變。不至生梗。且數開書筵。不廢勸講。裨益甚多。
세자께서 공의 옷이 찢어지고 해진 것을 보고는 특별히 衣帶를 하사하셨으며 출발하여서는 行中의 크고 작은 일을 모두 공에게 맡겨 두루 돌보도록 했다. 심양에 도착하자 청나라 사람들의 공갈이 그치지 않고 요구함이 한정 없었으나 공이 중간에서 그때그때 잘 대처하여 事端이 일어나지 않았다. 또 자주 書筵을 열어 공부를 폐하지 않아서 도움되는 바가 심히 많았다.

<朴𥶇 行狀>

 

박로는 남한산성에 주둔한 청나라 진영에서 40여일간 서리와 눈을 맞으며 농성을 한 상태에서 68일간의 심양으로 가는 볼모행을 곧바로 떠나게 된다. 이때의 苦行으로 심양에서 피를 토하는 병을 얻어 3년후 1639년 10월 세자에게 하직인사를 올리고 귀국하게 된다. 이후 4년간 경기감사, 병조 참판, 도승지를 지냈으나 끝내 병으로 생을 마감했다. 향 60세.

≪瀋陽日記(심양일기)≫[일명 講院日記]는 정축년(인조 15, 1637) 1월 30일 인조가 남한산성 西門을 나오는 것을 시작으로 매일 시강원에서 기록한 일기이다. 1년 1책, 8년간 8책으로 되어 있다. 이 기간 동안 정기적으로 승정원에 장계를 올려 조정에 경과 보고를 한 것이 ≪瀋陽狀啓(심양장계)≫(10책)이다. 2책 모두 초기 업무를 도맡아 진행한 사람이 박로였다.

서인/남인 공동정권의 척화파들에게 심양은 세자마저 죽어야 끝나는 일로 왜곡 변질되었다. 그 최대 피해자 중 한 분이 박로이다. 정뇌경을 죽게 한 장본인이라 날조하여 간신배로 낙인을 찍어 버린 것이다. 비견하자면 일제시대때 친일파, 한국전쟁 후 빨갱이 논쟁처럼 심양 관련자는 정쟁의 좋은 소재였던 것이다. 이 책을 보면 왜곡 날조된 심양에서의 사건 사고, 특히 정뇌경의 '역관 제거 미수 사건'에 대해 진실을 알 수 있다.

▣목록

瀋陽狀啓 왕력 간지 월일
1冊 仁祖 15(1637)  丁丑 2月~12月 28日
*재신 박로(52세) 심양 동행
2冊 仁祖 16(1638)  戊寅 正月 7日~9月 3日, 同年 9月 3日~12月 23日
3冊 仁祖 17(1639)  己卯 正月 8日~9月 10日
*10월 17일 재신 박로(54세) 병으로 귀국행
4冊 仁祖 18(1640)  庚辰 2月 25日~12月 19日
*2월 29일 승지 박로(57세) 소현세자 재회
5冊 仁祖 19(1641)  辛巳 正月 10日~4月 12日, 同年 4月 19日~8月 28日 
6冊 仁祖 19(1641)  辛巳 9月 2日~12月 25日
*12월 12일 반송사 박로(58세) 소현세자 재회
7冊 仁祖 20(1642)  壬午 正月 5日~8月 10日
8冊 仁祖 20(1642)  壬午 8月 17日~12月 26日, 同年 10月 10日~11月 10日
9冊 仁祖 21(1643)  癸未 正月 4日~5月 14日
10冊 仁祖 21(1643)  癸未 6月 9日~12月 15日
*6월 22일 병조참판 박로 卒(享60)


▣영인본 견본


<비단 표지>



▲丁丑(仁祖 15, 1637) 2월, 宰臣 朴𥶇(박로, 54세)가 파주를 지나서 보낸 첫 장계



▲己卯(仁祖 17, 1639) 9월 10일, 宰臣 朴𥶇(박로, 56세)의 腫症이 심각함을 알리는 장계

▲文學 정뇌경(鄭雷卿)과 司書 김종일(金宗一)의 신문 조목 : 역관 정명수,김돌시 제거 음모에 대한 진술서.

“…이 일은 신들(정뇌경, 김종일)이 본디 성질이 어리석고 망령되며 경솔하고 천박하여 관중의 상하 인원에게 의논하지 않고 문득 이용(李龍)의 감언에 속아 작은 분노를 참지 못하였기 때문에 국가에 큰 욕을 끼친 것입니다. 바라옵건대, 빨리 신들(정뇌경, 김종일)의 죄를 바루어 뒷사람의 경계가 되게 하소서.” [己卯(仁祖 17, 1639) 1월 28일 장계] *하단 심양일기/심양장계 ‘정뇌경’ 관련 전문 참조 바람



▣해제

인조 때 昭顯世子와 鳳林大君(뒤에 孝宗, 淏)이 從臣과 함께 1637년(仁祖 15)~1643년 淸의 瀋陽에 볼모로 있을 때 從行한 侍講院 宰臣 講官 등을 통해 承政院에 보낸 8년간의 狀啓의 謄錄이다.

本書는 이 등록을 다시 謄寫·整理한 副本 10책이다. 본서의 저본이 되는 正本[奎 9918]은 별도로 있다. 正本은 크기가 다르며 筆致 行數가 일정치 않고, 題字나 目次도 들어있지 않다. 이에 비해 본서인 副本은 筆致와 冊型이 동일하며 正本의 行•草書를 楷書로 바꿨다. 正本은 蠹損•殘破하여 文字가 없어진 곳이 있으며 副本에는 正本중에 文字가 없어진 곳은 空格으로, 誤字•脫字는 교정해 놓았다. 正本에는 같은 狀啓가 여러 번 나오며 日次의 앞뒤가 바뀐 것이 있는 데 副本에서는 이를 정리하여 실었다. 正本•副本에는 모두 <侍講院印>이 찍혀 있다.

昭顯世子 일행은 丁丑年 三田渡에서 항복한 후 和約의 조건에 의해 瀋陽에 볼모로 갔는데 昭顯世子를 비롯, 鳳林大君•麟坪大君•龍城大君 등과 從員 등 186명이었다. 世子 일행이 머문 瀋陽館에서는 일의 크고 작음을 막론하고 承政院에 狀啓를 보내서 本國政府의 지휘를 받고, 때로는 平安監司•義州府尹에게 世子의 명으로서 臨機措置를 명하였었다.

내용은 侍講院 宰臣이 ① 世子大君 이하 從臣의 동정, ② 淸衙門과의 교섭, ③ 瀋陽의 상태, ④ 혹은 明과의 관계에 대하여 견문한 것에 한정하여 探聞詳報한 것으로 모두 承政院 앞으로 보낸 것이다. 따라서 同日에도 여러 통의 장계를 발송하기도 하고 비밀로 했던 것이 있기도 하다. 이중 <侍講院開拆>이라고 한 것은 回轅•獵行•從征行 등을 위하여 世子가 瀋陽에 不在中 瀋陽에 留守한 官員이 陪往한 侍講院 宰臣 앞으로 狀達한 것이다. 昭顯世子 일행이 瀋陽에 도착한 1637년(仁祖 15년) 4월부터 그가 귀국을 허락받은 1644년 8월에 이르기까지 王世子 및 鳳林大君은 모두 2회의 귀국을 허락받았다. 또한 2회의 征明役從軍, 수 차례의 獵行이 있었다.

수록된 시기를 책별로 보면, 제1책 : 1637년(仁祖 15) 2월~12월 28일. 제2책 : 1638년 1월7일~9월 3일, 1638년 9월 3일~12월 23일. 제3책 : 1639년 1월 8일~9월 10일. 제4책 : 1640년 2월 25일~12월 19일. 제5책 : 1641년 1월 10일~4월12일, 4월 19일~8월 28일. 제6책 : 1641년 9월 2일~12월 25일. 제7책 : 1642년 1월 5일~8월 10일. 제8책 : 1642년 8월 17일~12월 26일, 同年 10월 10일~11월 10일 사이에 올린 留館啓가 수록되어 있다. 제9책 : 1643년 1월 4일~5월 14일. 제10책 : 1643년 6월 9일~12월 15일이다.

수록된 내용 중 중요시되는 문제는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① 明末•淸初에 있어 朝鮮의 外交史料로서 귀중한 것이며 이 당시 외교관계는 본서와 ≪瀋陽日記≫•≪備邊司謄錄≫ 등을 함께 비교해 보아야만 그 미묘한 관계를 정확히 알 수 있다.
② 淸初의 瀋陽의 상태는 元으로부터 滿洲八旗를 비롯하여 淸의 宮室의 일에 이르기까지 실로 상세히 기록되어 있으며 특히 소박한 滿洲貴族의 생활의 진면목이 잘 표현되어 있다.
③ 明과의 관계, 특히 山海關부터 北京에까지 이르는 방면의 淸軍의 동정을 보고하고 있다. 또한 椵島와의 관계, 朝鮮의 征明參加 등의 사건도 상세히 수록되어 있다.
④ 捕虜의 送還, 走回人•向化人의 刷還, 瀋陽 및 義州에 있어서의 교역 특히 南草(煙草)•紙地 등의 매매에 관한 것은 그 연혁과 경과를 상세히 알려주고 있다.
⑤ 淸皇室의 후계자 및 다른 諸王과의 관계가 잘 탐문되어 있어 淸朝史의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⑥ 朝鮮과 日本과의 관계, 淸이 日本과 교통하려고 한 의도같은 것도 산견되고 있다.
⑦ 淸과 蒙古와의 관계, 蒙古人에 대한 태도 등을 알 수 있는 자료가 적지 않다.
⑧ 그 밖에 世子•大君 이하 隨員의 동정과 일상생활 등을 알 수 있다. 본서에는 滿洲 및 蒙古의 職名•地名•人名 표기에 一律性이 없이 거의 모두 비슷한 음을 가진 글자로 표시하거나 각각 俗名으로 쓰여진 것도 있다. 볼모로 있었던 마지막 해인 1644년(甲申) 부분이 빠져있고 중간에도 더러 逸脫이 있으나 이 관계 기록으로 가장 값진 것이 된다 하겠다.(출처 : 규장각한국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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