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家文을 찾아서 > [밀양박씨]① ≪韓琴新譜≫와 마포 水明亭 이야기 > 비천선생박공신도비명(泌川先生朴公神道碑銘)[박이서]

 
비천선생박공신도비명(泌川先生朴公神道碑銘)[박이서]
상품명 : 비천선생박공신도비명(泌川先生朴公神道碑銘)[박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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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책[합본], 2017 라이프치히 도서전
     
 

家文을 찾아서 : 밀양박씨편①
『≪韓琴新譜≫와 마포 水明亭 이야기』관련문헌


*본 도서는 수명정 1대 건립자 泌川(비천) 朴彛叙(박이서)[1561~1621] 관련 기록문헌이다.


▣ 原本 書誌
-도서명 : 泌川先生朴公神道碑銘[탁본]
-비명 : 朴彛叙神道碑(박이서신도비)
-시대 : 조선
-연대 : 1641년(인조 19)
-유형/재질 : 비문 / 돌
-크기 : 85 x 200 x 21cm   
-출토지 : 경기도 양주시 회정동 산44번지 비암산(鼻巖山) 선영(先塋)
-소재지 : (일본)경도대학(京都大學)
-서체 : 해서(楷書)
-찬자/서자/각자 : 이식(李植) / 박미(朴瀰) / 미상

▣原本 書誌
-도서명 : 澤堂先生集
-편저자 : 李植(이식, 1584-1647) 著
-판사항 : 목판본
-발행사항 : [발행지불명] : [발행처불명], 영조 23(1747)
-형태사항 : 本集10卷, 續集6卷, 別集18卷, 拾遺, 共17冊 : 四周雙邊 半郭 22.8 x 15.4 cm, 有界, 10行20字 註雙行,
                 上2葉花紋魚尾 ; 32.3 X 20.9 cm
-주기사항 : 表題: 澤堂集, 版心題: 澤堂集, 書根題: 澤堂
          序: 崇禎紀元之閼逢攝提格(甲寅, 1674)陽月日恩津宋時烈(1607-1698)序
          拾遺末識: 崇禎紀元後再丁卯(英祖 23, 1747)正月不肖曾孫崇政大夫……平壤府尹[李]箕鎭(1687-1755)謹識
-현소장처 : 미국 버클리대학교 동아시아도서관
-청구기호 : 39.68

▣原本 書誌
-도서명 : 家藏紀史
-편저자 : 未詳
-판사항 : 필사본
-발행사항 : 未詳
-형태사항 : 1冊(47張)
-주기사항 : 丙寅七月晦日謄草一件見失故改爲謄出…
-현소장처 : 朴商應[충청북도 충주시]

▣原本 書誌
-도서명 : 密陽朴氏家藏
-편저자 : 未詳
-판사항 : 필사본
-발행사항 : 未詳
-형태사항 : 1冊(59張)
-현소장처 : 朴商應[충청북도 충주시]

▣인물 소개
 
-姓名 : 朴彛叙(박이서)
-初名 : 文叙
-字 : 錫吾
-號 : 泌川,東皐
-本貫 : 密陽
-生沒年 : 명종 16(1561)~광해군 13(1621)
-曾祖 朴渙[通禮院通禮], 祖 朴德老[活人署別提], 父 朴栗[司憲府掌令]
-母 完山李氏[李春福의 女], 妻 廣州李氏[李士栗의 女]
-宣祖 21(1588) 戊子 謁聖試 丙科[28세]
-소북(小北) 칠학사(七學士)의 한 분. 당색에 구애없이 一松 沈喜壽(심희수), 鵝溪 李山海(이산해)[大北], 梧陰 尹斗壽(윤두수), 仙源 金尙容(김상용)[西人], 漢陰 李德馨(이덕형), 愚伏 鄭經世(정경세)[南人]와 깊은 교유.

박이서(朴彛叙)는
1588년(선조 21)에 알성문과(謁聖文科)에 병과로 급제, 성균관 학유(成均館學諭)•군자감 참봉(軍資監參奉)을 거쳐 승문원 주서(承文院注書)가 되어 사관(史官)을 겸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병조 좌랑(兵曹佐郞)으로 분조(分朝)를 배종(陪從)하고, 순찰사 이정암(李廷馣)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해서(海西)의 군량을 담당하였다. 그 뒤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예조 좌랑(禮曹佐郞)을 지냈다.
1596년 해서 독운어사(海西督運御史)가 되었다가 돌아와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가 되었다.
1599년 이이첨(李爾瞻)•홍여순(洪汝諄) 등의 세력이 강대해지자 탄핵하였다가, 이로 인하여 남이공(南以恭)•김신국(金藎國)과 붕당을 만든다고 탄핵받아 관작을 빼앗기고 여주에서 8년간 은둔하였다.
1607년 대사령(大赦令)으로 복직되어 장악원 첨정(掌樂院僉正)이 되고 부응교(副應敎)를 옮겼다. 
1609년(광해군 1) 우부승지(右副承旨)•호조 참의(戶曹參議)•부제학(副提學)이 되었다. 
1610년 형조 참의(刑曹參議)•이조 참의(吏曹參議)•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 등을 역임하였다. 그 뒤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담양 부사(潭陽府使)•이조 참판(吏曹叅判)•동지 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도총부 부총관(都摠府副摠管) 등 여러 관직을 지냈다. 
1613년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비론(廢妃論)에 반대하여 여러 차례 대북파(大北派)를 탄핵하였다. 
1615년 “국법을 무시하고 오직 자기의 당파인 소북파만 감싸고 동료들의 의견을 무시한다.”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삭직되었다.
1616년 홍문관 수찬으로 유생들의 폐비론(廢妃論) 상소를 주도했던 아들 박로(朴𥶇)와 함께 혼탁한 정쟁에서 ‘더러운 자취를 남기지 않겠다’는 뜻으로 두보(杜甫)의 시에 나오는 ‘수명(水明)’이란 말을 취하여 마포에 ‘수명정(水明亭)’ 정자를 짓고 세상과 거리를 두었다.
1618년 다시 서반직(西班職)으로 복직, 영광 군수(靈光郡守)로 나갔으나 이이첨(李爾瞻)과 사돈지간이였던 전라도관찰사 이창후(李昌後)가 탐학(貪虐)한 짓을 자행하자, 공이 그 밑에 있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 나머지 병을 칭탁하고 파면되어 돌아왔다.
1620년 진위사(陳慰使)가 되어 명(明)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던 중 풍랑을 만나 바다에서 목숨을 잃었다.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그는 당색에 연연하지 않고 당대 명망있는 학자들과 교유하였다. 서인의 거두 김상용과는 동갑계 모임으로 부친 박률(朴栗)의 신도비(神道碑) 두전(頭篆)을 써 줄 만큼 두터웠다.  고려말 가정(稼亭) 이곡(李穀), 목은(牧隱) 이색(李穡) 부자로부터 인연을 이어온 韓山李氏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 석루(石樓) 이경전(李慶全)[大北] 부자 그리고 부친 박률(朴栗)의 과거 동방인 海平尹氏 오음 윤두수, 치천(稚川) 윤방(尹昉)[서인] 부자와도 대를 이어가며 세교하는 관계였다.
비천은 홍문관 교리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원흉인 유성룡을 탄핵했지만 김성일과 유성룡의 제자 정경세와는 홍문관 동료로서의 친분이 두터웠고 그의 종가에서 보관해 오던 ≪선현필첩(先賢筆帖)≫에서 비천이 써준 친필시가 발견되었다. 정경세가 유성룡의 행장을 지으며 당시 탄핵 사건을 언급할 때 당사자를 거명하지 않고 관례적 어투로 기술했다. 비천은 유독 택당(澤堂) 이식(李植)을 매우 아꼈다. 아들 박로의 둘도 없는 친구였기도 했지만 그의 학식을 높이 샀기 때문이다. 폐비론에 반대했던 택당에 대해 대북파들의 중상모략으로부터 구명을 해주었다. 이 때의 인연으로 德水李氏 후손들은 당색은 다르지만 대(代)를 거듭하며 세교(世交)를 이어갔다. 비천은 택당에게 수명정 정자의 기문(記文)을 부탁했지만, 명나라 사신행 중에 바다에서 목숨을 잃게 되었다. 택당은 기문을 대신하여 박이서의 신도비를 짓게 되었다.

*소북 칠학사(小北七學士) : 동인(東人) 중 한양과 경기 일대에 거주하던 소북 계열의 학자들이다. 김신국(金藎國), 이필형(李必亨), 박이서(朴彛), 송일(宋馹), 남이공(南以恭), 박경업(朴慶業), 최동립(崔東立)이 그들이다. 보외(補外)로 이필영(李必榮), 이덕형(李德泂), 경섬(慶暹)이 추가되어 10인이 되었다. 임진왜란 후 정권을 잡은 이이첨, 홍여순에 의해 배척되어 8년간 여주 일대에 은거할 때, 이들의 학문이 일취월장하여 사림(士林)들이 붙힌 호칭이다.



*영인본 견본
 

<비단 표지>

▲마포 수명정(水明亭)의 1대 건립자 박이서(朴彛叙)의 비문 탁본





박이서의 字 錫吾(석오)가 비석 탁본에 정확하게 나온다. 아래 송시열이 편집한 ≪택당집≫의 叙吾(서오)는 틀린 것이다. 





송시열이 ≪택당집≫을 편집하면서 박이서의 字를 바꿔치기 했다. 錫吾(석오)가 정확하다. 위 탁본 참조.
선비가 이름자를 훼손하는 것은 만행이다. 정치인 송시열의 음흉한 조작 사례이다.











▣해제

마포 수명정(水明亭)의 건립자, 비천(泌川) 박이서(朴彛叙)의 신도비(神道碑) 탁본과 비명이다.
찬자는 이식(李植, 1584~1647)이고, 글씨는 박미(朴瀰, 1592~1645)이며, 전서(篆書)도 박미가 썼다. 1641년(인조 19)에 세워졌다.
박이서(1561~1621)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밀양이다. 초명은 문서(文叙), 자는 석오(錫吾), 호는 비천(泌川)·동고(東皐)이다. 소북(小北) 칠학사(七學士)의 한 분이다. 1588년(선조 21)에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 성균관학유·군자감참봉을 거쳐 승문원주서가 되어 사관을 겸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병조좌랑으로 분조(分朝)를 배종(陪從)하고, 순찰사 종사관이 되어 해서의 군량을 담당하였다. 그 뒤 사간원정언·예조좌랑을 지내고, 1596년 해서독운어사(海西督運御史)가 되었다가 돌아와 홍문관교리가 되었다. 1599년 이이첨(李爾瞻)·홍여순(洪汝諄) 등의 세력이 강대해지자 탄핵하였다가, 이로 인하여 남이공(南以恭)·김신국(金藎國)과 붕당을 만든다고 탄핵받아 관작을 빼앗기고 여주에서 8년간 은둔하였다. 1607년 대사령(大赦令)으로 복직되어 장악원 첨정이 되고 부응교를 거쳐 1609년(광해군 1) 우부승지·호조참의·부제학, 다음해 형조참의·이조참의·충청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그 뒤 첨지중추부사·담양부사·이조참판·동지성균관사·도총부부총관 등 여러 관직을 지내고, 1613년 폐모론이 대두된 뒤 여러 차례 대북파를 탄핵하다가 1615년 “국법을 무시하고 오직 자기의 당파인 소북파만 감싸고 동료들의 의견을 무시한다.”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삭직되었다. 뒤에 서반직으로 복직, 영광군수로 나갔으나 전라도관찰사 이창후(李昌後)의 탐학에 실망하여 병을 핑계하고 사직하였다. 그러나 다시 복직되어 1620년 진위사(陳慰使)가 되어 명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던 중 풍랑을 만나 바다에서 목숨을 잃었다.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신도비의 내용은 박이서의 세계(世系)와 역임한 관직, 지업(志業)과 내행(內行)을 상세히 기록하였다. 아울러, 어릴 때부터 장성할 때까지 어느 문하에서 수학을 하였는지와 당대 어느 문인들과 교유를 하였는지도 수록하였다. 후반부에는 숙인(淑人)의 소개와 후손들의 사적들도 함께 기록하였다.

*참고문헌 :   
(논문)김우림, 「서울·경기지역의 朝鮮時代 士大夫 墓制 硏究 」,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7
(논문)趙連美,「朝鮮時代 神道碑 硏究」, 숙명여자대학교대학원, 1999
(논문)김우림,「조선시대 신도비 · 묘비 연구」, 고려대학교대학원, 1998

家文을 찾아서 : 밀양박씨편①
『≪韓琴新譜≫와 마포 水明亭 이야기』

▣인물 연구<4> : 泌川(비천) 朴彛叙(박이서)

水明亭, 400년전 마포 제일의 정자이자 名士들의 ‘사교장’이었다.

수명정의 위치는 朴彛叙[1561(明宗 16)∼1621(光海君 13) 향 61歲]의 本家가 자리한 崇禮門(숭례문) 밖 南池 옆 桃楮洞(도저동)[현재 서울역 건너편 남산 자락]에서 출발하여 船橋를 건너 靑坡 고개를 넘어 도착하는 곳, 八道의 産物이 집결하는 곳, 마포 한강변의 높은 언덕이다. 정자에서 바라다 보는 전경이 <수명정기>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都城圖 1>  東國輿圖 중 '도성도', 1800~1822年間作 추정, 47.0×66.0cm,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마포 주변 부분 확대

▲<都城圖 2> 輿地圖(3帖 1軸, 寶物 제1592호) 중 ‘都城圖’, 1789年以後作 추정, 31×21.5cm,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숭례문 밖 남지, 도저동, 선교, 청파(이전 거주지. 이곳에서 대호 박로 출생)

▲<都城圖 3> 大東與地圖 중 '都城圖', 金正浩 編, 목판본에 채색. 1861年, 30.2×20.1cm,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崇禮門 밖 桃楮洞(도저동) 본가, 敦義門 밖 芹洞(근동)*朴道翔(박도상) 거주

▲<南池耆老會圖>(1629) 南池(남지)에 있는  친구 홍사효의 집   


▲<二水亭> 鄭敾 作(1742). 마포 일대 모습. 수명정을 건립한 박이서의 동갑계 친구 漢陰 李德馨(이덕형)의 정자이다. 현재 사라진 마포 수명정의 모습을 가늠해 볼 그림이다. 수명정은 1616년(광해군 8) 건립되어 5대 승계자인 ≪韓琴新譜≫의 편저자 규재(奎齋) 박윤동(朴胤東)이 거주한 이후 1758년(영조 34) 靑莊館 이덕무(李德懋)가 水明亭에 거주하며 공부했다는 것이 마지막 기록이다.


▲≪東州集(동주집)≫ <水明亭記>

漢濱地多形勝。升三浦之峯。試旋目而望焉。自銅津, 露梁, 瓦丘, 龍山。下至玄石, 西江, 竹里。十數里間。其倍高臨深遙山近陼。平鋪闊遠之致大都一槩。而三浦居其中。猶登龍斷者罔市利。一游矚而上下之美盡焉。 則漢濱之勝。三浦固已專之矣。

한강 물가에는 경치 좋은 곳이 많으니 三浦[麻浦]의 봉우리에 올라서서 바라보면 銅雀津(동작진), 露梁津(노량진), 瓦丘(와구), 龍山(용산)으로부터 시작하여 아래로 玄石(현석), 西江(서강), 竹里(석리)에 이른다. 10 몇 리 사이 그 뒤에는 멀리 높은 산이 물 가까이에 있어서 멀리 넓게 펼쳐진 큰 도성이 대강 보이고 삼포가 그 가운데에 있다. 높은 언덕에 올라가면 시장의 이익을 독차지할 수 있고 한번 눈을 돌려 바라보면 위아래의 경치를 다 볼 수가 있어 한강가의 경치로는 삼포가 제일이라고 할 수 있다.
<수명정기>



수명정을 지은 박이서는 小北의 七學士 중 한 분이며 사행길에 목숨을 잃은 忠臣이다.

仁穆大妃(인목대비) 폐비론이 등장할 때, 이조 참판 겸 동지의금부사였던 박이서는 홍문관의 수찬직에 있던 아들 박로를 통해 젊은 관료들과 성균관 유생들로부터 반대 상소를 올려 폐비론을 막아보려 했다. 죄없이 무고되어 고초를 받는 관료들을 구명했다. 그 중 한 사람이 자신의 비문을 쓰게되는 澤堂 李植(이식)이다. 이식은 아들 박로의 막역한 친구이자 총망받던 학자였다. 사느냐 죽느냐의 기로에서 도와준 생명의 은인이였다. 두 부자의 노력은 파직으로 끝났다. 李爾瞻(이이첨) 일파는 박로의 丈人 權曄(권엽)의 죄목에 두 부자를 연좌시켜 조정에서 몰아냈다. 이즈음에 지은 것이 수명정이다.

박이서가 수명정을 짓게 된 사연이 <朴彛叙 神道碑銘>에 자세히 나온다.

<증 이조판서 비천선생 박공 신도비명>*택당 이식 撰, 분서 박미 書篆

萬曆庚申冬。泌川朴公。以泰昌升遐陳慰使。將赴燕前一日。植自鄕來謁。公留與語。至夜曰。吾見子某文 適契吾意。今願竊有請也。吾新作亭麻浦上。取老杜詩義。扁以水明。朝夕遊焉。今雖遠役。歸便納祿。將老於是矣。子其爲我記之。仍列敍平昔仕宦序次。錄于一紙以付曰。亭記不須盡擧此。但欲子之知吾心迹有以闡揚焉耳。植敬諾而退。顧重其托。久未就。明年夏。公卒于海中。植聞之大慟。覆視舊紙。宛然一行狀也。嗚呼異哉。…

“萬曆 경신년(광해군 12, 1620) 겨울, 비천 박공이 태창이 승하한 데 따른 진위사의 사명을 띠고 燕京으로 떠나는데, …<중략>… “내가 麻浦 위에 새로 정자 하나를 지었는데, 老杜[杜甫]의 시에 나오는 뜻을 취하여 水明(수명)이란 편액을 내걸고는 아침저녁으로 거기에서 노닐고 있다. 지금 비록 먼 길을 떠나지만, 다시 돌아와서는 곧바로 벼슬을 그만두고 여기에서 老年을 보내려고 하니, 자네가 나를 위해 記文을 지어 주었으면 한다.” 하였다 …<중략>… 이듬해 여름에 공이 그만 바다에서 목숨을 잃고 말았다. 李植은 그 소식을 듣고 크게 슬퍼하며 옛날의 그 종이를 다시 찾아 들여다보니, 완연한 하나의 行狀이었다. 아, 이 얼마나 기이한 일인가…”
<朴彛叙 神道碑銘>

수명정의 기문을 부탁한 것이 공의 비문이 될 줄을 기이하게 여겼던 것이다. 이와 관련된 글이 하나 더 있다. 박이서와 평생을 동고동락할 만큼 친분이 돈독했던 竹窓 李德泂(이덕형)의 ≪竹窓閑話(죽장한화)≫에 있는 박이서의 사행길에 대한 일화이다.

<義州北京使行路> 육로 사행길

<朝天航海圖>(1624, 李德泂) 해로 사행길

≪竹窓閑話(죽장한화)≫

朴參判彛叙字錫吾。忠厚善良。篤於朋友。與余最親。己未冬余以黃海監司遞來。翌日早朝錫吾來見。坐語良久。適盲人池億千又來。錫吾曰此盲善卜。欲見久矣。以小紙書給五條曰令須問之。余略敍寒暄。卽以錫吾五條問之。池肓曰來辛酉年不吉。余又問曰所謂不吉乃尋常厄患耶。池盲曰以卜書推之似是大厄。余甚無聊。錫吾察余色辭。始親問曰此吾命也。辛酉當有死亡之患耶。池盲素老神。旋答曰更思之。辛酉有吉星來救。當有膝下之痛。七十五六歲運盡云云。錫吾更不問而起去。余又問之。則曰辛酉必有橫死之厄。似難免矣。錫吾果於庚申秋赴京。以奴胡陷遼路梗。由水路出來。辛酉五月。渰海而沒。池盲之言果驗矣。後甲子余以奏請使由水路赴京。祭錫吾於海邊。乙丑四月竣事回到登州。登船之夜夢錫吾以壺酒來餞。慇懃敍話宛如平日。覺來不勝感愴。舟行六日少無風波之險。來泊我國地方。豈非錫吾之靈默佑而然也。平生相厚之義無間幽明。嗚呼悲哉。錫吾弱冠登第。官至吏曹參判。方有重望。人皆以公輔期之。至於渰死。不幸之尤甚。而以錫吾之賢。而乃至於此。豈非命也。嗚呼悲哉。其胤𥶇今爲參判。良可慰也。

참판 朴彛叙(박이서)의 字는 錫吾(석오)로, 忠厚(충후)하고 善良(선량)하고 친구로 독실히 지냈는데 나와 가장 친하였다. 기미년(광해군 11, 1619) 겨울에 내가 황해 감사로 있다가 벼슬이 바뀌어 돌아오니, 그 이튿날 석오가 찾아왔다. 그와 한참 동안 앉아서 이야기하는데 마침 맹인 池億千(지억천)이 또 왔다. 석오는 말하기를,
“이 맹인이 점을 잘 친다기에 내가 보고자 한 지가 오래일세.”
하고는, 조그만 종이에 다섯 가지 조목을 써서 주면서 나더러 물어 보라는 것이다. 나는 대강 인사를 끝내고 나서 곧 석오가 써 준 다섯 가지 조목을 물어보니, 池盲人은 말하기를,
“오는 신유년이 불길합니다.”
했다. 나는 또 묻기를,
“소위 불길하다는 것은 심상한 厄患(액환)인가?”
했더니, 지맹인은,
“점괘로 보면 큰 화액일 듯합니다.”
했다. 나는 듣고 몹시 무료했다. 석오는 나의 얼굴빛을 살펴보더니 비로소 자기가 친히 묻기를,
“이것은 바로 나의 운수요. 그런데 신유년에는 마땅히 죽을 운수란 말이요?”
하니, 지맹인은 본래 老神한 사람이라, 얼른 대답하기를,
“다시 생각해 보니 신유년에는 吉星이 구해주어서 슬하에 슬픈 일이 있겠고 75ㆍ76세에 명이 다하겠습니다……”
했다. 석오는 다시 더 묻지 않고 일어나 가버렸다. 그가 간 뒤에 내가 또 물었더니, 그는 말하기를,
“신유년에 반드시 횡사할 액운이 있는데, 아마 면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하였다.
석오는 과연 경신년 가을에 중국 서울에 가는데, 오랑캐가 遼東(요동) 길을 막는 바람에 수로로 가다가, 신유년 5월에 바다에 빠져서 목숨을 잃었으니, 지맹인의 말이 과연 맞았다. 그 뒤 갑자년, 내가 奏請使(주청사)로서 수로로 중국 서울을 가다가 바닷가에서 석오를 제사지냈다. 을축년에 일을 끝내고 돌아올 때 登州에 이르러 배를 탔는데, 그날밤 꿈에 석오가 술병을 가지고 와서 나를 전송하면서, 은근히 정회를 말하는 것이 완전히 평시와 같았다. 꿈에서 깨고 나니 서글픔을 이기지 못했다. 배를 타고 6일 동안이나 오는데, 조금도 풍파가 없이 편하게 우리 나라 땅에 닿았으니, 어찌 이것이 석오의 영혼이 도와주어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평생에 서로 좋게 지내던 의리가 이승과 저승의 간격이 없었으니, 아! 슬픈 일이다. 석오는 나이 15세에 과거에 올라 벼슬이 이조 참판에 이르고 바야흐로 중한 人望이 있어 남들이 모두 公輔의 자격으로 기약했는데, 물에 빠져 죽는 데 이르렀으니, 이보다 불행한 일이 있겠는가. 석오의 어진 인품으로도 여기에 이르렀으니 어찌 운명이 아니겠는가. 아! 슬픈 일이다. 그 아들 朴𥶇(박로)가 지금 참판이 되었으니 진실로 위로가 된다.

나라 밖으로는 大國에서 亡國으로 치닫는 明나라 황제에 대한 國喪 조문 사절, 나라 안으로는 매년 끝이질 않는 獄事로 廢主로 전락해가는 광해군의 마지막 사신. 박이서의 경신년 사행길은 ‘使行’이 아니라 ‘死行’ 길이었다. ‘사행의 공무를 보는 사람이 어찌 오랑캐 땅을 밟겠느냐’는 그의 말처럼 ‘기이하다’는 말보다 박이서에겐 피할 수 없는 ‘숙명’의 길이었다. 예기치 않은 사고가 아니라 인생의 마지막인 死地를 본인이 선택한 선비의 ‘殉節’이라 보는 것이 공에 대한 예우일 것이다. 이 일은 조선 외교사의 전환점이 되었다.
박이서의 사행록은 進香使(진향사)로 동행하여 살아서 돌아온 친구 晩晦 李必榮(이필영)이 쓴 ≪朝天日錄(조천일록)≫에 날짜별로 자세히 기록되어 전해진다. 그리고 星湖 李瀷(이익)의 ≪星湖僿說(성호사설)≫ ‘인물편’ <朝天渰死(조천엄사)>에도 그 내용이 실려있다.

수명정은 혼탁한 조정에서 물러나 ‘더러운 자취를 남기지 않겠다’는 뜻으로 두보의 시에서 ‘물가에 밝게 비추다’란 뜻의 ‘水明(수명)’이란 싯구를 취해 한강이 비치는 곳에 세운 정자였다. 그의 죽음도 물과 연결되어 있으니 우연치곤 너무나 숙명적이다. 수명정 정자의 기문이 공의 비문이 된 사연을 택당은 공의 신도비에 銘(명)으로 실어 놓았다.


月過下弦  달도 지금 하현을 넘어서서
湖山夜黑  산하가 칠흑처럼 어두운 이 밤
倬彼丙岑  저기 우뚝 솟은 남쪽 봉우리에
爰吐英魄  달빛이 교교하게 뿜어 나오네
魚龍抃踊  어룡은 박수치며 뛰어오르고
魍魎潛匿  망량은 물 밑으로 몸을 숨기나니
公在樓居  누대에 오르신 우리 공께서
寸心相照  한 가닥 마음을 서로 비춰 주는 듯
用晦而明  어둡게 함으로써 밝게 빛나고
處幽自燿  숨어 살면서도 저절로 드러난 분

<朴彛叙 神道碑銘>

수명정을 찾은 명사들은 黨色이 없었다. 처가와 외가가 東皐 李浚慶(이준경) 집안의 광주이씨(廣州李氏)로 부제학(副提學) 박이서는 선배 대제학 一松 沈喜壽(심희수)와는 인척처럼 가까웠다. 그의 문집 ≪一松先生文集≫에 수명정에서 지은 시 <題朴錫吾江亭>이 전한다. 특히 이준경의 증손자인 이필형(李必亨)과 이필영(李必榮)은 박이서와 함께 소북의 칠학사[보외]들이다.
동갑 친구 西人 仙源 金尙容(김상용)은 부친 ‘박률 신도비’의 頭篆(두전)을 써줄 만큼 돈독했다. ≪仙源遺稿(선원유고)≫ ‘寬懷錄序’에 동갑계로 교유했던 인사를 상세히 수록해 놓았다. 영의정 漢陰 李德馨(이덕형)도 그 회원이었다.



<박률신도비탁본>*金尙容 篆:贈吏曹參判遯溪先生朴公神道碑銘 *南窓 金玄成 書

南人 愚伏 鄭經世(정경세)는 김상용의 司馬試 同榜生이다. 홍문관에서 박이서와 같이 근무하며 친해진 벗이다. 최근 상주의 晉州鄭氏 愚伏宗宅에서 박이서의 친필시가 발견되었다. 
  

≪先賢筆帖≫ 尙州 晋州鄭氏 愚伏宗宅 *영광군수로 좌천될 때 송별시로 여겨짐(1618년 58세)

朴參判彛 박참판 이서
呈次。君今得脫韝中。鬱鬱那堪。亦欲東萬二千峰。應領畧好音無惜。寄便風。  이어서 드리다[次하여 드리다]. 자네가 지금 활깍지를 뺏으니 울울함을 어찌 견딜고. 또한 동쪽 만이천봉으로 가려는데 대략 좋은 소식을 수령하니 아쉬움은 없오. 바람편에 부치네.
得失從來一指中 得失은 종래로 한 손가락에 있는데
飄然身世任西東 바람에 나부끼는 신세는 西東로 왔다갔다 했네.
句洪早晩功應就 글은 홍수같은데 조만간 功勞는 응당 따를 것이니
便棄袍簪問下風 편히 벼슬자리 버리고 아랫자리를 구했네. 
指章(지장)
吟詠之間。不覺有從此之意。情見乎詩。呵呵。 시 읊는 사이 나도 모르게 따르는 뜻 담겼네. 정겨움이 시에 보이네. 하하. 


정경세와 김상용은 그 유명한 ‘임오년(선조 15, 1582) 학번’으로 사마시 동기들의 계모임을 그림으로 기록한 ≪壬午司馬榜會之圖(임오사마방회지도)≫가 전해지고 있다. 그림 속 주인공은 또한 박이서의 친구들이기도 하다.

 
≪壬午司馬榜會之圖≫(1630)

그의 학문적 성취는 기해년(선조 32, 1599) 가을 李爾瞻(이이첨), 鄭仁弘(정인홍), 洪汝諄(홍여순), 閔夢龍(민몽룡) 등 다수의 북인들[대북파]에 의해 삭탈 관직되면서 부터다. 이때 배척당한 소수의 북인을 소북파로 불리게 되었다. 박이서는 8년간 驪江[驪州]으로 물러나 은거하며 날마다 경서(經書)를 읽으며 스스로 즐겼다. 공직에서 벗어난 8년의 시간. 박이서에겐 유배가 아닌 賜暇讀書(사가독서)처럼 책 읽는 휴가의 시간이였다. 그때 南以恭(남이공), 金藎國(김신국), 朴彛叙(박이서), 李必亨(이필형), 宋馹(송일), 朴慶業(박경업), 崔東立(최동립) 등은 학문이 일취월장하여 당시 사람들은 ‘칠학사’라 별칭하였다. 이후 친밀하게 교유했던 李必榮(이필영), 李德泂(이덕형), 慶暹(경섬) 등 3인을 補外로 추가하여 10인으로 늘어났다. 이때 같이 이주했던 아들 박로는 그 고을에 慕齋 金安國(김안국)의 옛집터가 있는데 서원이 없는 것을 알고 맨 먼저 논의를 내어 동지들과 함께 서원을 창건했다. 1600년으로 1625년에 ‘沂川書院(기천서원)’으로 賜額되었다. 古山子 金正浩(김정호)의 ≪大東輿地圖(대동여지도)≫를 설명한 지리지 ≪大東地志(대동지지)≫에 기록되어 있다. 당시부터 그 고을의 士論(사론)은 모두 박이서 부자에게 쏠려 淸議(청의)가 驪江(여강)에 있게 되었다고 일컬었다.
李肯翊(이긍익)의 ≪燃藜室記述(연려실기술)≫에 그날을 기록하고 있다.

홍여순의 당세가 더욱 치성하여 도리어 전날 그를 탄핵했던 사람들을 공격하여 거의 다 쫓아냈으니, 집의 金藎國, 사간 宋馹, 장령 崔東立, 지평 朴慶業, 교리  朴彛叙, 이조 정랑 李必亨, 이조 좌랑 南以恭은 削出되고, 교리 柳希奮만은 외척이라 면했다. 장령 慶暹, 교리 李德泂, 수찬  李必亨은 모두 임명된 지 얼마 안 되었는데 파직 하였다가 도로 서용하여 경섬은 靈光, 덕형은 礪山, 필형은 豐基의 지방 수령으로 보냈다. 몇 년 뒤에 時論이 점차 가라앉아 세 사람은 淸職에 오르고, 신국 등은 9년 후인 무신년(선조 40, 1608)에 비로소 서용되었다. …
≪燃藜室記述≫ 東西南北論分[동서남북론의 분열]



忠簡’이란 시호는 박이서의 인생이 압축되어 있다.

≪諡號攷≫는 2품 이상의 신하에게 국가에서 亡者의 공적과 인품을 평하여 내리는 시호를 모아놓은 것이다. 
 
贈吏曹判書朴彛叙  兵曹判書李秉模撰狀
증 이조판서 박이서 병조판서 이병모가 諡狀을 지었다

○忠簡   충간
[忠]事君盡節   [충]임금을 섬기는데 충절을 다했다.
[簡]正直無邪   [간]바르고 곧아서 사특함이 없었다.
≪諡號攷≫
 
*延諡(연시):孝簡公 李正英(1711)

박이서의 諡號는 당쟁 때문에 사후 159년인 1793년(정조 17)에 내려지고, 시호를 받는 延諡(연시) 행사를 박윤동의 장손인 朴道翔(박도상)의 집에서 행해진다. 이때 諡狀을 쓴 靜修齋 李秉模(이병모)는 택당의 5대손으로 선대의 인연이 대를 이어 서로를 아꼈던 것이다.
 
박이서에 대한 古典籍은 세계기록문화유산인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 연려실기술 등 역사서를 비롯하여 친분으로 교유했던 벗들의 문집들과 政敵들의 문집류, 그 밖의 玉堂案, 翰林案, 명사들의 筆譜와 號譜, 諡譜 등 분야별 계보 서적에 이르기까지 90여 종이 현재 전해지고 있다.

  

“朴彛叙 字 錫吾。初名 文叙。號 泌川。密陽人。遯溪 栗 子。宣祖朝 科。官止 吏參。性剛直淸介之名 著世。”

“박이서는 字가 錫吾(석오), 초명은 문서, 호는 泌川이다. 밀양인[밀양박씨]으로 遯溪(돈계) 朴栗(박률)의 아들이다. 宣祖때 과거급제하여 관직이 이조참판에 이르렀다. 성품은 剛直(강직)하고 淸介(청개)하다는 명성이 세상에 드러났다.”

 
≪海東歷代名家筆譜≫

 

“泌川 朴彛叙。錫吾。文。叅判。辛酉 奉事 赴燕 船敗不返。有 詩名。栗之子。”
비천 박이서. 자는 석오, 문과급제 참판으로 신유년 연경에 사신으로 갔다가 배가 파손되어 돌아오지 못했다. 시로 유명하고 박률의 아들이다.

≪萬姓譜抄≫

≪명가필보≫와 ≪만성보초≫의 인물평에서 보듯이 詩에 능하였던 박이서는 거문고로 유명한 화담 서경덕과 교유했던 부친 박률로부터 가학을 이었기에 음악에 대한 안목이 남달랐을 것으로 여겨진다.
1607년. 선조가 승하하기 2달전에 8년간의 은거를 끝내고 조정에 복귀한 직임이 ‘掌樂院僉正(장악원 첨정)’이었다. ‘장악원’은 궁중 행사에 필요한 음악과 무용을 총괄하는 관청으로 행정은 문관출신이 관장했다. 선조 말년인 이즈음에 임란때 전소된 청사를 지금의 명동 자리에 1만평 대지에 다시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 때 이후로 여러 곳으로 옮겨지다 오늘날 예술의 전당 안에 국악당 건물로 옮겨 국립 ‘국악원’이란 이름으로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전라도 茂長邑城에 가면 박이서의 詩가 편액으로 걸려있다. 영광군수로 부임했을 때 이웃한 茂長縣을 방문하여 관아의 정자였던 아관정에 붙인 <迓觀亭詩>이다. 읍성의 남문 鎭茂樓(진무루)의 편액으로 판각되어 佔畢齋 金宗直(김종직)의 시 옆에 걸려 전해지고 있다. 

▲전라도 茂長邑城(무장읍성) 남문 鎭茂樓(진무루)

▲朴彛叙(박이서) <迓觀亭詩(아관정시)> 편액

▲≪全鮮茂長邑誌≫

迓觀亭詩 아관정시
心自如丹鬂自皤 마음은 아직 단사처럼 붉은데 귀밑머리 저절로 희어지고
幽愁無賴滿庭花   깊은 근심으로 의지할 곳 없는데 뜰 가득 꽃이 피었네
故園千里醒魂夢   천리 고향은 깨어보면 꿈인데
旅館三春負物華   여관에서 봄을 맞아 꽃 구경 못하네
中夜危欄憑寂寞   깊은 밤 난간에 기대니 적막감이 감돌고
半天殘月漸傾斜   하늘의 그믐달 점차 기우네
平生氣習都銷盡   평생 동안 익힌 기운 모조리 소진되는데
馮婦當時笑下車   풍부가 호랑이 잡을 당시 웃으며 수레에서 내렸네

*아관정(迓觀亭) : 무장현의 客館 북쪽에 있던 정자로, 활을 쏘며 武藝를 닦던 곳. ‘아관(迓觀)’이란 손님을 맞이한다[迓賓]의 迓자와 활쏘기를 통해 덕을 본다[觀德]는 觀자로 이름을 삼은 것이다.

이 싯구 중에 ‘平生氣習’이란 말이 나오는데, 이것은 ≪진영수어≫에 수록된 부친 박률의 <士氣士習> 책문에 있는 말로써 대를 잇는 가학의 모습을 옅볼 수 있다 하겠다. 
 





*소북파에 의한 유성룡 탄핵 사건 개요 :

1. 첫번째 탄핵 사유
유성룡(柳成龍)[남인]은 대륙정벌을 선포한 풍신수길(豊臣秀吉,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대해 통신사(通信使) 황윤길(黃允吉)[서인]의 '전쟁도발' 보고를 무시하고 부사(副使)인 동문(同門) 친구 김성일(金誠一)[남인]의 '전쟁 기미가 없다'는 보고를 채택하여 임진왜란 반발시 거의 무방비로 속수무책 당했다. 안이한 정세판단이 부른 참사였다. 

2. 두번째 탄핵 사유
상주(尙州)에서 이일(李鎰)이 도주하면서 무참히 패전하던 날, 도체찰사(都體察使, 지금의 합참의장)로 부임하여 군지휘권과 인사권을 독점하여 군대를 통솔하였으나 그가 내려보낸 장수들은 도망가기 바빴다. 문경세재가 무혈로 함락되고 충주에서 신립(申砬)이 대패하여 결국 한양이 점령되고 야반 도주하던 선조(宣祖)는 평양(平壤)에 도착하자 백성들의 유성룡 파직 요구를 받아들여 그를 파직시키고 정철을 다시 불러들였다. 

3. 세번째 탄핵 사유
결국 분조(分朝)[朝廷을 둘로 나눔]를 하여 광해군과 그에 소속된 신하[北人]들에게 전쟁을 맡기고 선조(宣祖)와 유성룡 등 수하 신하[西人과 南人]들은 모두가 의주(義州)로 피신해서 명나라의 구원병을 기다렸다. 결국 구원병이 오자 선조는 정철을 파직시키고 다시 유성룡을 기용한다. 이때 명군이 고전을 거듭하자 유성룡은 왜놈들의 화의(和議) 요청을 수용하자고 주장하여 조선, 명나라, 일본 세 나라가 전쟁 수습을 협의하려 했다.
당시 일본군과 명군의 전세를 잘 파악하고 있던 광해군(光海君)과 그의 분조(分朝) 신하들은 유성룡의 화의를 극력 반대했다. 당시 광해군과 분조에 소속된 신하들은 평양성 수복 등 반전의 기운이 일고 있고 의병(義兵) 활동이 본격화 되면서 전세(戰勢)가 역전되던 상황이었다. 이때 명나라 사신 심유경(沈惟敬), 일본의 소서행장(小西行長, 고니시 유키나가)과 화의를 주청한 유성룡의 판단은 조선군과 의병들의 활동을 막는 일이 되고 말았다. 협의 기간 중에는 전쟁을 멈춰야했기 때문이다. 보급로가 차단된 일본군에게 숨통을 터준 격이다.
하지만 화의를 주장한 유성룡은 세 나라간의 협상에서 무시되고 명나라와 일본 두 나라만의 협상이 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졌다. 조선은 결국 항전도 못하고 협상도 못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유성룡의 화의는 풍신수길에게 보내진 외교문서가 위조된 것이 들통나서 결국 무산되었다. 분노한 풍신수길은 다시 군대를 보내어 조선에 씻을 수 없는 피해를 남겼다. 이것이 정유재란(丁酉再亂)으로 임진년 난리때보다 더 참혹했다. 이순신(李舜臣)[北人]이 이끈 수군의 혁혁한 승전으로 마침내 전쟁이 수습되자, 분조에 관여했던 신하들이 유성룡을 두 전란의 당사자이었기에 탄핵을 주청한 것이다.

특히 박이서는 임란시 병조좌랑으로 선조(宣祖)를 호종(扈從)하다 광해군 분조에 배종하여 순찰사 이정암(李廷馣)의 종사관으로 황해도 일대 군량미를 관장하였다. 그때 피난지에서 대부인(大夫人) 완산이씨(完山李氏)의 상(喪)을 당하여 사직 후 3년상을 마치고 상주 전투(尙州戰鬪)에서 자결한 조카 홍문관 교리 박호(朴箎)[壬亂殉節 三學士]의 시신도 못찾고 초혼(招魂)으로 수습하고 사간원 정언으로 복귀하였다. 곧이어 시강원 겸사서(侍講院兼司書)를 제수받았다.
이 때가 병신년(1596)으로 왜노(倭奴)가 패전하여 대동강에 머물 때이다. 보급로가 차단된 왜노[소서행장]는 술수로 조정에 화의(和議)를 요청하자 박이서는 진위를 파악하지 않고 화의를 수용한 유성룡을 극력 반대하였다. 박이서는 초명인 문서(文叙)에서 이서(彛叙)[떳떳함을 펴리라]로 개명을 한 것도 이 때이다. 결국 묘당(廟堂)의 의견과 어긋난다 하여 해서의 독운 어사로 내쳐졌던 인과관계가 있던 사이였다.
결국 이듬해 정유년에 화의는 외교문서 조작으로 결렬되어 또 다시 참혹한 전쟁에 휩사였던 것이다.
이 책임을 전쟁이 끝난 후 당시 홍문관 관원이었던 박이서(朴彛叙), 이덕형(李德泂), 이필영(李必榮) 등 소북인들이 유성룡 탄핵을 제기한 것이다. 당시의 선비관으로 보면 전쟁후 자결을 해도 부족한 그의 처지였다. 전쟁 책임에서 선조(宣祖)와 한배를 탄 유성룡은 공신(功臣) 반열에 있다가 결국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징비록(懲毖錄)≫을 쓴다.

*유성룡의 문집 훼손 사건

유성룡은 자신을 탄핵한 당시 홍문관 관원들과 관련 집안 인물에 대해 반감을 갖게 되면서 전쟁으로 탄핵받은 당사자가 기록한 ≪징비록(懲毖錄)≫에서 그들의 공로를 빼거나 사실 관계를 축소 왜곡하였다. 그 일례가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 충신(忠臣) 편에 기록된 박이서의 조카 교리 박호(朴箎)의 상주 전투 자결 내용이 ≪징비록(懲毖錄)≫에서 싹 빠졌다.

≪東國新續三綱行實圖≫ <忠臣 편> 박이서의 조카 朴箎(박호) 임진왜란 순절

상주 전투는 임진란 초기에 선조와 조정에 가장 큰 충격을 준 전투이다. 순변사 이일(李鎰)이 왜적의 기습에 도주하면서 조선의 정예부대가 대패한 것이다. 이때 조정에서 가장 똑똑한 문관으로 차출된 종사관 세 분, 즉 박호(朴箎)•윤섬(尹暹)•이경류(李慶流)는 왜적과 싸우다 순절한 사건이다. 특히 박호는 장원급제자로서 조정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지만 구차하게 연명하는 것보다 조정에 치욕을 남기지 않으려 스스로 목에 칼을 꽂고 자결하였다. 당시의 올곧은 선비는 그러했다.
또 유성룡은 ≪퇴계선생문집(退溪先生文集)≫, ≪포은선생집(圃隱先生集)≫ 등 스승의 문집을 편집하면서 글에 손을 대어 훼손하였다. 일례로 ≪퇴계선생문집(退溪先生文集)≫에서 박이서의 부친 박률(朴栗)의 시(詩)를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차운(次韻)하여 지은 시 제목에서 '이름'자와 차운했다는 '次韻'자를 삭제하여 직접 지은 것으로 편집해 버렸다. 지금으로 치면 표절에 해당하는데 당시의 도덕 기준으로는 스승의 글에 손을 댄 있을 수 없는 만행이다. 소인배나 하는 짓이다.

▲≪退溪先生文集≫ 卷之五 續內集 *퇴계집을 편집한 유성룡이 시제목에서 '박률' 이름자와 '차운'자를 빼버렸다.
*≪述先錄≫에는 ‘聊以一詩見情云’이 ‘聊次詩軸中朴栗韻見情云’으로 되어 있다. 제목에 ‘次韻’字를 넣지 않으면 표절시비가 된다.


▲≪圃隱先生集≫ 문과방목 朴啓陽(19세) 父 朴允文(박윤문) *포은집을 편집한 유성룡이 '文允(문윤)'으로 이름자 훼손

≪포은선생집(圃隱先生集)≫에서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문과방복 내용 중 포은의 동방(同榜) 박계양(朴啓陽)의 부친 박윤문(朴允文)을 ‘문윤(文允)’으로 이름자를 바꿔치기 했다. 그는 박이서의 8대조(代祖)이다. 이름을 훼손한 것이다. 선비는 죽어 이름을 남긴다 했는데 금기(禁忌)에 손을 댄 것이다.
이제 ≪퇴계선생문집(退溪先生文集)≫, ≪포은선생집(圃隱先生集)≫을 볼 때, 편집자인 유성룡의 음흉한 조작 사례도 함께 직시해야 하겠다. ≪징비록≫ 이후 유성룡이란 이름은 사론(士論)에서 거의 언급 되지 않는다. 그러다 일제 강점기 이후 임진왜란의 명재상으로 재조명되었는데, 그에 대한 이 같은 품평은 친일사관이 팽배하던 시대란 점을 감안해서 봐야할 것이다.

유성룡과 개성 기생 황진(黃眞)이와의 잠자리에 얽힌 야사도 그의 인격을 보여주는 한 사례라 하겠다. 구수훈(具樹勳)이 쓴 ≪이순록(二旬錄)≫에 실려있다. 명나라로 사신을 가던 유성룡은 낮에 보는 이가 있어 연회가 끝나자 황진이를 돌려보냈다가 밤에 몰래 들여 잠자리를 가진 후 새벽에 일찍 나가라고 했다. 이 일은 명쾌하지 못한 처사이므로, 서애는 소인(小人)이라 평했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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