忠武公 李舜臣(1545∼1598)의 遺稿全集. 1795년(正祖 19)에 王命으로 校書館에局을 설치하고 檢書 柳得恭의 감독아래 편집, 간행. ▶행력-인종 01(1545, 01세) 3월 8일, 漢城 乾川洞에서 태어나다.-명종 21(1566, 22세) 武藝를 배우기 시작하다.-선조 09(1576, 32세) 2월, 式年武科에 합격하다. ○ 12월, 함경도의 童仇非堡 權管이 되다.-선조 12(1579, 35세) 2월, 훈련원 봉사가 되다. ○ 10월, 忠淸 兵使의 軍官이 되다.-선조 13(1580, 36세) 7월, 鉢浦 水軍萬戶가 되다.-선조 14(1581, 37세) 1월, 일로 인해 파직되다. ○ 5월, 훈련원 봉사가 되다.-선조 16(1583, 39세) 10월, 乾原堡 權管이 되어 藩胡를 소탕하다. ○ 훈련원 참군이 되다. 부친상을 당하다.-선조 20(1587, 43세) 8월, 鹿屯島 屯田官을 겸하다. 절도사 李鎰의 무함으로 파직되어 白衣從軍하다.-선조 22(1589, 45세) 2월, 전라도 순찰사 李洸의 軍官이 되다. ○ 11월, 선전관이 되다. ○ 12월, 井邑 縣監이 되다.-선조 23(1590, 46세) 7월, 高沙里鎭 兵馬僉節制使가 되다. ○ 8월, 折衝將軍에 올라 滿浦鎭 水軍僉節制使가 되다.-선조 24(1591, 47세) 2월, 珍島 郡守, 加里浦鎭 水軍僉節制使에 제수되었다가 全羅左道 水軍節制使가 되다. ○ 3월, 倭의 침략에 대비, 병기를 정비하고 龜船을 제작하다.-선조 25(1592, 48세) 1월, 本營 및 各鎭에서 試射하다. ○ 2월, 戰船을 점검하고 鉢浦ㆍ蛇渡ㆍ呂島ㆍ防踏鎭을 순시하다. ○ 3월, 京江船을 점검하다. ○ 4월 16일, 왜적이 부산을 함락시키자 諸將을 소집하다. ○ 5월, 제장을 거느리고 唐浦에 나가다. 왜선 30여 척을 玉浦에서 격파하다. 공으로 嘉善大夫에 오르다. 泗川에서 왜선 13척을 격파하다. ○ 6월, 唐浦에서 왜선 20여척을 격파하다. 資憲大夫에 오르다. ○ 7월, 固城 見乃梁에 나가 왜선을 閑山島로 유인하여 70여 척을 격파하다. 正憲大夫에 오르다. 安骨浦에서 왜선 42척을 격파하다. ○ 8월, 熊川 縣監 李宗仁을 시켜 왜병 35인을 참수하다. ○ 9월, 釜山에서 왜선 100여 척을 격파하다. ○ 12월, 장계를 올려 ‘一族勿侵之令’을 환수하여 변방을 채울 것을 청하다.-선조 26(1593, 49세) 1월, 蛇渡 僉使를 시켜 松島에 伏兵을 두어 왜병을 포로로 잡다. ○ 2월, 부산에서 왜선을 추격하여 다 태우다. ○ 3월, 熊川에서 왜적을 격파하다. ○ 5월, 장계를 올려 忠淸 舟師를 계속 지원해 줄 것을 청하다. ○ 6월, 陣을 閑山島로 옮기다. ○ 8월, 三道水軍統制使를 겸하다. 陣에서 屯田ㆍ捕魚ㆍ煮鹽ㆍ陶瓮 등을 시행하여 무역하고, 군량을 비축하다. ○ 12월, 장계를 올려 試才設科할 것을 청하다.-선조 27(1594, 50세) 6월, 중국 원병이 당도하자, 三道 舟師를 竹島에 移陳케 하고 중국 장수 張鴻儒와 兵事를 논의하다. ○ 8월, 都體察使 李元翼과 함께 배를 타고 閑山陣을 살피다. ○ 義將 郭再祐ㆍ金德齡 등을 分送하여 왜적의 기밀을 탐지하다. 長門浦에서 왜선 2척을 태우다. ○ 10월, 충청도 절도사 및 先鋒諸將을 거느리고 永登浦에 들어가고 이어 長門에 들어가다. ○ 11월, 左右道에 降倭를 분송하여 放砲를 익히게 하다.-선조 28(1595, 51세) 7월, 見乃梁에 주둔하여 三道 舟師를 모아 結陣하다. ○ 12월, 체찰사 李元翼을 三千鎭에서 만나다.-선조 29(1596, 52세) 윤8월, 順天에서 체찰사와 兵事를 논하다.-선조 30(1597, 53세) 1월, 元均의 모함으로 拿鞫되다. ○ 4월, 사면령을 받아 白衣로 종군하다. 모친상을 당하다. ○ 6월, 都元帥 陣에 들어가다. ○ 7월, 元均이 敗死하자, 도원수의 명을 받아 晉州에 가서 散兵을 모으다. ○ 8월, 三道 統制使 가 되다. 會寧浦에서 왜선을 격파하고, 碧波津에 留陣하다. ○ 9월, 왜선을 격파하고 왜장 馬多時를 베다. ○ 10월, 季子 李葂이 전사하다. ○ 12월, 寶花島에 留陣하다.-선조 31(1598, 54세) 2월, 古今島에 移陣하여 백성을 모아 경작하고 군비를 강화하다. ○ 7월, 중국 水軍都督 陳璘이 이르자 酒宴을 베풀어 환영하다. ○ 9월, 도독과 함께 順天 曳橋 변에 진을 치다. ○ 11월, 왜적이 침입하여 猫島로 退陣하다. 정예 군사를 거느리고 露梁으로 진격하다. 19일, 도독을 에워싼 왜적과 격전 도중 탄환을 맞아 卒하다.-선조 32(1599) 2월, 牙山 선영에 장사 지내다.-선조 37(1604) 宣武功臣 1등에 책훈되고, 豐德府院君에 追封, 左議政에 追贈되다. ‘忠武’의 시호를 받다.-광해군 5(1613) 영의정에 추증되고, 忠烈祠, 忠愍祠, 顯忠祠에 제향되다.-영조 29(1753) 神道碑를 세우다.-정조 19(1795) 문집이 간행되다.*기사전거 : 年表, 行狀(崔有海 撰), 神道碑(金堉 撰) 등에 의함▶편찬 및 간행본 문집은 正祖의 命을 받아 原任 直閣 尹行恁이 저자의 시문과 관계 기록을 수집, 편차하고 檢書官 柳得恭이 監印하여 藝文館에서 1795년 活字로 인행하였다. 《초간본》 초간본은 모두 14권 8책으로 되어 있으며, 처음 인행시 內殿 西庫, 五大史庫, 홍문관, 성균관을 비롯하여 저자를 祭享하는 祠堂 10여 곳에 각 1건씩 배포하여 소장하게 하였다. 현재는 규장각(奎457), 장서각(4-6409), 연세대 중앙도서관, 고려대 중앙도서관(D1-A370) 등에 소장되어 있다.1918년에는 崔南善이 초간본에 句讀를 찍어 新文館에서 鉛活字로 간행하였다. 《중간본》 이 중간본은 14권 2책으로 되어 있고 국립중앙도서관(위창古3648-文62-35), 성균관대 도서관(D3B-872) 등에 소장되어 있다.1921년에는 李觀化가 慶南 統營에서 역시 鉛活字로 간행하였는데, 《삼간본》 이 본은 14권 4책으로 되어 있고, 규장각(想自古923. 5-Y63y-V.1-14), 성균관대 도서관(D3B-872a), 국립중앙도서관(한46-가763) 등에 소장되어 있다.1934년에는 徐長錫이 淸州에서 石板本 16권 6책으로 간행하였다. 《사간본》 이 본은 국립중앙도서관(한46-가1334), 성균관대 도서관(D3B-872b) 등에 소장되어 있다.위 문집과 별도로 「李忠武公家乘」이 1776년(영조 52)에 간행되었는데, 이는 6권 2책의 활자본이고, 저자의 遺稿와 行狀 등의 저자 관계 기록, 敎命 등이 수록되어 있다.문집 외에 저자의 사적만을 수록한 책으로는 「李忠武公遺事」 1책이 필사본으로 전해지고, 1908년 玄公廉이 활자본으로 간행한「李忠武公實記」 1책이 있다.본서의 저본은 초간본으로 규장각장본(奎457)이다.識(尹行恁 撰), 重刊敍(崔南善 撰), 刊記 등에 의함▶구성과 내용본 문집은 14권 8책으로 되어 있는데, 권 머리에 綸音, 碑銘, 卷首가 편차되어 있다. 윤음은 正祖가 1792년, 1793년에 내린 세 편의 글이다. 碑銘은 1794년 세운 신도비의 비명으로 正祖가 지은 것이다.卷首에는 敎諭 22편, 賜祭文 13편, 圖說 9편과 世譜, 年表가 실려 있다. 敎諭는 除授 혹은 陞品 기사와 군사에 관련하여 내린 왕의 명령이다. 賜祭文은 저자가 卒한 직후에 내린 宣祖의 제문을 비롯하여 幸行할 때에 祠堂 등에 내린 여러 왕들의 제문이 실려 있다. 圖說에는 중국 황제가 저자의 戰功을 찬양하여 내린 都督印 등 8개의 하사품과 거북선에 대한 그림과 해설이 실려 있다. 世譜는 德水李氏 1代로부터 저자의 子에 이르는 13代의 系譜이다. 年表에는 저자의 행력을 干支別, 月別로 세분하여 도표화하여 기록해 놓았다.총 14권 가운데 권1~8은 저자의 시문이고 권9~14까지는 附錄이다.권1에는 詩 5수와 雜著 12편이 실려 있다. 시 중에 〈閑山島夜吟〉에는 후인들이 追和한 작품이 다수 첨부되어 있다. 잡저에는 書簡ㆍ祭文 등이 실려 있다.권2~4는 모두 전란 중에 올린 狀啓로서, 왜선 격파를 보고하거나 屯田 설치를 요청한 내용들이다. 총 50편이다.권5~8은 〈亂中日記〉가 수록되어 있다. 권5는 1592년 1월 1일부터 1593년 9월 15일까지, 권6은 1594년 1월 1일부터 1595년 5월 29일까지, 권7은 1595년 6월 1일부터 1596년 10월 11일까지, 권8은 1597년 4월 1일부터 1598년 11월 17일까지의 일기이다. 일기에는 날씨로 시작하여 그날의 항전 기록과 公務, 방문, 접대 등의 사실이 기록되어 있고, 중간에 빠진 부분도 있다.권9에는 行錄 2편이 실려 있다. 從子인 正郞 李芬이 지은 행록에는 임진란이 발발한 이후부터 계사, 정유, 무술년에 걸쳐 두드러진 저자의 사적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고 判官 洪翼賢이 지은 행록에는 저자의 성품과 일생이 개괄적으로 간략하게 기술되어 있다.권10에는 承旨 崔有海가 지은 行狀, 李植이 지은 諡狀을 비롯하여 李恒福의 〈全羅左水營大捷碑〉 등의 碑文 7편이 실려 있다.권11은 李恒福이 지은 〈忠愍祠記〉를 비롯한 記文 11편과 家乘의 序文ㆍ跋文 등이다.권12는 鄭琢이 지은 〈伸救箚〉를 비롯하여 書簡, 祭文, 上樑文, 銘 등 36편의 글이다.권13~14는 紀實로서, 중국과 우리나라 사적에서 저자 관계 기록을 뽑아 모은 것이다. 우리나라 사적으로는 「國朝寶鑑」,「文獻備考」 등의 史書와 「西厓集」등 당시인들의 문집, 기타 邑誌가 들어 있고, 중국의 사적으로는 「明史」,「昭代年考」 등이 들어 있다.맨 끝에 이 문집의 간행에 관한 尹行恁이 지은 발문이 첨부되어 있다. (출처:한국고전번역원, 오세옥(吳世玉),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