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크기 : 정본 A4(20.5 x 29.3cm) * 비단표지 : 상단의 도서 이미지가 비단표지입니다. 찢어질 염려가 없습니다. * 능화표지 : 전통 匠人이 손수 배접/능화판 작업으로 고급스럽게 제작됩니다. * 포갑추가 : 포갑은 별도 품목으로 주문시 [포갑추가]를 하면 맞춤제작됩니다.
 <능화표지 견본> <포갑 견본>
*서지(원본 기준) -도서명 : 孟子集註大全 -편저자 : 胡廣(明) 等奉勅編 -간행년 : 純祖20(1820) -판본사항 : 木板本[丁酉字飜刻本] -형태사항 : 14卷 7冊, 장정:線裝, 크기:35.0×23.0cm, 四周單邊, 半郭 25.0×17.0cm, 有界, 半葉 10行 18字, 註雙行, 上二葉花紋魚尾 -주기사항 : 印章:侍講院, 春坊藏. 刊記:庚辰(1820)新刊內閣藏板 -사부분류 : 經部/四書類/孟子
*목차 ≪孟子集註大全≫ (一) 孟子集註序說 孟子集註大全卷之一:梁惠王章句上 孟子集註大全卷之二:梁惠王章句下 (二) 孟子集註大全卷之三:公孫丑章句上 孟子集註大全卷之四:公孫丑章句下 (三) 孟子集註大全卷之五:滕文公章句上 孟子集註大全卷之六:滕文公章句下 (四) 孟子集註大全卷之七:離婁章句上 孟子集註大全卷之八:離婁章句下 (五) 孟子集註大全卷之九:萬章章句上 孟子集註大全卷之十:萬章章句下 (六) 孟子集註大全卷之十一:告子章句上 孟子集註大全卷之十二:告子章句下 (七) 孟子集註大全卷之十三:盡心章句上 孟子集註大全卷之十四:盡心章句下
*견본이미지 및 해제
 <영인본 견본>
*해제
≪孟子集註大全≫는 明代 胡廣(1370-1418) 등이 成祖 永樂帝의 명을 받아 四書에 대한 註釋을 집대성하여 편찬한 ≪四書大全≫ 가운데 일부인 ≪孟子集註大全≫을 조선에서 간행한 것이다. 판본은 권말에 ‘庚辰新刊 內閣藏板’이라는 刊記로 보아 純祖 20年(1820)에 內閣(奎章閣)에서 번각하여 印出한 책이다. ---------------------------------------------------------------------------------- ▶개요 『孟子』는 四書(논어·맹자·대학·중용) 중의 하나이다. <梁惠王>‚ <公孫丑>‚ <滕文公>‚ <離婁>‚ <萬章>‚ <告子>‚ <盡心> 등 7篇으로 되어 있다. 司馬遷의 『史記』에 따르면 맹자의 저술임이 분명하지만, 자신의 저작물에 ‘맹자’라고 한 점 등을 들어 맹자의 自作이 아님을 주장하는 견해도 있다. 唐나라의 韓愈는 맹자가 죽은 뒤 그의 문인들이 그 동안의 일을 기록한 것이라 하였다. 현재는 여러 고증을 거쳐 맹자 본인이 쓴 것임은 물론, 孔子의 孫子이자 曾子의 제자인 子思에게서 受學한 것으로 확증되고 있다. 학통이 孔子→曾子→子思→孟子로 이어지면서 儒學이 諸子百家 중 제일의 학파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맹자(BC 372?~BC 289?)는 이름이 가(軻), 자는 자여(子輿)이다. 공자의 고향인 曲阜(지금의 산둥성 취푸) 부근인 추(鄒, 현 산둥성 추현 동남)에서 태어났다. 추는 공자가 태어난 노(魯)나라에 속한 지방이라는 설도 있고 독립된 나라라는 설도 있다. 어느 쪽이든 공자의 고향인 곡부에서 가까운 곳이었다. 『맹자』는 首尾一貫한 논조와 설득력 있는 논리의 전개, 박력 있는 문장은 맹자라는 한 인물의 경륜과 인품을 전해주기에 손색이 없다. 전체 7篇 340章에 3萬 5579字로 되어 있는데, 正祖가 특히 읽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 ▶인물소개① ▪ 맹자(孟子) BC 372?~B.C.289?.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사상가. 이름이 가(軻), 자는 자여(子輿)이다. 공자의 고향인 曲阜(지금의 산둥성 취푸) 부근인 추(鄒, 현 산둥성 추현 동남)에서 태어났다. 자사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학통을 이었다. 전국시대 여러 제후국을 돌며, 인의설(仁義說)ㆍ성선설(性善說)ㆍ왕도정치론(王道政治論)을 역설하였으며, 유교를 도덕학(道德學)으로서 확립하고 정치론(政治論)으로서 정비하였다. 저서로 ≪맹자≫가 있다. 원나라 지순(至顺) 원년(1330)에 추국(鄒國) 아성공(亞聖公)으로 추봉되었다. ▪ 眞影 바로가기 ---------------------------------------------------------------------------------- ▶인물소개② ▪ 주돈이(周敦頤) 1017~1073. 북송(北宋)의 학자. 자는 무숙(茂叔)이고, 호는 염계(濂溪)이며, 시호는 원공(元公)이고, 도주(道州) 영도(營道) 사람이다. 남창 현령(南昌縣令), 건주 통판(虔州通判) 등을 지냈으며, 공자묘(孔子廟)에 종사되었다. 염학(濂學)의 창시자로, 정호(程顥)ㆍ정이(程頤)ㆍ소옹(邵雍)ㆍ장재(張載)와 함께 북송오자(北宋五子) 중 한 사람이다. 염계선생(濂溪先生) 또는 주자(周子)로 불린다. 본명은 돈실(敦實)이다. 송나라 영종(英宗) 조서(趙曙)의 초명인 조종실(趙宗實)을 피휘하여 돈이로 개명하였다. 정호(程顥)와 정이(程頤) 형제가 스승으로 섬겼다. 저서에 ≪태극도설(太極圖說)≫, ≪역통(易通)≫, ≪주자전서(周子全書)≫ 등이 있다. ▪ 소옹(邵雍) 1011~1077. 북송(北宋)의 학자. 자는 요부(堯夫), 호는 안락와(安樂窩)ㆍ백원(百源), 송나라 때 경학가로, 범양(范陽) 사람이다. 도가사상의 영향을 받고 유교의 역철학(易哲學)을 발전시켜 특이한 수리철학(數理哲學)을 만들었다. 주염계(周濂溪)ㆍ정명도(程明道)ㆍ정이천(程伊川)과 함께 도학(道學)의 중심 인물로 평가된다. 일생 낙양(洛陽)에 숨어 살았다. 저서로는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 ≪이천격양집(伊川擊壤集)≫ 등이 있다. 시호는 강절(康節)이다. ▪ 장재(張載) 1020~1077. 북송(北宋)의 학자. 자는 자후(子厚), 호는 횡거(橫渠), 시호는 헌공(獻公)이다. 송대 이학(理學)을 창시한 북송오자(北宋五子) 중 한 사람이다. 관중(關中)에서 강학하였으므로 그의 학문을 ‘관학(關學)’이라 부른다. 그의 기일원론은 청대 왕부지(王夫之)와 대진(戴震) 등에 의해 계승ㆍ발전되었으며, 인성론(人性論)은 주희에게 영향을 주었다. ▪ 정자(程子) 송나라 때의 학자 정호(程顥), 정이(程頤) 형제를 말한다. 이정(二程). ▪ 정호(程顥) 1032~1085. 북송(北宋)의 학자. 자는 백순(伯淳), 호는 명도(明道)이다. 하남성(河南省) 낙양(洛陽) 출신이다. 벼슬은 종정승(宗正丞)에 이르렀다. 그의 저술은 ≪이정전서(二程全書)≫에 모두 수록되어 있다. 세상에서는 명도(明道) 선생이라 일컫는다. ▪ 정이(程頤) 1033~1107. 북송(北宋)의 학자. 자는 정숙(正叔), 호는 이천(伊川)이다. 형 정호(程顥)와 함께 주돈이(周敦頤)에게 배웠고, 형과 아울러 ‘이정자(二程子)’라고 불리며 정주학(程朱學)의 창시자로 알려졌다. 저술로 ≪역전(易傳)≫이 있으며, 그의 저술은 ≪이정전서(二程全書)≫에 수록되었다. 이천백(伊川伯)에 봉해졌다. 세상에서는 이천(伊川) 선생이라 일컫는다. ▪ 주희(朱熹) 1130~1200. 중국 남송(南宋)의 대학자. 자는 원회(元晦)ㆍ중회(仲晦), 호는 회암(晦庵)ㆍ회옹(晦翁)ㆍ둔옹(遯翁)ㆍ창주병수(滄洲病叟)ㆍ자양노인(紫陽老人)ㆍ운곡노인(雲谷老人)이다. 존칭하여 주자(朱子)라고 한다. 부친 주송(朱松)의 친구들인 호헌(胡憲), 이동(李侗), 유면지(劉勉之), 유자휘(劉子翬)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다. 16세 되던 1145년에 유자휘(劉子翬, 1101~1147)로부터 ‘원회(元晦)’라는 자를 받았으나 20대 초반에 중회(仲晦)로 바꾸고, 이후로는 줄곧 이 자를 썼다. 주희는 철학뿐 아니라, 역사에도 깊은 관심을 가져 사마광(司馬光)이 편찬한 역사서인 『자치통감(資治通鑑)』이 무원칙하다고 여겨 그것을 다시 재편집하여, 1172년(43세)에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을 완성하였다. 남송 효종(孝宗) 순희(淳熙) 2년(1175)에 육구연 형제와 아호지회 논쟁을 벌이고 중국 복건성(福建省) 건양현(建陽縣) 운곡(雲谷)에 회암초당(晦庵草堂)을 짓고 지냈다. 1777년(48세)에 ≪논어집주(論語集註)≫, ≪맹자집주(孟子集註)≫, ≪논어혹문(論語或問)≫, ≪맹자혹문(孟子或問)≫을 완성하였다. 1179년(50세)에 지남강군(知南康軍)에 제수되었는데 부임하고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의 유지를 찾아 주문(奏聞)하여 그곳을 복원하고 학규(學規)를 만들어 지키도록 하였다. 또한 학궁(學宮)에 염계(濂溪) 주돈이(周敦頤)의 사당을 세우고 명도(明道) 정호(程顥)와 이천(伊川) 정이(程頤)를 배향하였으며, 또 별도로 오현당(五賢堂)이라는 사당을 세워 도 정절(陶靖節) 즉 도잠(陶潛), 둔전원외랑(屯田員外郎) 유환(劉渙), 그 아들인 비서승(秘書丞) 유서(劉恕), 상서(尙書) 이택(李擇), 간의대부(諫議大夫) 진관(陳瓘)을 제향하였다. 1184년(55세)에 중국 건녕부(建寧府) 숭안현(崇安縣)에 있는 무이산(武夷山)에 주자가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짓고 강학(講學)하였다. 이후 해를 거듭하며 ≪역학계몽(易學啓蒙)≫, ≪시집전(詩集傳)≫, ≪주역본의(周易本義)≫를 완성하고, 1189년(60세)에 〈대학장구 서(序)〉, 〈중용장구 서(序)〉를 지었다. 1194년 장사에 부임하면서 악록서원(岳麓書院)을 복구하고 죽림정사(竹林精舍)를 지었으며, ≪의례경전통해(儀禮經傳通解)≫를 편찬하였다. 1200년(71세) 건양 고정(考亭)에서 병사하였다. 생을 마치기 사흘 전까지 ≪대학장구≫를 수정하였다고 한다. 유언으로 그의 사위인 황간(黃榦)에게 도통을 전하였다. 그의 일생은 조선의 유학자들에게 표본이 되어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문집 ≪주자대전(朱子大全)≫과 언행록 ≪주자어류(朱子語類)≫가 있다.≪宋史 卷429 道學列傳1 朱熹≫, ≪朱子年譜 卷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