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家文을 찾아서 > [밀양박씨]① ≪韓琴新譜≫와 마포 水明亭 이야기 > 한금신보(韓琴新譜)[박윤동]

 
한금신보(韓琴新譜)[박윤동]
상품명 : 한금신보(韓琴新譜)[박윤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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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책. 2017 라이프치히 도서전
    
 

家文을 찾아서 : 밀양박씨편①
『≪韓琴新譜≫와 마포 水明亭 이야기』관련문헌



*본 도서는 수명정 5대 승계자이자 ≪韓琴新譜≫(1724)의 편저자 奎齋(규재) 朴胤東(박윤동)[1673~1734] 관련 기록문헌이다.

▣原本 書誌

-도서명 : 韓琴新譜
-편저자 : 奎齋 朴胤東[顯宗 14(1673)~英祖 10(1734)][凝川後人]
-간행년 : 景宗4(1724)
-크기 : 29×22.5cm
-판종 : 필사본
-수량 : 1책 54장
-출처 :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도서실

▣저자 소개

-姓名 : 朴胤東(박윤동)
-字 : 世百
-號 : 奎齋,凝川後人
-本貫 : 密陽
-曾祖 : 朴𥶇[兵曹叅判], 祖 : 朴守玄[成均館司藝], 父 : 朴紳[忠淸監司]
-母 : 宜寧南氏[南斗瞻의 女], 妻 : 慶州崔氏[崔濟의 女]
- 景宗 3(1723) 癸卯 別試 丙科 1位
-官止 : 司憲府掌令
-生沒年 : 顯宗 14(1673)~英祖 10(1734)
-'한금신보'의 편저자. 시와 거문고로 유명. 梁巘(양헌),韓笠(한립)을 師事.

▣영인본 견본


<비단 표지>









▲한금신보 서문


▣해제

≪韓琴新譜(한금신보)≫는 수명정의 5대 승계자 규재 박윤동이 저술한 조선 한양 사대부의 거문고 악보이다.

1724년(경종 4)에 스승 한립의 악보를 얻어 일부 빠진 부분을 보강한 것이다. 조선 후기 거문고 연구에 중요한 문헌이다.



家文을 찾아서 : 밀양박씨편①
『≪韓琴新譜≫와 마포 水明亭 이야기』

▣인물 연구<1> : '응천후인'을 찾아서

韓琴新譜(한금신보). 1966년 한 권의 거문고 악보가 서울대학교에서 '서울서점'의 晉興善(진흥선)씨로부터 입수하여 음악대학 도서관에 소장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얇은 한지에 저자가 직접 붓으로 쓴 筆寫本 책. 이 책의 연구자인 韓明熙(한명희) 교수의 解題가 있다.

1. '凝川後人(응천후인)'이라 밝힌 無名氏가 修撰하였다.
2. 응천후인은 '韓笠(한립)'이라는 琴師로부터 거문고를 익혔다.
3. 편찬년대는 '景宗 4年 甲辰年(1724)'으로 밝혀졌다.
4. 申晟(신성)의 '玄琴新證假令(현금신증가령)' 이후로부터 徐有榘(서유구)의 '遊藝志(유예지)' 이전까지의 거문고 음악 연구에 중요한 악보이다.

≪한금신보≫ 책 말미에 '凝川後人(응천후인)'이 악보를 쓰게 된 사연을 적은 序文이 있다.


<한금신보 序文>
余年少時。居于麻湖水明亭。有志于琴。而不得其師。龍湖有鶴髮老人。姓曰梁名曰巘。
내가 소년시절 마호[마포] 水明亭(수명정)에 거주했다. 거문고에 뜻이 있었으나 스승을 얻지 못했다. 용호에 있는 백발노인이 있는데 성은 梁(양), 이름은 巘(헌)이다.

一日月夜。携琴來訪。余乃請學。師曰琴者禁也。禁其邪心也。君子所當御也。親自製琴敎。…未期年師忽逝焉。
어느날 달뜬 밤에 거문고를 들고 방문하였기에 나는 곧 가르침을 청했다. 스승이 이르기를, '琴은 禁하는 것이다. 사특한 마음을 금하는 것이다. 군자가 마땅히 다뤄야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친히 스스로 거문고를 제조하여 가르쳤다…. 기약한 해가 아닌데 스승은 홀연히 서거했다.

又聞洛下有解音律者。其姓韓者名笠。古以知音擅名
또 洛下[한양 일대]에 音律에 해박한 자가 있는데, 그 성은 韓이라는 者로, 笠[삿갓]이라 불리었다. 예부터 知音하여 이름을 날리던 자이다.

余又邀致再三請學。… 師感余誠。勤敎之以手法。作譜以與之。因以傳得其法。
나도 두 세번 맞이하여 배움을 청했다. 스승이 나의 정성에 감복하여 힘써 手法으로 거문고를 가르쳤다. 악보를 만들어 나에게 주었기에 傳하여 그 법을 얻었다.

이후 내용의 대략은 이렇다.

'中年에 불행히도 喪故가 연이어 닥치자 악보를 廢했다. 老年에 이르러 한가한 일상이 많아져 적적함을 깨고자 다시 重修하려는데 스승은 이미 돌아가셨고 악보도 遺失되었다. 이후 어떤 곳에 스승의 악보가 있다는 것을 듣고 간신히 얻었다. 다시 傳하려는데 유실된 부분이 있어 他譜를 보고 그 빠진 것을 보충하였다. 甲辰(景宗 4, 1724) 正月 壬午(7일)에 凝川後人 某는 序한다'

'韓琴新譜'는 '韓씨 거문고 새 악보'로 '한립류 거문고의 새로운 악보'란 것이다. '凝川後人'은 응천의 후손이란 뜻으로 '凝川'은 '密陽'의 별호로써 '밀양박씨 후손'이라는 것이다.


본 도서전을 준비하며 관련 서적들을 두루 수집하여 살펴본 결과, 응천후인은 수명정의 5대 계승자인 규재 박윤동으로 확인되었다. 그의 行狀에 거문고를 연주하여 부친과 친척들을 즐겁게 모셨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리고 한금신보 서문에 나오는 일련의 喪故에 대한 내용이 그의 가족관계에서 정확히 부합되었다.
보다 확실한 것은 그가 도저동 본가를 계승한 당사자라는 사실이다. 곧 수명정을 이어받아 그곳에서 거주했다는 것이다. 아울러 2013년 '『한금신보』(1724) 편찬자의 음악적 배경'이란 논문을 쓴 최선아 교수를 통해 논문에서 언급된 인물연구가 잘못 되었음을 확인받고 본 연구결과에 동의하였다. 조만간 수정된 논문이 발표되기를 기대한다.
*참고문헌 : 밀양박씨족보, 가장기사, 술선록, 박윤동 행장, 박신 신도비명 등

掌令 朴胤東 行狀 ≪術先錄≫
癸未。四拙公感風痹。公日夜扶護。嘗藥供旨。克殫誠敬。日邀親戚長老。琴歌侑歡。適意養志。人皆稱孝。

계미년(1703)에 사졸공[박신]께서 風病이 나자 공이 밤낮으로 扶護(부호)하면서 약을 맛보고 맛있는 음식을 올리는 등 정성을 다하였다. 날마다 친척과 長老들을 초청하여 거문고를 타며 음식을 권해 즐겁게 보내면서 뜻을 기르도록 하니, 사람들이 모두 그 효성을 칭찬하였다.

≪術先錄≫


이 거문고 美談은 부친 박신의 신도비명에도 나온다.

忠淸道觀察使 朴紳 神道碑銘 ≪術先錄≫
癸未感風痹。杜門屛居。醫治數歲益厭苦口盡去刀圭。語人曰。吾今老矣。何用藥爲。起居飮食。唯當適吾意洞開窓牖。或引盃酌。日與親戚娛樂。又約數三同志倣耆英會。蒼顔華髮掩映罇俎。花朝月夕。輒肩輿相訪。子弟列侍。或以琴歌侑勸。或以詩酒暢淮。暮境淸福寡貳。

계미년 風病에 걸려 문을 닫고 조용히 생활하며… 또 몇 명의 뜻이 맞은 친구들과 耆英會를 조직하여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들이 모여 술을 마시며 즐기고 花朝月夕이면 肩輿를 타고 서로를 방문하면 자제들이 늘어서서 모시며 거문고를 권하기도 하고 혹은 詩酒로 질탕하게 즐겨서 이보다 더한 늘그막의 淸福이 없었다.

박신은 세 아들을 두었는데, 가족들의 생몰년을 살펴보자.

성명 생년 몰년 1724년 생존
朴紳(父) 1638 1715 x
配 慶州崔氏 미상 1706 x
朴祖東 1657 1711 x
配 坡平尹氏 미상 1698 x
配 廣州李氏 미상 1700 x
朴宗東 1664 1724 o
配 宜寧南氏 미상 1734 x
朴胤東 1673 1734 o
配 宜寧南氏 미상 1740 x

≪한금신보≫가 작성된 1724년 생존했던 아들은 둘째 박종동과 셋째 박윤동 두 분이다. 둘째 박종동은 1715년 부친 박신의 喪을 당하자 묘가 있는 양주로 이주했다. 이후 제삿날에만 서울에 있는 집에 갔다. 서울집은 박윤동이 이어받아 祠堂(사당)과 함께 忌祭祀(기제사)를 주관했다.
 

通德郞 朴宗東 墓誌 ≪術先錄≫
丙戌丁崔夫人憂。乙未觀察公捐館挈家眷。移居于觀察公墓下。値喪餘之日。每至京第參祀。翌日卽還。不以他事。復作京洛之行矣

병술년(1706)에 崔夫人의 喪을 당하고 을미년(1715)에는 觀察公께서 세상을 버리자 가족을 이끌고 관찰공 묘소 아래로 이사하여 살면서 제삿날을 당하면 서울로 가 제사에 참석하고 이튿날이면 즉시 돌아와 다른 일로는 더는 서울을 왕래하지 않았다.

결론은 내면, 규재 박윤동이 26세 중년의 나이인 1698년부터 큰 형수 坡平尹氏를 시작으로 연이어 상을 당하고, 부친 박신의 장례를 치룬 이후엔 둘째 형마저 선영이 있는 양주로 이주하였으니 서울의 본가는 박윤동이 이어받아 가업을 이어갔다는 것이 명확해 진다. 아울러 박종동은 후사가 없어 박윤동의 長子인 朴澂(박징)이 繼子로 들어가 代를 이어간다.
박윤동이 가업을 이어 종사를 맡았다는 또 하나의 근거는 수명정의 건립자 박이서의 諡號가 당쟁에 밀려 사후 159년인 1793년(정조 17)에 내려지는데, 그 시호를 받는 延諡(연시) 행사를 박윤동의 장손인 朴道翔(박도상)의 집에서 행해진다. 위와 같은 가문의 학맥과 가업을 일목연하게 엿볼 수 있는 책이 있다. ‘萬姓譜’와 ‘號譜’가 그런 책인데, 그 중 ≪姓號譜彙(성호보휘)≫ ‘朴氏’편을 보면 자세하다.

     
≪姓號譜彙≫

朴栗-朴彛叙-朴𥶇-朴守玄-朴紳○子 胤東….



<세계도>

凝川後人 奎齋 朴胤東(박윤동)의 先代祖 음악관련 관직을 정리해 보면 더 분명하게 心法[家學]과 함께 거문고가 家業으로 전수되었음을 엿볼 수 있다.
 관계  성명  號/諡號  생몰년  관직명
 五代祖  朴栗  遯溪  1520(中宗 15)~1569(宣祖 02)  禮曹 佐郞
 成均館 司藝
 司憲府 掌令
 高祖父  朴彛叙  泌川/忠簡  1561(明宗 16)~1621(光海 13)  禮曹 佐郞
 掌樂院 僉正
 吏曹 叅判
 曾祖父  朴𥶇  大瓠/文獻()  1584(宣祖 17)~1643(仁祖 21)  成均館 司藝
 掌樂院 正
 兵曹 叅判
 祖父  朴守玄  草亭  1605(宣祖 38)~1674(顯宗 15)  禮曹 佐郞
 成均館 司藝
 父  朴紳  桃谷  1638(仁祖 16)~1715(肅宗 41)  禮曹 佐郞
 禮曹 參議
 忠淸 監司
   朴胤東  奎齋,凝川後人  1673(顯宗 14)~1734(英祖 10)  司憲府 掌令


여섯 분의 묘소는 현재 경기도 양주시 선영에 함께 모셔져 있고, 매년 鼻巖齋(비암재) 재실에서 시향을 받들고 있다.

 
<鼻巖齋> 밀양박씨 양주 先塋


▣인물 연구<2> : 大提學 朴允文(박윤문)과 朴密陽(박밀양),大陽(대양),紹陽(소양),三陽(삼양),啓陽(계양) 5형제


5인의 수명정 주인들, 그들의 心法[家學]은 고려말 대제학 朴允文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야기에 앞서 숙지해야 할 점이 하나 있다. 밀양박씨 중 돈계 박률의 후손은 가문의 後嗣를 ‘嫡長子(적장자)’ 승계가 아닌 ‘適合子(적합자)’ 승계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家學의 뿌리가 고려말부터 시작한다. 新儒學이 등장하던 고려말 충렬왕때 稼亭 李穀(이곡)의 대제학 후배인 朴允文(박윤문)에서 시작되어 密陽(밀양), 大陽(대양), 三陽(삼양), 啓陽(계양) 등 네 아들이 대과 급제하면서 家學의 근원을 다지게 된다.

  
≪東文選≫

丹陽翠雲樓[朴允文]  단양 취운루[박윤문]
奉使關東一上樓  관동에 봉사했다가 이 누각에 오르니
松陰十里最深幽  10리 솔 그늘이 가장 깊고 그윽하네
蔭程老樹童童立  길을 덮은 노목들은 오똑오똑 서 있고
遶郭長江袞袞流  성을 두른 긴 강은 늠실늠실 흐르네
橫麓斷煙迷犢臥  산 밑 비낀 연기 속에 길 잃은 송아지가 누웠고
滿軒涼吹勸人留  난간에 가득한 서늘 바람은 가는 사람 만류하네
此行未暇登臨賞  행색이 총총하여 구경할 여가 없으니
他月重來載酒遊  다른 날 거듭 오거든 술 싣고 노닐리라

수명정의 건립자 박이서의 직계는 둘째 대양의 후손이다. 아버지 ‘寶文閣 大提學’에서 둘째 아들 ‘進賢館 大提學’으로 이어갔다. 네 아들은 益齋 李齊賢(이제현), 牧隱 李穡(이색), 圃隱 鄭夢周(정몽주), 陶隱 李崇仁(이숭인), 冶隱 吉再(길재), 陽村 權近(권근), 獨谷 成石璘(성석린) 등과 깊은 친분을 맺어 그들의 문집들과 ≪東文選(동문선)≫에 다수의 詩와 글이 전해지고 있다.

      
≪稼亭先生文集≫ 가정 이곡(李穀, 1298-1351) *박윤문의 대제학 선배


<益齋先生畫像> 元나라에서 忠宣王을 모시던 33세때 李齊賢 *박대양의 경연 선배

≪益齋亂藁≫ 익재 이제현(李齊賢, 1287-1367) *박대양의 경연 선배


<牧隱先生畫像> 목은 이색(李穡, 1328-1396) *박윤문 및 박밀양[린],대양,소양,삼양,계양[개명 돈지] 5형제와 교유

≪牧隱藁≫ *박윤문 및 박밀양[린],대양,소양,삼양,계양[개명 돈지] 5형제와 교유


<圃隱先生畫像> 포은 정몽주(鄭夢周, 1337~1392) *박계양[개명 돈지]의 과거 동방

≪圃隱先生集≫ *박윤문 처 해양군대부인김씨묘지명 찬술 *松隱 박익(朴翊)과 교유


≪陽村先生文集≫ 양촌 권근(權近, 1352~1409) *박계양[개명 돈지]의 후배

조선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소수서원]의 건립 과정을 기록한 ≪竹溪誌(죽계지)≫에 명문가로 박윤문과 네 아들의 미담이 기록되어 있다.
    
≪竹溪誌≫ 周世鵬(주세붕) 編 *4형제 대과급제 : 밀양, 대양, 삼양, 계양

賀竹溪安氏三子登科詩序[李穡]

予惟光廟設科之後。至于令未嘗罷。而父子兄弟聯中者。夫豈少哉。吾病也。不能博考。子其訪之古老。求之史氏。錄之以來。吾將爲子序之。未幾。安氏又來曰。吾不敢遠稽諸古。爰自忠烈王以後。得上黨韓中贊公而下十六家耳。雖多何益。願先生之敎焉。予曰。宰相金覲有子三人登科。曰富佾。曰富軾。曰富儀。是已。…<중략>… 密城朴氏。曰密陽。曰大陽。曰三陽。曰季陽。…<중략>… 昌寧成氏。曰石璘。曰石瑢。曰石珚。…<중략>…

죽계안씨 세 아들의 등과 축하시 서문[이곡]
나는 말하기를, “光宗이 과거를 창설한 이래로 지금까지 한번도 파한 적이 없었으니, 부자나 형제가 내리 과거에 오른 자가 어찌 적겠는가. 나는 병이 들어서 넓게 상고를 못했으니, 그대는 옛 늙은이에게 물어보고 史家에게 구득해서 기록해 오라. 나는 장차 그대를 위하여 서를 하겠다.” 하였다.
그후 며칠이 못 되어서 안씨가 또 와서 말하기를, “나는 감히 멀리 옛일까지는 상고하지 못 하고, 우선 충렬왕으로부터 上黨 韓中贊公(한 중찬공) 이하 열여섯 집을 구하였습니다. 비록 많은들 무슨 도움이 있겠습니까? 원하건대 선생은 가르쳐주소서.” 하므로, 나는 이르기를,
“재상 金覲(김근)의 아들 삼 형제가 과거에 올랐으니 富佾(부일)ㆍ富軾(부식)ㆍ富儀(부의)가 바로 그 사람들이요, …<중략>… 밀성 박씨에 密陽(밀양)ㆍ大陽(대양)ㆍ三陽(삼양)ㆍ季陽(계양) 사 형제 …<중략>… 창녕 성씨에 石璘(석린)ㆍ石瑢(석용)ㆍ石珚(석인) 삼 형제 …<중략>… 가 있다.” 하였다.

응천후인, 박윤동의 직계 선대는 조선이 개국하자 정몽주와 함께 後日을 기약하며 은거하다가 조선 중종(中宗) 때부터 靜庵 趙光祖(조광조)에 의해 士林이 대거 등용될 때 수명정의 건립자 박이서의 부친, 돈계 박률이 출사하면서 조선의 조정에 이름을 올리며 밀양박씨 제일의 명문가로 커가게 된다. 정조(正祖) 때 북학(北學)의 대학자였던 초정(楚亭) 박제가(朴齊家)도 그 후손이다.


≪貞蕤閣集≫ 楚亭 朴齊家(1750~1805) *박윤문의 15세손 *박률의 7세손


▣인물 연구<8>

≪韓琴新譜≫의 저자, 奎齋 朴胤東(박윤동)에게 거문고는 좌우명이었다.

朴胤東[1673(顯宗 14)~1734(英祖 10) 향 62歲]의 字는 世百(세백), 號는 奎齋(규재)이며 ≪한금신보≫의 편저자이다.


琴者禁也。禁止於邪以正人心也。 琴은 禁하는 것이다. 사특함을 금지함로써 사람의 마음이 바로잡힌다.
琴者樂之統也故君子所當御也。 거문고가 음악을 통섭하기에 군자가 마땅히 다뤄야하는 것이다.

≪한금신보≫ 첫장 첫구절에 나오는 말이다. 그의 청춘은 서인과 남인의 세 차례 '환국정치'로 숙청의 시대였다. 엄숙할 '肅', 肅宗의 시대였다. 그 속에서 사는 법은 禁하는 것이다. 잘못 나서면 다친다는 것이다. 거문고는 그에게 울분을 참아내는 탈출구이자 마음을 다잡는 좌우명이었다.
이 책에서 선비가 거문고를 연주하는데 다섯 가지 금기사항을 언급했다.

五不彈[出萬寶全書] 다섯 가지 거문고를 타지 않을 때. ≪萬寶全書≫에 나온다.
疾風雨不彈 거세게 바람 불거나 비 올 때, 거문고를 타지 않는다. 
塵中不彈 紅塵[어지러운 세상]일 때, 거문고를 타지 않는다.
對俗子不彈 속된 자를 대할 때, 거문고를 타지 않는다.
不坐不彈 앉지 못할 때, 거문고를 타지 않는다.
不衣冠不彈 의관을 갖추지 못할 때, 거문고를 타지 않는다. 

박윤동에게 기회가 왔다. 새로운 임금, 景宗(경종)이 등극하면서 출사길이 열렸다. 17세 때 漢城試에서 봄, 가을 연달아 합격하며 집안의 기대를 모았다. 이후 10번이나 과거를 보았으나 서인들이 주관하는 會試에서 낙방하였다. 3년씩 열번이니 30년의 세월이다. 경종 3년(1723), 소론들이 정국을 잡았을 때 마침내 別試에 합격하였다.
  
≪科表集抄[可覽]≫ 朴胤東(51세) 三下

51세 나이로 급제하여 이듬해 사헌부 지평에 올랐으나 자신을 알아봐 준 임금이 지병으로 그해 승하를 하고 말았다. 30년을 기다려 찾은 꿈이 1년만에 끝나버린 것이다. 어쩌면 야속할 수도 있는 主君에게 마지막 송별사를 올렸다. 이것이 문제였다. 만사의 한 구절이 英祖(영조)를 등극시킨 노론의 政敵들에게 먹잇감이 되었다. 곧바로 파직시키고 國葬(국장) 기간동안 정국을 장악하는 좋은 소재된 것이다.

  
≪英祖實錄≫

英祖 卽位年 11월 27일
○敎曰 撰進輓章, 事體至重, 今觀副司直朴胤東所進輓詞, 則危塗閱歷千層浪, 黼座依俙一夢場一句, 語殊不審愼, 從重推考, 使之改進。 

하교하기를,
"輓章(만장)을 撰進하는 것은 事體가 지극히 무거운데, 지금 副司直 朴胤東(박윤동)이 올린 輓詞를 보건대, '위험한 길에서 천 겹의 파도를 겪었고[危塗閱歷千層浪], 黼座(보좌)는 한바탕 꿈속에 희미했네[黼座依佈一夢場]'란 한 구절은 매우 신중을 기하지 아니하였으니, 종중 추고(從重推考)하라."
하고, 고쳐 올리라고 하였다.
≪英祖實錄≫

'從重推考'. 엄중이 따져 물고를 내라는 말이다. 만사를 수정하여 다시 올린 것이 ≪景宗國葬都監儀軌(경종국장도감의궤)≫(1724)에 실려있다.

  

≪景宗國葬都監儀軌≫(1724) 挽詞 行副司直 朴胤東(52세)

行副司直 朴胤東

天祐吾邦寶曆綿。篤生神哲應千年。喤喤已占符昌聖。嶷嶷仍知邁啓賢。
明德盡心襁褓養。文皇遇物訓箴宣。躬持百行人無間。運履多艱德不愆。
三紀元良仁聞洽。四年參決聖功全。文王有子無憂者。大舜何人願學焉。
禮樂豈亶承令緖。誠明元自授眞詮。風霆半夜消虹孛。日月中天次度躔。
高拱穆淸如帝坐。旁馳風化若郵傳。淵泓不測千尋海。嵬蕩無名一大天。
便殿夜闌看牘奏。講帷秋早對箱編。薰琴遞與塤箎和。黼扆仍幷枕被聯。
千歲白雲方祝聖。一朝金鼎遽昇仙。欄花天上巡遊遠。階莢人間節序遷。
曉葆凄涼行有日。宵衣寂寞覿無緣。如傷惠入嬴癃厚。若喪情敎婦孺偏。
尺地瞻天曾儼若。寸心傾日自油然。生成有力恩侔海。報答無階淚徹泉。
怳愡有時驚夢寐。怦營謾自索筵篿。揄揚盛德臣何敢。慚愧詞場筆似椽。


行副司直 朴胤東 행부사직 박윤동
天祐吾邦寶曆綿 하늘이 도와 우리 나라 보력이 이어지니
篤生神哲應千年 독생하여 신령이 밝아 천년동안 응하리.
喤喤已占符昌聖 엉엉 울며 이미 부절을 잡고 성군을 불러봐도
嶷嶷仍知邁啓賢 높이 높이 올라갔음을 알고 어진 임금께 아룁니다. 
…<중략>…
生成有力恩侔海 나서 자라 세력을 가졌으니 성은이 하해와 같은데
報答無階淚徹泉 제 보답은 관직없는 처지니 흐르는 눈물은 샘과 같습니다.
…<중략>…
揄揚盛德臣何敢 신이 어찌 감히 성덕을 기려 드러내겠습니까?
慚愧詞場筆似椽 부끄럽게 만사를 쓰니, 붓이 서까래 만해졌습니다.
≪景宗國葬都監儀軌≫

≪한금신보≫가 이 해에 쓰여진 것이다. '만사 파동'으로 아들의 출사가 완전 차단되었다. 박률로부터 끊김없이 이어지던 과거 급제의 명맥이 처음 끊기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어린 英祖(영조)를 앞에 두고 노론과 소론의 싸움은 점입가경이었다. 끝내 사단이 났다. 무신년(영조 4, 1728)에 소론의 강경파 이인좌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 때 박윤동은 반란 진압에 참여하며 공신에 책봉되었다. '奮武原從功臣' 二等에 錄勳되었다. 그 때 관직은 文官에게 녹봉만 주고 實職은 없는 일종의 대기발령 상태인 武官職인 副司果(부사과)였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사헌부 장령으로 복직이 되었지만 자식들의 출사는 끝내 막히고 말았다.

  
≪奮武原從功臣錄券(분무원종공신록권)≫(1728) 副司果 朴胤東(56세)

40년후, 영조의 탕평책이 자리잡아 가면서 똑똑한 손자 朴道翔(박도상), 朴道仁(박도인), 朴道天(박도천)이 연거푸 대과에 급제하였다.

英祖 44년 9월 17일
○檢閱權禛上疏, 言奉敎朴道仁祖胤東, 負犯非尋常, 不可與作僚, 命給其章, 削其官。 敎曰 "朴胤東若名在丹書, 予何調用其孫? 今禛欲揚其祖之忠, 陷道仁於陷穽, 此道一開, 豈有完人?" 蓋禛疏盛稱其祖忭名節, 謂與道仁同列, 將不免爲先祖罪人, 故上敎及之。

檢閱 權禛(권지)이 상소하여, '奉敎 朴道仁(박도인)의 祖父 朴胤東(박윤동)은 죄를 지은 것이 예사롭지 않으니 함께 同僚(동료)가 될 수 없다.'고 말하였는데, 그 글을 돌려 주고 그의 관직을 삭탈하라고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박윤동의 이름이 만약 丹書[죄를 붉은 글씨로 쓴 刑書]에 있다면 내가 어찌 그 손자를 調用(조용)하겠는가? 이제 권진이 그 祖父의 忠을 드러내려고 하여 박도인을 함정에 빠뜨리니, 이 길이 한 번 열리면 어찌 완전한 사람이 있겠는가?"
하였다. 대저 권진이 그 조부 權忭(권변)의 名節[명분과 절개]를 훌륭하게 일컬으면서, '박도인과 班列(반열)을 같이 하면 장차 先祖의 죄인이 되는 것을 면하지 못한다.'고 말하였기 때문에 임금의 하교가 여기에 미쳤다.
≪英祖實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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