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實錄[조선왕조실록] > [03]태종공정대왕실록(太宗恭定大王實錄)》

 
[03]태종공정대왕실록(太宗恭定大王實錄)》
상품명 : [03]태종공정대왕실록(太宗恭定大王實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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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원본 기준)

-도서명 / 표지서명 : 太宗實錄
-卷頭題名 : 太宗恭定大王實錄
-편저자 : 春秋館(朝鮮) 敬奉王旨撰.
-판사항 : 訓鍊都監活字本
-발행사항 :  [刊地未詳] : [刊者未詳], 世宗13年(1432) 
-형태사항 :  36卷16冊 ; 54.2×32.6 cm(大小不同)
-일반사항 :  卷末: 春秋館敬奉王旨撰進監館事…孟思誠[等諸臣銜名] 宣德六年辛亥三月日進.
-특기사항 :  國寶 제151-1호(太白山史庫本)
                  1997년 훈민정음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록



*목차



▣ 太宗恭定大王實錄
○ 總序
○ 太宗實錄 元年(1401年)
○ 太宗實錄 二年(1402年)
○ 太宗實錄 三年(1403年)
○ 太宗實錄 四年(1404年)
○ 太宗實錄 五年(1405年)
○ 太宗實錄 六年(1406年)
○ 太宗實錄 七年(1407年)
○ 太宗實錄 八年(1408年)
○ 太宗實錄 九年(1409年)
○ 太宗實錄 十年(1410年)
○ 太宗實錄 十一年(1411年)
○ 太宗實錄 十二年(1412年)
○ 太宗實錄 十三年(1413年)
○ 太宗實錄 十四年(1414年)
○ 太宗實錄 十五年(1415年)
○ 太宗實錄 十六年(1416年)
○ 太宗實錄 十七年(1417年)
○ 太宗實錄 十八年(1418年)
○ 附錄 / 纂修官 名單




*해제


<능화표지>


<비단표지>









<컬러 영인본 견본>








<영인본 견본>


《태종실록》은 조선 제3대 국왕 태종(太宗)의 원년(1401) 정월 1일부터 18년(1418) 8월 10일까지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한 사서이다.
정식 이름은 《태종공정대왕실록(太宗恭定大王實錄)》이며 모두 36권 16책으로 이루어져 있다.

1.《태종실록》 편찬 경위


세종 8년(1426) 8월부터 편찬하기 시작하여 세종 13년(1431) 3월에 완성하였다. 세종 1년(1419)에 정종이 승하하고, 4년에 또 태종이 승하하였다. 익년(1423) 12월 24일(신미) 춘추관(春秋館)의 지관사(知館事) 변계량( 卞季良)과 동지관사(同知館事) 윤회(尹淮) 등이 상서하여, 태종 때에 《태조실록》을 편찬한 예에 의하여 《정종실록》과 《태종실록》을 편 찬할 것을 건의하였다. 세종은 곧 이를 허락하고, 같은 달 29일(병자) 태종 즉위년(1400) 11월부터 18년(1418) 12월까지의 사관(史官)의 사 초(史草)를 납입하게 하였다. 실록의 편찬을 담당한 지춘추관사 변계량 등은 태종 시대의 사관의 사초를 거두어 들이는 한편, 사고에 이미 수집되어 있는 정종 시대의 사 초와 정부의 기록 등, 모든 사료를 동부 연희방(燕喜坊)에 있는 덕흥사(德興寺)에 옮기고, 세종 6년 3월 1일(정축)부터 편찬에 착수하였다.
그리하여, 세종 8년 8월에 《정종실록》을 완료하고, 계속 《태종실록》을 편찬하던 중, 세종 12년 4월 22일(계사)에 변계량이 사망하였다. 그러므로 동월 25일(병신) 편찬 사무소를 의정부(議政府) 건물로 옮기고, 좌의정 황희(黃喜)와 우의정 맹사성(孟思誠)으로 하여금 이를 감수하 게 하여, 1년 후인 세종 13년 3월 17일(신사) 《태종실록》 36권을 완성하였다. 《태종실록》을 감수한 사람은 처음에는 변계량, 후에는 황희·맹사성이었으나, 《태종실록》 끝에 기록되어 있는 수찬관 명단 중에는 변계량과 황희의 이름이 없다. 그것은 변계량이 중도에 사망하고, 황희는 실제로 감수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인 듯하다. 《태종실록》 편찬에 관계한 춘추 관 당상(堂上)은 감관사 맹사성, 지관사 윤회(尹淮), 동지관사 신장(申檣)이요, 당하관(堂下官), 즉 낭청(郞廳)은 기주관 안지(安止)·윤형(尹 炯)·조서강(趙瑞康)·이옹(李壅), 기사관 안수기(安修己)·이선제(李先齊)·박시생(朴始生)·오신지(吳愼之)·권자홍(權自弘)·장아(張莪)·어 효첨(魚孝瞻)·김문기(金文起)·강맹경(姜孟卿)·이종검(李宗儉) 등이다. 《태종실록》은 편찬 직후 세종 13년(1431) 4월 25일(기미) 《태조실록》·《정종실록》과 함께 고려 시대의 실록을 보관하였던 충주 사고(忠州 史庫)에 봉안(奉安)하였다. 그때까지 실록(實錄)은 이 한 벌뿐이었고, 충주 사고는 민가가 밀집한 시내에 위치하여 화재의 염려가 있다. 그리하 여 세종 21년(1439) 6월 사헌부(司憲府)의 건의로 새로 전주(全州)와 성주(星州)에 사고를 설치하고, 세종 27년(1445) 11월 19일(경인)까지 세 벌을 더 베껴 모두 네 벌을 만들어 춘추관·충주·전주·성주 사고에 각기 한 벌씩 봉안하였다. 《세종실록》부터는 실록을 편찬할 때마다 활자 로 인쇄하여 이상 네 사고에 한 벌씩 분장(分藏)하였다. 《태종실록》은 편찬한 지 10년을 지나 세종 24년(1442)에 《태종실록》·《정종실록》과 함께 개수하였다. 선조 37년(1604) 실록을 재출판(再出 版)할 때, 태종 12년 4월 25일(계유)에 기록되어 있는 호조 전서(戶曹典書) 정연(鄭昖)의 이름을 정초(鄭招)로 고치고, 동 16년 10월 12일(경오)의 김노(金輅)의 시호(諡號) 공희(恭僖)를 공경(恭頃)으로 고쳤다. 정공의 이름자는 선조의 어휘(御諱) ‘연(昖)’자와 같았고, 김노의 시호는 중종 의 시호와 같기 때문에 고치게 되었다.



2.《태종실록》의 체제와 내용


《태종실록》은 실록의 일반적인 범례에 충실하게 편찬되었다. 그러나 즉위한 해(1400)부터 그 해 말까지의 사실은 《정종실록》에 수록되어 있다. 이는 전왕의 치세를 존중하는 유년칭원법(踰年稱元法)의 뜻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고, 또 《태종실록》과 《정종실록》을 동시에 편찬하면서 연도의 중복을 피하기 위한 방책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된다. 태종은 태조의 다섯째 아들로서, 태조의 여러 아들 가운데 가장 걸출한 인물이었다. 그는 조선 왕조의 개국 당시에 크게 활약하였고, 이후 명(明) 나라와의 관계가 원활치 못하여 명 태조 주원장(朱元璋)이 국교 단절을 선언하였을 때, 직접 명나라 서울 금릉(金陵: 南京)에 가서 명 태조와 회담하여 국교를 회복하기도 하였다. 그는 이복 동생 이방석(李芳碩)이 세자로 책봉된 데 대하여 불평을 품고, 태조 7년(1398) 8월에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이 때 그는 태조로 하여금 그 형 정종에게 양위하게 하고, 정종 2년(1400) 11월 11일에는 정종의 선양(禪讓)을 받아 즉위하였다. 태종 18년(1418) 8월 10일 아들 세종에게 양위할 때까지 18년 동안 왕위에 있었다. 태종은 안으로 국가의 제도와 문물을 정비하고, 밖으로 명(明) 및 여진(女眞) 일본과의 관계를 정상화하여 국가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그는 세종에게 양위한 후에도 병권(兵權)을 놓지 아니하고 세종 원년(1419)에 왜구(倭寇)의 소굴인 대마도(對馬島)를 정벌하여 크게 왜구를 응징하였다. 이후 별궁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세종 4년(1422) 5월에 56세로 승하하였다.



《태종실록》의 주요 내용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태종은 왕권을 강화하고 중앙집권을 확립하기 위해 공신과 외척들을 대부분 제거하였다. 1404년에는 3년 전의 이거이(李居易) 난언사건을 들춰내 이거이와 이저(李佇)를 귀향시켰다. 1407년에는 불충을 들어 처남으로서 권세를 부리던 민무구(閔無咎)·민무질(閔無疾) 형제를 사사하였다. 1415년에는 불충을 들어 나머지 처남인 민무휼(閔無恤)·민무회(閔無悔) 형제를 서인으로 폐하고, 이듬해 사사하였다. 같은 해 이숙번(李叔蕃)을 축 출하고, 1414년에는 잔여 공신도 부원군으로 봉해 정치 일선에서 은퇴시켰다. 이로써 그의 말년에는 왕권을 견제할 만한 강력한 세력은 없었다. 1401년에 문하부를 혁파하고 의정부 구성원으로만 최고 국정을 합의하게 하여 의정부제를 정립하였다. 간쟁을 맡은 문하부낭사(門下府郎舍)를 사간원으로 독립시키고, 삼사와 삼군부를 사평부(司平府)와 승추부(承樞府)로 개정하였다. 1405년에는 의정부 기능을 축소하고 육조 기능을 강화해 육조직계제를 강화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육조장관을 정3품 전서(典書)에서 정2품 판서로 높이고, 좌·우정승이 장악했던 문무관의 인사권을 이조·병조로 이관하였다. 육조에 각기 세 개의 속사(屬司)를 설치하고, 독립 관아 중에서 의정부·사헌부·사간원·승정원· 한성부 등을 제외한 90여 관아를 기능에 따라 육조에 분속시켰다. 1414년에는 육조직계제를 시행하여 육조가 국정을 나눠 맡게 함으로써 왕권과 중앙집권을 크게 강화하였다. 1413년에 지방제도를 개편하여 10월에 완산을 전주, 계림을 경주, 서북면을 평안도, 동북면을 영길도 (永吉道)로 고쳤다. 아울러 군·현 이름에 있는 ‘주(州)자를 산(山)·천(川)자 등으로 바꾸면서 1유도부(留都府)6부(府)·5대도호부 (大都護府)·20목(牧)·74도호부·73군·154현으로 지방 행정을 정비하였다. 태종은 즉위하던 해에 친병을 갑사(甲士)로 편입시키고, 양반 자제 중 무예에 뛰어난 자를 뽑아 별시위(別侍衛)로 편성하였다. 1401년에는 삼군부 (三軍府)를 승추부로 개편해 왕명 출납과 군기를 장악하도록 하였다. 1403년 삼군부를 삼군도총제부로 부활하고, 승추부는 군기를, 도총제부는 군 령을 나눠 장악하게 하였다. 1405년 승추부를 병조에 귀속시켜 병조가 군사지휘권까지 장악하였다. 1409년에는 11도(道)에 도절제사를 파견하고, 영진군(營鎭軍)·수성군(守城軍)을 정비하였다. 1403년에는 각 도마다 경쾌속선을 10척씩 만들어 왜구에 대비하게 하고, 1415년에는 거북선을 개발하였다. 태종은 1411년부터 1413년에는 평안·함경도까지 양전(量田)을 시행해 모두 120만여 결의 전지를 확보하였다. 1406년에는 사원전을 혁파해 5만~6만 결을 확보하였다. 1408년에 공사노비의 신공(身貢)과 제주의 공부(貢賦)를, 1413년에 함경도·평안도의 공부를, 1415년에는 제주의 수조법과 맥전조 세법을 정하였다. 1413년에는 사천변정(私賤辨正)에서 속공(屬公)되는 노비와 혁거된 사원 노비 8만여 구 등 총 12만여 구를 중앙과 지방의 각 사에 분속시켰다. 1414년 에는 종부법(從父法)을 제정해 국역 인구를 확보하고 노비 주인의 세력 약화를 도모하였다. 1401년에는 신문고(申聞鼓)를 설치해 백성들이 억울한 일을 자유롭게 청원하거나 상소할 수 있게 하였다. 한편, 1410년에는 호포세(戶布稅)를, 1415년에는 포백세(布帛稅)를 폐지하였고, 서얼차대법(庶孼差待法 )을 만들었다. 태종은 유학을 크게 장려하여 1407년과 1411년에는 권학사목(勸學事目)과 국학사의를 정하고, 4부학당을 건축하였다. 1401년에는 문과고강법(文科考講 法)을 제정해 강경(講經)의 비중을 높였고, 1413년에는 고려 이래의 공거(貢擧)·좌주문생제(座主門生制)를 혁파하였다. 1400년에 소실된 문묘를 1407 년부터 1409년까지 중건하고 문묘제도를 정비하였다. 또한 묘제(廟制)·혼례·장제(葬制)·조관복제(朝冠服制)도 차례로 정하였다. 1413년에는 단군· 기자에 대한 제사를 중사(中祀)로 승격시키고 유교적인 제사 의식으로 정비하였다. 1406년에는 불교의 사찰을 12종파 232사만을 남기고 5만~6만 결의 전토와 8만여 노비를 속공(屬公)시켰으며, 도첩제(度牒制)를 강화하고 각종 부역에 승려를 동원하는 등 불교 배척을 강행하였다. 또한 1417년에는 서운 관(書雲觀)에 소장된 비기도참서를 불태웠다. 태종대에는 편찬사업을 크게 일으켰다. 권근과 하륜(河崙) 등에게 명해 《동국사략》을 편찬하게 하고, 1409년에는 《태조실록》을 편찬하였다. 1403년 에 주자소를 설치해 계미자(癸未字) 수십만 자를 주조하였다. 1412년부터 1416년까지 《십칠사》·《대학연의》·《원육전》·《속육전》·《승선직지록 乘船直指錄》·《동국약운》·《경제육전원집상절 經濟六典元集詳節》·《속집상절 續集詳節》 등을 편찬하였다. 이 밖에도 태종은 수도를 개성에서 한양으로 옮기고, 창덕궁·덕수궁·경회루·행랑·청계천을 조성하였다. 백관의 녹과를 정비하고, 호구법을 제정하였 으며, 호패법을 실시해 호구와 인구를 파악하였다. 1418년에는 방탕한 생활을 이유로 장자인 세자[讓寧大君]를 폐하고 충녕대군(忠寧大君 : 뒤의 세종)을 세자로 삼아 2개월 뒤에 왕위를 물려주었다. *출처:국사편찬위원회




<해제 2>


세계기록유산 朝鮮王祖實錄, 春秋館(朝鮮) 編.


朝鮮朝 太祖에서 哲宗에 이르는 약 470여년간의 역사적 사실을 각 왕별로 편찬·기록한 史書이다.  본서는 일정한 시기에 일괄적으로 동시에 편찬된 것이 아니고 前王이 죽은 뒤 다음 왕이 즉위하면서 實錄廳을 개설하고 前王代의 諸記錄을 수집하여 편찬한 것이다. 책명을 각 왕별로 《太祖實錄》·《世宗實錄》등으로 부르기도 하나 원래는 해당 왕의 廟號·諡號등을 합해 완전한 책명으로 쓰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본서의 史體는 각 왕을 중심으로 매일 매일 日字順으로 기록하는 編年體의 형식을 위하고 있다.  이와같은 實錄의 편찬은 朝鮮王代에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이러한 역사기록 형식은 일찌기 중국의 梁나라에서 비록되었고 이후 중국의 역대왕조는 대대로 이 선례를 따라 실록을 편찬하였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高麗時代 부터 實錄을 편찬하여 특별히 설치한 史庫에 간직하였다. 그러나 《高麗王朝實錄》 은 오늘날 전해지지 않고 있다.  본서 편찬의 시초는 太祖가 1408년(太宗 8)에 죽은 뒤 다음해 8월 太宗이 河崙에게 《太祖實錄》의 편찬을 명함으로써 비롯된다.  《定宗實錄》과 《太宗實錄》은 1423년 (世宗 5) 11월부터 편찬이 시작된다. 實錄을 편찬할 때는 春秋館내에 임시로 實錄廳 혹은 纂修廳 (燕山君日記는 修正廳 또는 日記廳)을 설치하고 領議政 또는 左右議政을 摠裁官으로 삼고 大提學과 문필로 이름있는 사람을 선발하여 都廳 및 各房의 堂上에 임명한다.  各房의 구성은 해당 왕의 재위기간이 길 경우는 6房이나 대체로 3房으로 나누어져 있다. 實錄을 편찬하는 기본자료는 時政記와 史官의 史草이다.  기타 해당 왕의 재위기간 동안 각 관청의 기록인 《各司騰錄》· 《承政院日記》 혹은 각 개인의 일기·疏草·文集·野史도 편찬의 자료로 이용된다. 후기에 내려 오면 《備邊司騰錄》·《日省錄》도 자료로서 사용되었다. 이와 같은 자료를 수집한 다음 각 房의 堂上과 郎廳은 이들 자료들을 年月日順으로 分類, 編年體 형식의 實錄 初草를 작성하여 都廳에 넘긴다.  都廳에서는 郎廳에서 올린 初草 가운데 잘못된 부분을 수정하고 또한 추가로 보충할 부분은 보충하여 2차 원고인 中草를 작성한다. 이러한 中草를 바탕으로 摠裁官과  都廳堂上이 이들을 校閱하여 문장과 체재를 통일하고, 최종적으로 修正·筆削을 가하여 正草를 만들게 된다. 이 正草本으로 실록을 인쇄하여 史庫에 봉안하고, 實錄의 기본자료로 이용한 諸史草 및 初·中·正草는 모두 洗草한다.  이 洗草는 방대한 종이가 소모되어 그 종이를 다시 이용키 위한 것이다. 朝鮮初期의 太祖·定宗·太宗의 3대 實錄은 처음 각각 2부씩 등사하여 1부는 서울의 春秋館, 1부는 고려시대부터 실록을 보관했던 忠州史庫에 간직했다. 그러나 실록을 장기적으로 보존하기 위하여 1445년 (世宗 27)에 다시 2부를 등사하여  全州와 星州에 새로운 史庫를 설치하여 1부씩 分藏하였다. 《世宗實錄》이후는 매 편찬시에 활자로 인쇄하여 上記 4史庫에 보관하였다.  그후 임진왜란이 일어나 春秋館·忠州·星州에 실록을 보관했던 각 史庫가 불에 타서 소실되고 全州史庫의 실록만이 남게 되었다.  따라서 정부에서 太祖에서 明宗까지 13代 실록을 內藏山에 옮겼다가 이 후 海州·江華島·妙香山 등지로  옮기면서 보관하였다. 1603년(宣趙 36) 7월부터 1606년 3월까지 13代 실록을 다시 3부씩 출판하여 최종 교정본 및 兵火를 면한 全州史庫의 原本 실록을 합쳐 5부를 만들었다.  또한 史庫를 江華島 摩尼山, 慶北 太白山, 平北 妙香山, 江原道 五臺山에 설치하여 각각 1부씩 보관시켰다.  즉 春秋館·太白山·妙香山에는 宣祖代 출판된 新印本,  摩尼山에는 原本인 全州史庫의 실록,  五臺山에는 校正本을 보관시켰다. 1617년(光海君 9)에 편찬된 宣祖實錄도 이와 같이 하였다. 그런데 1624년(仁祖 2) 李适의 亂으로 서울  春秋館 實錄은 소실되었다.  또한 1633년 後金과의 관계가 악화됨으로 정부에서는 이를 염려하여  妙香山史庫를 赤裳山으로 이전하였다.  한편 摩尼山 實錄은 1636년 丙子胡亂으로 크게 파괴되었으나 顯宗때 완전히 보수하였다. 이 후 摩尼山 史庫는 1678년(肅宗 4) 江華島 鼎足山에 신설한 史庫로 이전되었다.  仁祖 이후의 실록은 4部를 인쇄,  鼎足山·太白山·赤裳山·五臺山 史庫에 간직하고 朝鮮朝 末期까지 완전히 보관하여 왔다.  1910년 일제가 대한제국을 합병하면서 鼎足山本 및 太白山本은 奎章閣圖書와 함께 조선총독부로 이관되어 宗親府 건물에 보관되었다.  赤裳山本은 昌德宮 藏書閣에 보관되었다.  五臺山本은 동경제국대학으로 이전되었으나  1923년 關東大地震때 소실되었고 이 가운데 27책이 서울대 도서관에 이전 보관되어 있다. 총독부에 이관되었던 鼎足産本과 太白山本은 1929년 규장각도서와 함께 京城帝大 도서관에 이관되어 보관되었다. 赤裳山本은 해방 다음해의 도난사건과 6.25동란의 와중속에 대부분 流實되었다.  
*출처 : 서울대규장각/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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