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단표지 컬러판><비단표지 + 포갑 견본>*서지(원본 기준)-도서명 : 三國遺事 (順菴手澤本 영인교정본) -편저자 : 一然(高麗, 1206~1289) 撰 / 崔起潼, 李山甫 校-판사항 : 木板本 -간행년 : 朝鮮 中宗7年(1512) : 明나라 正德7년 -간사자 : 慶州府尹 李繼福 외 -형태사항 : 5卷2冊, 四周雙邊, 半郭 23.5 x 17.7cm. 10行21字, 註雙行, 內向黑魚尾, 30.4 x 20.9cm -주기사항 : 跋: 正德壬申(1512)...李繼福 -영인본발행처 : 고전간행회(1932년)-영인본소장처 : 국립중앙도서관*일러두기 : 본 영인본은 고전간행회(1932년)에서 일본 天理大學 소장의 順菴手澤本을 영인한 도서에 일부 착오가 있는 곳을 붉은 색으로 교정되어 있는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영인본을 재차 영인한 것이다. *목차 三國遺事(1冊) 卷1 : 王曆 第一, 紀異 第一 卷2 : 紀異 第二 三國遺事(2冊) 卷3 : 興法 第三, 塔像 第四 卷4 : 義解 第五 卷5 : 神呪 第六, 感通 第七, 避隱 第八, 孝善 第九 跋*견본이미지 및 해제<흑백 영인본 견본>
<컬러영인본 견본>≪三國遺事≫는 고조선·삼국·가락·후삼국에 관해 正史인 《三國史記》에 빠진 遺文軼事와 불교 사찰 등 撰者 일연(一然)이 관심을 끈 자료들을 수집·분류하여 편찬한 자유로운 형식의 野史이다. 찬자는 권5 卷首의 ‘國尊曹溪宗迦智山下麟角寺住持圓鏡沖照大禪師一然撰’이라는 문구에서 一然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三國遺事≫의 주요 부분인 권 제 3 이하는 일연이 70세 이후 국존으로 책봉 되기 전까지 운문사에서 이룬 업적이며‚俗事 부분인 王曆과 紀異 양편은 아직 宋朝가 있었던 때의 撰成인 듯하다.일연에 의한 初刊本의 간행 여부는 불분명하며 제자인 寶鑑國師 無極이 1310년대에 ≪삼국유사≫를 간행하였음은 당시 그가 첨가한 기록이 두곳 발견되는 것에서 추측할 수 있다.<前後所藏舍利>와 <關東楓岳鉢淵藪石記> 끝에 ‘無極記’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 그것이다.≪삼국유사≫의 전체적인 구성은 다음과 같다. 권 제 1의 <王曆> 제 1에는 三國과 駕洛‚ 後三國의 王代와 年表‚ <紀異> 제 1에는 古朝鮮 이하 三韓‚扶餘‚고구려‚백제 와 통일 이전의 신라 등 歷代 諸國에 관한 기록이 실려 있다. 권 제 2는 篇目이 따로 있지 않고(대부분의 교감본 및 번역본에서는 ‘기이 제 2’라고 붙여놓고 있으나 中宗壬申本과 같은 古板本에는 그러한 문구가 들어 있지 않다.) 前卷을 이어서 文武王-末王(金傅大王)까지의 통일 이후의 신라와 백제‚ 후백제‚ 駕洛國記에 대해 다루고 있다. 권 제 3은 <興法> 제 3으로서 佛法東傳의 사실을 신라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다. 권 제 4는 <義解> 제 5로서 羅代 拔群의 學僧 및 律師의 傳記를 수집한 것이다.권 제 5는 네개의 편목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神呪> 제 6은 密敎 神僧의 사적‚<感通> 제 7은 勤行感應의 古傳‚ <避隱> 제 8은 행적을 감추어버린 高僧의 傳記‚ <孝善> 제 9는 法俗을 통하여 孝行과 顯報에 관한 美談을 수록하고 있다.이상의 ≪三國遺事≫의 편목에서 <興法>제 3과 <義解> 제 5 사이의 篇次상의 문제 점이 제기되었다.今西 龍이 正德本의 <東京興輪寺金堂十聖>조와 <迦葉佛宴坐石> 사이에 衍文 비슷하게 있는 ‘塔像’이라는 두 글자가 ‘塔像第 四’ 중 ‘第 四’ 2字가 탈락된 殘文일 것이라고 추정한 이래 현재 流行되고 있는 대부분의 교감본과 번역본에서는 그의 주장에 따라 권 제 3의 ‘興法第 三' 다음에 ‘塔像第 四’를 설정해놓고 있다.佛國土說에 입각하여 佛敎史觀을 체계화한 ≪三國遺事≫의 史學史的 위치에 대한 평가는 다음과 같다.첫째 高僧傳의 체제 를 바탕으로 하여‚ 불교적 생활 속에 습합된 上古에서 후삼국에 이르는 시기의 野史를 紀異篇으로 앞 부분에 넣고 전통적이면서 유교적이기도 한 孝善 행위를 마지막에 붙여서 편집한 독특한 체재라는 점이다.둘째 鄕歌나 吏讀 등의 표기는 우리나라 古代語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된다는 점이다.셋째 古記 등 현전하지 않는 문헌을 많이 인용하여 우리나라 古代의 生活과 文化의 原形을 보여주려 했다는 점이다.특히 최초로 檀君神話를 수록하여 우리의 國祖가 단군이라는 사실을 밝힘으로써 民族史의 自主性을 견지한 것은 가장 평가받을 부분이라 하겠다. (김영심) ≪三國遺事≫의 판본별 개요서울대규장각소장본 《삼국유사》는 1512년(중종 7) 慶州府尹 이계복(李繼福)이 重刊한 中宗壬申本(正德本)이다. 현재 권말의 跋文 중 8행-13행 부분에 缺落이 있어 온전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대체적인 중간 경위는 파악이 가능하다. 당시 경주부에는 三國本史(삼국사기)‚ 遺事의 옛 冊板이 있었지만 세월이 흘러 1行 중 겨우 4‚ 5字만을 판독할 수 있을 정도로 마멸이 심하였다. 이리하여 널리 完本을 구하여서 改刊을 하고자 했으나 구하지 못하다가 다행히 星州牧使 권주(權輳)의 도움으로 책판을 개간한 듯하다. 당시에 전 책판을 개간한 것처럼 되어 있지만 전체 책판 290매 중 약 40매는 舊刻板을 사용했으며‚ 改刻板에 刻字의 양식이 다른 것들이 많은 까닭은 각 고을에 나누어 새기기도 했고‚또 개각판은 覆刻과 筆書補刻의 두가지 방법이 사용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계복이 중간한 책판은 19세기 중반까지 경주부에 보관되었지만 현재는 不傳이며‚ 중종 임신본을 印行한 몇 종의 간행본이 현재 국내외에 전해지고 있다. 서울대규장각소장본 《삼국유사》는 黃義敦이 소장하였던 것으로 완본이지만 약간의 加筆이 있다. 다음으로 5권의 完本인 順菴手澤本인데 이계복의 판간 뒤 32년 이내에 인출한 것으로 順菴 安鼎福이 소장하면서 가필한 것이다. 今西 龍이 1916년부터 소장하였다가(今西本) 현재는 일본 天理大學 도서관의 귀중본으로 소장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고려대 중앙도서관(晩松文庫本)은 초기의 壬申 古印本으로 가필과 가획이 없어 원형에 가까운 귀중본이다. 현재까지 간행‚ 유포되고 있는 ≪삼국유사≫는 영인본·활판본(교감본)·번역본·주석서 등 여러 종류가 있는데 민족문화추진회에서는 1973년 서울대 소장본을 영인한 데다 崔南善本.鶴山(李仁榮)本까지 대조하여 교감하고 頭註를 붙였던 것이다. 이는 <均如傳> 및 <黃龍寺九層塔刹住本記>를 부록으로 덧붙인 양장본이다.===현존하는 《삼국유사》의 판본별 서지정보====*[조선초기 판본] : 모두가 책의 일부가 유실된 零本 -석남본(石南本) : 왕력과 권1만의 殘本. 1940년대에 宋錫夏가 소장했으나 현재 행방불명. -곽영대본(郭永大本) : 일명 송은본(松隱本). 권3,4,5만 현존. 현재 郭永大가 소장. 보물 제419호로 지정. -니산본(泥山本) : 권2만 현존. 일명 성보박물관소장본. 보물 419-3호. -조종업본(趙鍾業本) : 권2만 현존. 현재 충남대 조종업(趙鍾業) 명예교수 소장. -범어사본(梵魚寺本) : 일명 성보박물관소장본. 권4,5만 현존. 보물 419-3호. *[中宗壬申年(1512)이후 판각 간행본] : 완질본이 전해진다. 당시 慶州府尹 이계복(李繼福) 등이 간행한 판각본이 근간이 됨. 중종임신본(中宗壬申本), 임신본(壬申本) 혹은 정덕본(正德本)으로 불린다. 明나라 武宗의 正德7년(1512)에 간행하여 正德本이라 부르는데 우리역사서에 왜 중국연호를 사용하는지 모르겠다. -서울대규장각본 : 壬申本 판각이후에 보각한 판이 들어있는 것으로 여겨지며 약간의 가필이 있지만 순암수택본에 비해 심하지 않다. 황의돈(黃義敦)이 소장하던 것으로 현재 서울대규장각 소장. 국보 306-2호. -순암수택본(順菴手擇本) : 壬申本 판각때부터 32년 이내에 인행 추정. 順菴 安鼎福(1712~1791)이 소장하면서 가필한 책. 현재 일본 天理大學 소장-만송문고본(晩松文庫本) : 壬申本 판각이후 1534년쯤 인행 추정. 가필과 가획(加劃)이 없으나 일부 낙장. 현재 고려대 소장. -조선광문회소장본(朝鮮光文會所藏本) : 권3,4,5 일부 결락. 六堂 최남선(崔南善)이 소장했던 본으로 현재 고려대 소장. 보물 제419-4호. -덕천본(德川本) : 일본 도쿠가와 가문(德川家)에 소장하고 있던 본. 임진왜란때 약탈된 것으로 추정. 현재 나고야 호사(蓬左)문고에 소장. 동경제국대학교에서 영인한 본.
<순암수택본 영인교정본>과 서울대규장각본(국보 306-2호)의 비교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삼국유사》 판본으로는 석남본(石南本), 곽영대본(郭永大本), 니산본(泥山本), 조종업본(趙鍾業本), 범어사본(梵魚寺本), 모씨본(某氏本) 등이 있는데, 모두 조선 초기 판본으로 알려지고 있다. 1940년대에 송석하(宋錫夏)가 소장했던 석남본(石南本)은 왕력(王曆)과 1권만의 잔본(殘本)인데, 현재는 그 행방이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다만 이 석남본을 모사(模寫)한 필사본이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어서 참고 된다. 곽영대본은 3,4,5권만이 남은 1책이다. 니산본 및 조종업본도 2권만이, 그리고 범어사본은 4,5권만 남은 잔본이다. 니산본은 현재 성암고서박물관에 소장하고 있다. 《삼국유사》의 완질은 1512년(중종 7)에 경주부(慶州府)에서 이계복(李繼福) 등이 간행한 中宗壬申本이 있다. 일명 正德本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 판본에는 서법(書法)이나 각법(刻法)이 서로 다른 것이 많다. 이것은 복각(覆刻)과 필서보각(筆書補刻)이 혼용되고, 또 각 고을에 나누어서 새긴 때문이다. 최기동(崔起潼), 이산보(李山甫) 두 생원(生員)이 교정을 보았는데, 옛 판본의 오류를 바로 잡은 경우도 있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없지 않았다. 등재원고(登梓原稿) 중에도 불분명한 곳이 있었을 것이고, 각수(刻手)나 교정자의 실수 또한 없지 않았다. 이 壬申本의 대표적인 인본(印本)으로는 순암수택본(順菴手擇本), 서울대규장각본, 만송문고본(晩松文庫本), 조선광문회소장본(朝鮮光文會所藏本), 덕천본(德川本) 등이 있다.순암수택본은 전체 5권이 갖추어진 완질본이다. 이 인본은 壬申本이 판각된 1512년으로부터 32년 이내에 인행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인본은 훗날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이 소장하면서 붓으로 가필을 한 것이기 때문에 순암수택본이라고 불려진다. 이마니시(今西龍)가 1916년에 입수하여 수장하던 이 본은 지금 일본의 천리대학(天理大學) 중앙도서관의 귀중본으로 소장되어 있다.서울대규장각본은 6 · 25전쟁 이후 황의돈(黃義敦)이 소장하던 것으로 통문관(通文館)을 거쳐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었다. 이 인본에도 약간의 가필이 있지만 순암수택본에 비해서는 심하지 않다. 민족문화추진회가 이 본을 저본으로 하여 영인본을 간행한 바 있다. 이 본에는 壬申本 판각 이후에 보각한 판이 들어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만송문고본은 김완섭(金完燮)이 고려대학교에 기증한 만송김완섭문고(晩松金完燮文庫) 속에 들어 있다. 이 인본은 壬申本 판각이 이루어지고 22년이 지난 1534년으로부터 그렇게 멀지 않은 시기에 인행된 임신본의 초기 인본으로 추정되고 있고, 특히 가필과 가획(加劃)이 없다는 점에서 선본(善本)으로 평가 받고 있다. 물론 이 인본에도 권2의 제49장, 권3의 제1장 및 제2장의 전면, 권5의 맨 끝장인 제30장, 그리고 발문 등이 결낙되었다. 朝鮮光文會에서 널리 사람을 놓아 찾은 결과, 승려들이 소장하고 있던 하책 (《삼국유사》 권3 · 4 · 5 부분) 삼본(三本)을 입수했는데, 이를 조선광문회소장본 제1호, 제2호, 제3호라고 했다. 현재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도서관에는 《삼국유사》 권3 · 4 · 5의 하책을 귀중본으로 소장하고 있다. 육당(六堂)이 소장했던 이 본은 권3의 앞부분 제1장으로부터 제10장, 그리고 권5의 제18장 후면으로부터 마지막까지의 뒷부분이 결낙된 잔본이다. 덕천본은 도쿠가와 가문(德川家)에 소장하고 있던 것으로 임진왜란 때 일본에 건너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전체 7장의 낙장이 있다. 동경제국대학교 문과대학 사지총서본(史誌叢書本)의 저본이 되기도 했다.(출처:서울대규장각,국사편찬위원회)